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춘문예-평론] 시대와 착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바깥’에 관해 /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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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인간이 상징적인 것을 일부러 잊고 동물성에 이르는 것보다는 동물이 상징적 질서에 진입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

-레나타 살레츨-

1. 시대에 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그 단어 상에서 세 개의 주제의식이 있다. 첫 번째는 학교폭력을 방치하고 악화시키는 교육체계 안의 악인이고, 두 번째는 아이를 사회시스템에 방치하여 책임을 전가하는 괴물 부모이며, 세 번째는 사회 안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순차로 진행되는 3부는 ‘괴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차례로 변형함에 따라, ‘괴물’이라는 용어의 정의를 규정하지 않으면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무엇이라는 ‘괴물’의 의미를 부각한다. 1막에서는 자신의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중임을 의심했던 부모가 학교 시스템에 분노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2막에서는 이를 역쇼트로 바라보며 아이의 담임인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의 관점으로 학교 시스템을 말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화는 ‘분노’(2016)나 ‘실종’(2021)처럼 일본식 미스터리 스릴러의 계보를 잇는 듯 보이지만, ‘괴물’에서의 미스터리와 스릴감은 히치콕식의 정보격차를 작품 안이 아닌 바깥에 위치시킨다. 잘 알려져 있듯 히치콕은 “관객은 알고 있지만 작품 내에서는 모르는 것”이 영화의 서스펜스(suspense)를 유발한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여기서 ‘정보격차’는 그 위치 에너지를 따라 관객이 스크린을 내려다보는 일에 쾌감을 부여한다. 즉 히치콕에게 ‘간극’이나 ‘틈’은 관객의 우월적인 지위를 응용한 처사였다. 반면 ‘괴물’에서는 이러한 격차가 영화의 바깥, 관객의 현실지위에 위치함에 따라 영화를 보는 일에 대한 쾌감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이 닿지 못한 곳에 대한 죄악감을 유발한다. 1부와 2부의 묘사들에서 관객은 이 이야기가 현실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을 떠올리면서 영화의 이야기를 자기에 빗대어 이해하기를 시도하지만, 이윽고 이어지는 3부에서는 그 위치를 낮추어야만 하는 상황이 옴에 따라 ‘이해’는 ‘현실’을 포기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레나타 살레츨은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서 “인간이 상징적인 것을 일부러 잊고 동물성에 이르는 것보다는 동물이 상징적 질서에 진입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고 말한다. 살레츨은 이 말을 통해 인간의 감정에서 증오는 사랑보다 더 수월함을 말한다. ‘괴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증오와 사랑이라는 두 개의 감정이 나오지만 1부와 2부에서는 상대방을 괴물로 여기면서 타자화하고, 이를 토대로 그를 ‘증오’하는 일이 묘사된다. 싱글맘인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교장(타나카 유코)에게 “당신이 손자를 잃었을 때의 감정이 지금 제 감정입니다.”라고 말하며 학교 내의 폭력들에 무관심한 학교 사람들을 ‘괴물’로 취급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두하는 증오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실패했거나 거부되었음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점점 현실을 포기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2부에서도 호리 선생은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의 거짓말에 의구심을 품으면서 아이들을 향한 이해가 거부된 일에 천착한다.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일이 거부된 일은 곧 증오로 탈바꿈하여, 호리 선생은 직위가 해제된 후에도 학교로 찾아가 미나토를 몰아세우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3부에서는 아이들의 이상 행동이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관찰됨으로써 ‘괴물’은 학교 사람들이나 극성 부모 등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를 설명하는 단어라는 점이 밝혀진다. 산속의 끊긴 철로에 버려진 전차에서, 두 아이가 이마에 단어를 붙여 대상에 관해 알아가는 ‘괴물은 누구야?’ 놀이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놀이는 영화가 여태껏 괴물을 묘사하던 일들에서 벗어나 서로를 직접 물음으로써 단어(상징적인 것)를 잊고 동물성(스스로에 충실한 나)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1부의 시점에서 이에 관한 단서로는 미나토가 엄마에게 “돼지의 뇌를 한 인간도 인간이라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은 2부에 가서 요리의 집에 찾아간 사오리에 의해 밝혀지는데 그 말인즉 요리의 아빠가 요리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 있다. 요리의 아빠는 요리를 두고서 “이 녀석은 돼지니까요.”라는 식의 말을 하며, 이에 사오리는 그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하나 요리와 미나토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알아챈다. 이는 요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미나토의 말을 떠올려보는 일이었다는 점으로, 요리가 미나토를 생각하고 있음과 동시에 영화 내내 강조되었던 ‘괴물’이라는 단어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요리는 자신에게 닥쳐온 폭력들에 의해 스스로를 괴물로 여겼던 게 아니라, “남자의 몸을 한 여성과 여성의 몸을 한 남성”으로서의 형식을 떠올리던 것이었다. 이를 따르자면 비정형적이고 이례적인 존재로서 괴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관객에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연결되었던 시선들도 다르게 볼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이는 모든 이에게 사연이 있다는 식의 미화는 아니고 1부에서 싱글맘의 시점으로 호리 선생을, 2부에서 호리 선생의 시점으로 교장을 바라보고, 3부에서는 교장의 시선으로 미나토를 바라봄으로써 이들 간의 관계가 결국에는 일방적인 듯 보이지만 상호 순환적인 ‘형식’이라는 점을 전한다. 괴물은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며, 말하자면 ‘상징’과 심볼이 아닌 인간의 본성으로서 ‘내부’를 가리킨다. 영화는 계속해서 바깥에서 내부로, 부모가 아이를 대하고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식으로 시선을 투영하지만 이는 히치콕식의 서스펜스를 작성하는 일이 아니며, 관객으로 하여금 괴물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를 포기하게끔 한다.

