[데스크 칼럼] 2023 BIFF 견문록
김희돈 스포츠라이프부장
덕후들의 재밌는 잔치 펼쳐진 남포동
뉴 커런츠와 폐막작 만난 영화의전당
28년째 누린 BIFF 라이프 희망 확인
시월이 끝자락이다. 봄에 뿌린 씨앗을 거둬들이는 계절. 각지에서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가 풍성하게 열렸다. 스포츠계도 마찬가지다. 지난한 동계 훈련을 거치고 봄과 여름을 땀방울과 함께한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는 전국체육대회가 이 무렵에 열리는 것은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스포츠가 늘 기쁨만 주는 것은 아니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진심인 부산 갈매기로서는 여섯 시즌 연속 가을을 즐기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고 가혹하다. 프로야구 출범 원년부터 어린이 팬으로 입덕, 40년 이상 사직야구장의 기상도에 울고 웃었던 기자에게도 그렇다. LG 트윈스의 정규시즌 우승이 마냥 부럽기도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선 29년 만에 이룬 그들의 성취가 희망의 증거로 보이기도 한다. 마침 롯데도 이전과 다른 리더십으로 새 시즌을 준비한다니 부디 ‘봄데’에도 가을 햇살이 충만하길.
부산국제영화제(BIFF)도 출발부터 줄곧 지켜본 축제의 장이다. BIFF가 첫걸음을 뗀 1996년 봄 신문기자가 됐다. 그해 9월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극장에서 열린 개막식 현장에 막내 기자로 참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담당 기자로 BIFF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지만, 영화 관람과 극장을 사랑하는 부산시민으로서 해마다 함께하고 있다.
올해 제28회 BIFF기간에도 사흘간 8편의 영화를 즐겼다. 사흘 중 이틀은 꼬박 남포동을 누볐다. 2011년 해운대 센텀에 영화의전당이 문을 열기 전, 그러니까 지금처럼 개·폐막식이 영화의전당에서 진행되기 전 BIFF는 남포동의 것이었다. 지금은 롯데시네마대영에서 진행되는 관객 소통 프로그램 커뮤니티비프로 맥을 잇고 있다.
맥주(람빅, 시간과 열정의 맥주), 커피(커피전성시대), 뽕짝(뽕을 찾아서), 재즈(한여름밤의 재즈)를 각각 다룬 다큐멘터리가 상영된 남포동은 덕후들의 잔치 마당이었다.
스페인에서 직접 맥주 양조장을 운영하는 감독(다니엘 루이즈)이 선보인 벨기에 전통 자연 발효 맥주 다큐 ‘람빅’은 맥덕들의 침샘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상영 후 게스트 비지트(GV)에 참석해 BIFF 초청과 한국인들의 관심에 감사를 전한 감독은 부산을 떠나기 양조장 몇 곳을 둘러볼 생각이라는 ‘덕질’ 본능을 과시하기도 했다. GV 참석자들에게 제공된 람빅 맥주의 시큼함이 다시 혀끝을 맴돈다.
커피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남긴 ‘커피전성시대(Shade Grown Coffee)’는 모모스커피에서 제공한 에티오피아 게샤빌리지 수마를 음미하며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영화 상영 후 마이크를 잡은 두 커피 헌터(모모스커피 전주연 대표·뉴올드커피 손상영 대표)의 생생한 필드 경험담은 영화의 향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극영화로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을 만났다.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단연 화제였지만, 예매 루저로서 하마구치를 만날 수 있는 차선책을 택했다. 지난해 영화의전당 상영 때 본 작품을 다시 선택한 건 정성일 평론가의 ‘강의’가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현시대 가장 뜨거운 감독 중 한 명의 작품세계를 정성일의 생각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BIFF 유람 마지막 하루는 영화의전당에서 보냈다. 영화제 폐막일, 그곳에는 아시안 신인 감독의 데뷔(혹은 두 번째) 장편작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뉴 커런츠 수상작 두 편과 폐막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뉴 커런츠 상영작을 모두 볼 수 없다면 수상작 두 편을 선택하라.” 현장 취재 기자가 귀띔한 요령을 따랐다. 폐막일이 돼서야 발표와 상영이 진행되는 뉴 커런츠 수상작은 예상대로 예매 전쟁 안전지대로 남아 있었다.
두 수상작은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소재로 한 일본 모리 다츠야 감독의 ‘1923년 9월’과 방글라데시 이퀴발 초두리 감독의 ‘더 레슬러’였다. 해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시각화한 감독의 서사와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반면 서사에 힘을 빼고 잔잔하게 생각거리를 던진 작가주의 신인의 솜씨도 인상 깊었다.
류더화(유덕화) 주연의 폐막작 ‘영화의 황제’ 좌석도 그날 구했다. 온라인 예매 오픈런이 아무리 치열해도 정작 당일엔 취소분이 나온다는 통설을 확인한 성과였다. 이는 캠핑장 예약 때도 가끔 효과를 발휘한다.
‘영화의 황제’는 저우룬파(주윤발)와 함께 ‘따거(맏형님) 시대’를 풍미했던 류더화의 좌충우돌을 웃프게 그렸다. 하지만 영화 포스터처럼 현재와 화해하려는 그의 마지막 몸짓은 분명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풍파에도 마침내, 스스로 알갱이를 차곡차곡 키워 왔음을 확인시켜 준 BIFF처럼.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