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3색 性이야기] 왕의 남색
김원회 부산대 명예교수
남색은 요샛말로 하면 남자 동성애다.
최근 상영되고 있는 TV 연속극 ‘고려 거란전쟁’을 보면서 조금 혼란을 느낄 분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리저리 얽힌 혈연관계, 왕의 동성애, 타성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저지르고도 존호을 유지한 채 천수를 다하는 왕후 등 지금의 우리 시각으로 보면 놀라운 게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세월이 그랬었던 걸 알아야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인 경종의 셋째 부인이었으면서도 김치양과 불륜을 맺어 아들까지 낳은 천추태후 또한 왕건의 손녀였다. 역사에서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되고 있지만, 당시 고려의 왕실 문화를 생각하면 꼭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니다.
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의 동성애 행각도 그렇다. 삼국시대 때도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백제의 동성왕도 신라의 혜공왕도 동성애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목종은 유행간이란 미소년을 사랑하여 남색으로 총애하였는데, 또 다른 꽃미남인 유충정이란 친구를 불러들여 왕과 삼각의 동성애를 계속하면서 정사를 농간하다가 ‘강조의 변’ 때 김치양 부자와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한다.
공민왕은 그의 아내인 원나라 출신의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제위라는 궁정 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 노국공주를 유난히 사랑했던 그였으니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동성애자라기보다는 양성애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에는 양성애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므로, 그의 남색만 드러났을 것으로 본다.
공민왕이 동성애자였음은 틀림없었지만, 그의 비극이 동성애 행위 때문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그가 남색을 했다고 하여 조정 안팎에서 비난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자제위 또한 왕의 욕망만을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라 원명 교체기에 친원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었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초기 조선조의 역사가들이 부패한 고려 왕실의 필연적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과 과장된 기록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또 잘 알려진 한림별곡에도 남색과 관련한 내용이 나오는데, ‘마치 옥을 깎은 듯이 가녀린 가인의 아리따운 두 손길을, 아! 옥 같은 손길 마주 잡고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라는 내용에서 가인이 ‘미소년’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려의 개방적이었던 성문화는 그러나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온 26대 충선왕에 의하여 잠시 주춤하게 된다. 그는 근친혼을 금지했고 각종 유교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고려말에 학자들 가운데 주자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면서 사회 분위기도 달라져 이전과 같은 개방적인 성 풍조가 일부 보수화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