전작들인 ‘아무도 모른다’(200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어느 가족’(2018) 등에서 현실에서 정말로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다뤄왔던 그를 보아왔던 관객들에게 ‘괴물’은 다큐멘터리의 작법으로 이해될 공산이 컸다. 그러나 ‘괴물’은 괴물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가 아니라 괴물을 작성하는 형식들에 관해 말하며, ‘동물적인 나’라는 점에서 각자의 본능에 솔직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싱글맘인 사오리에 대해 교직원들은 “싱글맘일수록 극성인 경향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교장에 관해서는 교직원이 “사실은 배우자가 아니라 본인의 잘못이었다고 하네요.”라는 식으로 소문을 발설하기도 한다. 또한 호리 선생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한편, 미나토와 요리는 서로의 관계에 이름 붙이기를 꺼리지만 그 마음까지도 속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들에게서는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하는 듯 보이고, 그런 점에서라면 이성의 산물로서-인간이 아닌 감정과 본능에 솔직한 동물로서 ‘괴물’의 가치가 대두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미스터리 장르는 이성적 체계에 포섭되지 않는 감정들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낙차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괴물이란 이 영화에서 바깥을 끌어들이는 내부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리얼리티’에 가하는 공격 덕분에 실재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견해를 참조해볼만 하다. 만약 괴물이 상징적 질서에 진입한다면, “상징계의 일원인 괴물은 현실주의자들이 ‘영화’에 가하는 공격 덕분에, 이들 세계는 내부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도 보이니 말이다. 말하자면 ‘괴물’은 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야기가 집약됨에 따라 그 자신의 중력을 잃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괴물’은 표면적으로 볼 때 “괴물은 누구게?”라는 홍보 문구에 덧붙여져 “악인은 누구인가?”라는 이야기 담론을 전파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관객이 영화 속의 괴물들에 빗대어 자신을 인간으로 파악한다면, 살레츨의 말은 “관객이 현실을 잊고 영화에 이르는 것보다는 영화가 현실에 진입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쯤이 될 테다. 바꾸어 말해 이는 영화가 묘사하는 관계들을 ‘괴물’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일이 그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를 받아들이면서 현실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있다. 즉 ‘괴물=악인’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여 괴물을 탐색하는 일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안에서의 한낱 유희로 소비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괴물’이라는 단어는 악인이 누구인지를 묻고자 현실을 소환하지 않으며, 이는 우리가 기반을 둔 현실이 절대적인 진리로 소비되기보다는 사유의 준거점으로서 착오를 종용한다는, 시대착오의 한 형식이다. 고레에다의 영화가 그 데뷔작인 ‘환상의 빛’(1995)에서부터 현실의 몇몇 문제들을 영화로 끌고 들어온다는 점을 떠올렸을 때 ‘괴물’도 분명 그런 사실들의 연장선에서 파악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괴물’은 악인을 끌어들이면서 이들을 심판하는 대체현실의 지위를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 시대에서 ‘어긋난’ 이들만이 머무르는 장소로서의 영화를 발견한다. 이를 위해 고레에다는 괴물의 정의를 확립하지 않고서 모호히 하는데, ‘세 번째 살인’(2017)처럼 대상을 관찰하여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소의 반복과 중첩을 통해 공간의 정경을 박물화하고, 이를 토대로 역사의 한 형식으로써 이들을 시대착오적으로 만든다. 즉 마크 피셔의 말처럼 ‘괴물’은 시대의 한 지표가 박물화하여 포스트, ‘바깥’을 상상할 수 없도록 내몰려버린 착오의 한 가지 양태이다.

