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완행열차 / 허영자 (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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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시집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1995) 중에서

‘놓친 것이 잘된 일’이란 인식은 역설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놓아주어야 얻는 것이 있고, 멈추어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고난이 그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역설의 진리에 눈뜨게 되면 무엇이 이익이고 손해인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구별이 달갑지 않다. 분별은 자칫 편견이나 독선으로 치닫기 쉽다.

이 시의 ‘완행열차’는 현상의 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역설로서,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라는 깨달음을 준다. 누구나 빨리 쉽게 목적지에 가닿기를 바라지만, 빠르고 쉬운 것이 능사가 아니다.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가는 과정이야말로 ‘서두름 없’어 쾌적하고도 충실한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을 때 ‘서러운 종착역’은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음’을 온몸과 영혼으로 보게 된다. 하여 ‘완행’은 뒤처진 속도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충만한 세계 속으로 스며듦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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