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빠순이'가 아니라 '팬덤'
소현숙 역사학자
요즘은 바빠서 특별히 음악을 찾아 듣거나 가수를 흠모할 여유가 없다. 그런 나에게도 한때 가수 모 씨의 팬이 되어 책받침에 사진 넣고 커다란 브로마이드를 벽에 붙여놓으며 절절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인터넷이 없던 때라 팬카페 같은 것도 없어 그저 나만의 세계 속에서 음악을 즐길 뿐이었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서로 모르는 타자와 취향을 나누며 적극적인 취향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은 소위 ‘오빠부대’ 혹은 ‘빠순이’라 불렸던 여성 팬층의 존재를 한국 사회에 강렬하게 알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당시 사용되었던 ‘빠순이’는 남자 연예인에게 환호하는 소녀팬들을 지칭하는 비하적인 용어이다. 학교 공부고 뭐고 다 팽개친 채 연예인만 추종하는 ‘광적’ 소녀집단이라는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10대 소녀들의 병폐 현상으로 이들을 다루었고, 거대한 소비자 집단이 된 소녀팬들이 대중문화를 좌지우지한 탓에 대중문화가 저질이 되었다는 한탄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비난에 찬 시선은 이제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빠순이’를 대신하여 ‘팬덤’이라는 말이 사용된 지 오래다. 스타 팬덤은 단순한 대중문화의 소비자를 넘어서 사회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만들어가는 팬덤의 영향력은 인터넷 소통 공간을 타고 국가를 넘어서 글로벌한 차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음악에 대한 소비를 넘어서 스타를 키워내고, 대중문화는 물론 정치·사회적 문제에까지 폭넓게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웹진 〈결〉에는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실렸다. 그 글에서 문화연구자 이지행은 BTS 팬들의 기억정치를 다루었다. 2018년 BTS의 한 멤버가 원폭과 해방의 이미지가 동시에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알려지면서 BTS는 원폭을 지지하고 심지어 나치를 추종한다는 일본 넷 우익의 비난에 몰리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거진 역사적 기억의 전쟁에서 전 세계 아미들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등 그동안 잘 몰랐던 아픈 과거의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며 서로 소통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백서(White Paper Project)에 담았다. 이지행은 이 과정을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여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낸 빛나는 순간으로서 포착한다. 한때 ‘빠순이’라 비난받던 취향 공동체로서의 팬덤은 어느덧 대중문화는 물론 폭력적 과거에 대한 성찰을 나누며 초국적 역사 기억을 만들어가는 정치 주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아마 집집마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열성 팬들이 있을 거다. 이들의 미래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