2. 착오에 관해

피셔는 ‘칠드런 오브 맨’에 대해 쓴 비평 ‘커피 전문점과 난민 수용소’에서 박물관을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던을 연결하는 고리로 삼으며 프레드릭 제임슨의 관점을 인용한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던을 시대구분의 개념이라 지칭하며 “모든 역사성을 빼앗긴 사회”로 현재를 진단한다. 이를 따라 개개인은 박물관에 놓인 전리품처럼 별개의 주체성에서 탈구되어 나레이션과 도큐멘트로 위치 지어지며, 이는 곧 역사적 깊이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들이 서로 간에 어떤 연대기를 지녔든 간에 박물관의 전시 안에서는 평탄화된 과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괴물은 누구게?”라는 물음의 형식은 괴물에 대한 정의를 찾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게끔 한다. 3개의 부로 이루어져 ‘괴물’에 대한 진단을 내리는 이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몇몇 공간들은 존 포드의 ‘수색자’처럼 영화에 내재한 역사성을 제거한다. 1부, 2부, 3부의 시작이 늘 걸스바의 화재 장면인 걸 떠올리면 이 영화의 시간은 늘 같은 지점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은 볼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이 영화에 ‘바깥은’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시공간은 사실상 평탄하다. 그러니 영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3번의 반복에도 보이지 않는 곳들, 같은 사건을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아니라 각자만이 소유하는 고유의 시간들이다. 가령 〈괴물〉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면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장면은 미나토가 교장과 함께 음악실에서 관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의 연장선에 있는 듯 보인다. 1부와 2부에서 시스템 측에서의 악인으로 묘사되어왔던 교장의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는 곳으로, 그녀는 미나토에게 젊은 시절에는 음악교사였음을 고백하면서 마치 괴물의 웃음소리처럼 느껴지는 관악을 연주한다.

“출몰은 탈구된 시간 또는 어긋난 시간에 의해 공간이 침범되거나 붕괴할 때 일어난다.”고 마크 피셔는 말한다. 이를 따르자면 1부와 2부에서 내내 속을 알 수 없던 악인으로 묘사되는 교장이 3부에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일은 출몰이나 탈구로 볼만하다. 반복해서 걸스바의 화재 장면으로 돌아가는 영화에서 탈구된 시간이란 영화가 지닌 역사의 지평을 벗어나는 것, 어긋남으로써 인식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출몰’의 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착오의 시간이 영화의 핵심축으로 기능하며 여기서 괴물은 관객인 우리가 영화에 시선을 투영하는 낙차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시대와 착오의 두 가지 양립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착오란 무엇인가? 조르주 아감벤은 〈장치란 무엇인가〉에서 “동시대성은 시대착오를 통해 드러나며 이를 인지하는 것은 동시대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이 설명에서 동시대란 좁혀질 수 없는 간극에서 우리가 본래로 돌아가려는 운동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시대착오는 부유의 형식에서 모성으로 복귀하는 방법론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반복의 구성을 통해 현실 세계가 갖는 역사적 지평에서 벗어나지만 반대로 이러한 탈구는 영화만이 간직할 수 있을 몇몇 장면들을 출몰시킨다. 바로 이렇게 역사적 지평, 시대에서 탈구되어 모성에 안착하는 일을 두고서 우리는 시대착오라는 표현을 쓴다. 영화에서는 이를 잘 드러내는 장면으로 3부에서 두 아이가 첨탑 형태의 정글짐에 올라서는 게 있다. 유운성이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 방문한 두 사람 사이에 삽입된 평화의 공원 첨탑을 ‘외부’로 가리키는 대목은 ‘괴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정글짐의 최상단부에 올라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두 아이의 모습은 명실상부 ‘바깥’을 가리킨다.

