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 정보조차 차단당한 약자, 그 이름 ‘전세 세입자’
사기·역전세 피해자 만나 보니
경매로 넘어갈 때까지 속수무책
임차권 등기명령도 사후 약방문
피해자 인정 요건 너무 까다로워
전세 보증금 상환 대출 완화라도
직장인 전 모(31·부산 수영구) 씨는 4년간 직장생활로 모은 쌈짓돈 1억여 원을 전세사기로 모두 날릴 위기에 처했다. “이 정도 근저당이면 주변 오피스텔과 비교할 때 평균이다. 안심하라”는 공인중개사 말을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오피스텔을 통째로 소유한 30대 건물주는 몇 달째 은행 이자도 내지 못했고, 결국 건물이 통째로 임의경매로 넘어가게 됐다. 전 씨는 “집주인이 ‘전세 보증보험은 내가 들어줄테니 걱정마라’고 했으나 거짓말이었다”며 “‘가진 돈이 없으니 배 째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오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알 권리 없는 전세 피해자
정부와 지자체에서 특별법과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전세사기는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세입자들의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전세라는 허술한 제도에 삶을 저당 잡힌 피해자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임차권 등기명령이나 내용 증명, 형사처벌, 지자체 원스톱 지원센터 등 여러 제도와 정책은 고통을 덜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피해 세입자들은 집주인의 자산 현황조차 알 수 없는 현행 시스템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직장인 이 모(35·부산진구) 씨는 가족이 살고 있던 빌라가 임의경매에 넘어가면서 전세 보증금 2억 원을 못 받고 있다. 이 씨는 “경매에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임대인이 빚을 지고 있었는지, 체납 세금은 얼마인지, 과거 파산한 전력이 있는지 등을 알 수 없었다”며 “여러 채의 빌라를 갖고 있기에 분명 빼돌린 재산 같은 게 있을거라 추측하지만, 여러 기관을 두드려봐도 세입자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전 씨 역시 “30대라는 나이, 타인 명의로 된 등기부상 주소 등을 볼 때 ‘바지 사장’이 아닐까 의심되지만 추측만 할 뿐”이라며 “설명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정보를 전달한 공인중개사 등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금융공기업의 한 고위 관계자는 “주택도시보증공사와 같은 기관도 임대인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라며 “주택·토지 관련 정보와 금융 정보, 세금 체납 현황 등을 연동해서 파악하는 시스템 구축은 언제든 가능하다. 다만 정치권 등에서 의지가 없을 뿐이다”고 지적했다.
■체감할 수 있는 대책 필요
정부와 지자체는 거의 매달 전세사기 대책을 발표하지만,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온도는 미지근할 따름이다. 피해자 박 모(39) 씨는 “부산시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에 갔으나 여러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단 이유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며 “집에 가는 길에 정신건강복지센터 연락처만 달랑 하나 전달받았다. 아무런 지원도 못해주겠다면서 ‘우리 관할에서 극단적인 선택만 하지 말아달라’는 건가 싶어 울화가 더 치밀었다”고 말했다.
부산참여연대 노익환 팀장은 “지원센터는 관계 부처에 업무를 떠넘기기 바쁘고, 시는 전수조사를 시행하지 않아 지역에 피해자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전세사기가 예상되는 건물은 물론 전세사기를 저지른 임대인의 건물도 버젓이 중개가 되고 있다”며 지자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전세사기는 지난해 ‘뜨거운 감자’였다가 최근엔 관심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하지만 전세사기의 불씨는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피해가 또다시 확산될 조짐도 보인다.
동의대 강정규 부동산대학원장은 “고금리 기조에 부동산 시장도 위축돼 있어 원리금 상환 부담을 버티지 못한 물건이 경매로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아파트와 달리 오피스텔이나 빌라 등은 수요도 적고 전셋값 상승 폭이 제한된 상황이라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가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증금을 마련하기 힘든 임대인을 위해 한시적으로 대출 규제를 풀어주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부동산서베이 이영래 대표는 “선의의 임대인이라도 역전세난으로 인해 일부 주택에서 보증금을 맞춰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체납이 연쇄적으로 터지다가 결국 잠적해 버리는 사고가 일어난다”며 “대출 규제를 일부 완화해 전세 보증금에 한해 자금을 융통할 수 있게 해 주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