우노 츠네히로는 ‘아발론’을 두고서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에서는 바깥이란 게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가 매끈한 형식을 이어가던 중에 불현듯 간극을 내비친다면, 이는 바깥이라고밖엔 볼 수 없으며 ‘드라이브 마이 카’에 관한 유운성의 지적을 따르자면 ‘바깥’을 드러내는 방식은 연극 무대에서 오지 않는 것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탈구되어 흐트러진 시간과 관련있다. 우노가 말하길 “현실로부터 독립한 허구의 기능이 정지된 시대를 오사와 마사치는 ‘불가능성의 시대’로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의 시대’로 불렀다”. 즉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란 그런 현실의 바깥을 사유할 수 없게 하는 강한 현실주의에 사로잡힌 사회이다. 하마구치가 연극 무대의 오지 않는 것들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히로시마의 첨탑은 맥락상 그 무대를 하나의 역사적 지평으로 만듦과 동시에 영화 전체의 연결고리에서 하나의 착오를 발생시킨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히로시마는 그 첨탑에서 오지 않는 ‘바깥’으로서 전후의 끝없는 연장을 가리키며, 이는 우노가 지적했듯 “‘허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현실을 그리는 것”으로서의 전후 체제를 가리킨다. ‘괴물’에서의 물음들은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를 괴물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 이에 사로잡힌 현실들에서 역사의 지평을 발견하고, 여기서 바깥을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정글짐 위의 첨탑에 올라 하늘을 마주하는 두 아이의 모습은 영화 전체에서 포섭되지 않는 예외적인 착오의 순간으로 파악된다. 영화가 괴물을 하나의 시대정신-악인은 누구인가?-으로 파악하며 역사적 지평으로의 무대로 삼을 때, 이러한 연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두 사람 간의 관계이자 낙원이다.

시대착오는 우리가 자신에로 돌아가야 한다고, 도망치지 말고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착오는 오인과 오해로 점철된 듯 보이나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우리의 시절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혹은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어 온 것일까? 대안을 가정할 수 없고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역사 안에서 영화는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곳에서 던져지는 물음이란 “괴물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 누구도 괴물로 만들지 않기”라는 공평함의 양식이다. 시대착오는 죄책감이나 부채의식으로만 설명되진 않으며, 따라서 시대착오는 오히려 자기만의 고유함에 관한 한 가지 단서가 되어줄 수도 있다. “돼지의 뇌를 한 인간”과 “인간의 뇌를 한 돼지”에 관한 물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러한 형식 사이를 파고들며 물음을 던지는 나 자신이다. 가령 자크 오몽은 〈영화와 모더니티〉에서 영화 매체를 ‘영역’과 ‘전개’라는 두 개의 단어로 분리하고, 이를 토대로 ‘영역전개’라는 한 가지 유효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오몽은 영화가 동시대성의 매체라고 지적하며, 영역을 전개하는 일이야말로 시간을 계속해서 흐르게 하는 영화 매체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오몽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의 시간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관찰자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관측되는 위치와 대상 간에 간극이 항상 변화하므로 이를 따라 영화의 영역은 특정할 수 없다. 이를 토대로 그는 영화를 동시대성의 매체로 규정하면서 ‘동시대인이란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는 견해를 내세운다. 이 고전적인 문구를 풀이하며 그가 전하는 말은, 영화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항상 현재를 기준으로 바라보아질 뿐이며, 결과적으로 영화의 ‘바깥’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현실이게 된다.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미나토가 영화에서 겪는 고민은 그 자신에 관한 정의라기보다 영화를 두고서 벌어지는 관점의 차이들에 관한 것인듯 보인다. 즉, ‘어디’서 볼 것인지가 주가 되는 것으로, 영화의 관람 경험은 그 위치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이는 큰 틀에서 볼 때 영화가 갖는 대부분의 특성이기도 하다. 오늘날엔 미술관을 벗어나는 미술 작업 등이 고려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성의 기준을 바로잡는 건 여전히 영화뿐이다. 미술과 영화는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점에서 사적이지만, 미술과는 달리 영화는 그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미술의 발화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리한다면 영화는 이 둘을 분리할 수 없거나 비교적 근접시킨다: “영화의 뇌를 한 현실”과 “현실의 뇌를 한 영화”(질 들뢰즈)를 우리는 분간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자기를 타인 여기듯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괴물’, 시대착오의 형식이란 어디서 발견해야 하게?” 영화는 한때 나였지만 지금은 아니게 된 것이고, 그런 점에서의 비체(abject)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영화에 비판적이고, 적대적이며, 비천해지고, 비루해진다. ‘괴물’에서도 우리는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각자 다르게 영화를 경험하는데, 이는 영화가 선보이는 하나의 평면에서 우리 모두가 미끄러지고 있음을 즉 ‘착오’하고 있음을 뜻한다. 가령 자크 리베트는 〈천함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거리를 두면서, 그게 내가 아닌 듯 행동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재현하는 방법을 말해야 한다는 그에게 영화는 배반의 논리를 따르며, 그렇기에 쇼트의 연결은 걸리적거리고 넘어질 만한 정도의 간극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시대착오란, 배반을 통해 경험되는 윤리의 한 형식이다.

3. 바깥에 관해

이를테면, “기술은 과거에서 줄곧 이어지지만 예술은 과거를 파괴하며 태어난다”는 담언을 떠올려보라. 영화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기에 자기를 파괴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예술은 그런 점에서 비천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말하면 안전하기를 택할 때 영화는 단순한 기술에만 그친다. 하지만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개인에 따라 맥락이 갱신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자리가 절대적으로 안전한 이상, 관객은 이것이 단순한 기술에만 그치지 않도록 할 방법을 모색하며 파괴의 대상으로서의 ‘자기’를 탐색하게 된다. ‘괴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화의 주된 고민은 모두 자기에서 비롯되는데, 싱글맘인 사오리가 남편의 부재에서 자신이 부모 노릇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문한다면, 호리와 미나토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고, 호리 선생은 자신이 선생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이들은 모두 자신을 기술적으로 대하지 않고서 삶과 마찰을 빚는 형식으로의 예술을 택했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착오가 이들의 고민을 드러낸다. 그런데 영화가 시대착오적이라면,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어디에 붙들려야 하는 것일까? 영화에서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은 자신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두면서 이를 대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에 대한 배반은 이 둘을 같은 맥락에 두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즉, 우리는 자기를 파괴하기 위해 자기에 매달릴 수가 없다. 영화는 이 점에서 자기를 파괴하기 위한 하나의 매듭이 되어주는 것 같다. 영화가 자신을 시대의 한 형식으로 내비칠 때 관객은 이를 토대로 개인의 삶을 묶어둘 틈새를 발견하고, 이 점에서 시대착오는 부조화가 아니라 영화 내의 연결성에 편입된다.

여기엔 여러 예시를 들어볼 수 있겠는데 그중에서도 유운성이 한국영화의 캐릭터성을 말하는 대목을 참조해보고 싶다. 유운성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군사 정부가 출범할 당시를 다루는 ‘서울의 봄’을 두고서 “역사를 유니버스로 삼고서 일련의 히어로와 빌런들을 선보이는 K-무비의 한 경향”이라고 언급한다. 이는 ‘국제시장’과 같은 부류의 영화, 즉 역사를 어떠한 세계관의 핵심으로 삼으며 시대를 투영해 만든 영화로, 대중이 자기를 투영할 만한 부류의 캐릭터가 생겨난다는 것이다-대중은 역사가 뒷받침된 세계관에 자기를 발견한다. 이는 영웅 심리이기보다 그들이 몸담았던 시대상을 체화한 인물에 매료되는 현상이다. 즉, 이들은 ‘자기’를 대할 수 있게끔 이를 분리된 상으로 만드는 영화들에 빠져들며, 여기서 캐릭터는 그러한 발견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이 결정들은 이들이 살아온 흔적들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예술이 아닌 기술에 가까우며, 개인은 이런 기술들을 매듭 삼아 자신을 예술화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세계관의 핵심으로 삼은 캐릭터의 수요란, 자신을 배반하는 과정에서 오는 비천함을 영화에 떠넘기며 자기는 예술적 성취만을 획책하는 일이다. 여기서 영화의 운동성은 이들로 하여금 과거를 마주 보게 하면서 척력의 반대편인 인력으로, 착오가 되어버린 자신을 본래의 시대로 편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동시대에 가까운 쪽은 오히려 관객인 우리다. 무언가 어긋나버렸다는 걸 잘 알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고레에다의 경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같은 영화에서, 또는 ‘세 번째 살인’ 같은 영화에서 이런 형식이 대두하는데 ‘괴물’이 그동안의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영화가 바깥을 배반함에 따른 비천함이 관객의 몫으로 남는지 아닌지의 경우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은 미나토와 요리가 서로 사랑했음을 알아차린 사오리와 호리가 막힌 선로로 달려가서 굳게 닫힌 전차의 해치를 열어젖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 이후에는 인물의 개인사가 되감기 되며 종국에는 두 사람이 어딘가의 언덕이라던가 초원처럼 보이는 곳을 달려가는 일이 묘사된다. 여기서 이 묘사는 각본가 사카모토 류지의 경우를 따라 생각해보았을 때 열린 결말에 해당하지만, 작품 내에서 ‘막혀있다’고 언급되는 선로 너머와 열차가 다니는 다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밝은 배경 풍을 염두에 두었을 때, 불교에서의 삼도천을 묘사한 듯 보인다. 즉, 두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가정한다면 영화가 내린 결론은 현실의 ‘바깥’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동안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진실이라던가 하는 분과는 그에 관객의 현실이 투영되고 이를 영화 안에서 자체적으로 끌어안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원더풀 라이프’(2001)에서도‘영화’는 개인이 생전에 꿈꾸던 이상,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가져와 스크린에 투영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바깥’을 내부로 끌어안았다. 사카모토 류지가 말했듯이 “진실은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본다면 이러한 ‘바깥’이 영화의 내부가 아니라 관객의 현실에 자리 잡는다는 게 ‘괴물’이 그동안의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괴물’은 관객의 현실 인식에서 괴리되어 어떠한 착오로서 기능하지만, 이러한 착오는 주체에 대한 배반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되려 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집약되어 영화를 보다 섬세하게 만든다. 이때 하나의 시공간을 반복하는 형식은 인물과 사건의 관계를 흩트려 놓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곳을 하나의 도큐먼트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괴물’은 시대착오로써 인물 간에 마찰을 유도하는 게 아닌, 나머지를 밀어내며 아이를 지킨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고전적인 추리물의 비평 방법론을 빌려 오는 일이 영화의 서브컬처화로 연결되진 않는다. 서브컬처란 어떠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일이 아니라 어떠한 세계를 필두로 한곳에 모이게 하는 성격들의 집합으로서의 인물을 묘사하는 것에 전반을 할애한다. ‘서브’가 메인에 밀려나 바깥에 자리한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영화는 인물이 살아가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뜻에서 현실에 중첩되어 영역을 전개한다. 영화는 그 자신이 아닌, 인물들로 하여금 시대에서 어긋나게 함으로써 ‘착오’를 제공하며, 그 자신은 특정한 시대, ‘역사를 담지한 배경으로서의 세계’로 기능한다. 이른바 자크 오몽 식의 [영역전개]로서의 영화란, 그 자신을 현실 세계에서 분리해 관객에 필중하는 사례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현실에 덮어 씌워지는 때도 있다. 그리고 서브컬처로서의 세계는 현실의 어떤 영역을 부유하게 하면서 느슨해진 연결고리를 ‘착오’라고 여기게끔 한다. 요컨대 착오의 핵심은 영역전개를 분리가 아닌 증강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영화가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평행세계라고 보면서 재현의 윤리를 따져 묻는 입장이 있는 반면, 착오는 영화를 일종의 증강현실로 이해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차원이지만 현실을 기반해, 그곳과의 깊은 연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실질상의 제2현실로 이해된다. 사실 일전에 사르트르는 “자신이 여기에 있지만, 거기에 있는 정신의 형상”을 두고서 아날로공(Analogon)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부재의 형상’으로도 요약되는 이 논의에서는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서로 같은 ‘자기’지만, 이를 불러내어 매개하려면 필히 형상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모종의 일치점이 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면 자신이 몰입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자기를 닮으면 도망치고 싶어진다는 점 말이다.

이 둘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이 바로 필드를 열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 ‘시대착오’의 형식이다. ‘괴물’은 그동안의 고레에다 영화들처럼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들을 보여주는 형식으로의 ‘바깥’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러 시선 사이에서 소외되어 있던 회색 지대를 조명한다. 이 회색지대는 우리가 아는 어떤 자신과도 닮아있지 않았고, 현실과도 매듭지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영화만의 고유한 것으로 남는다. 즉, 여기서 착오는 우리가 놓치거나 혹은 미끄러져 떨어진 게 아니라 이들 자신이 서로를 이해받는 고유의 현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사용하는 ‘괴물’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써 바깥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니게 됨으로써 매듭지어지는 착오와 간극에 관한 한 가지 알레고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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