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올림픽 40일 전 쓰러진 하형주를 다시 일으킨 한 마디는? [부산피디아 WHO(後)]
장면 하나. 1984년 올림픽 하프 헤비급에서 한국 유도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하형주. 사실 그는 원래 씨름 선수였습니다. 씨름은 물론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전국체전을 휩쓸기도 했던 이력의 소유자죠.
장면 둘. 310mm가 넘는 발 크기로 ‘왕발’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학생 때는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하지 못해 맨발로 운동장을 뛰기도 했습니다. 처음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갖게 된 날 하형주는 기쁜 마음에 신발을 품에 안고 자기도 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세계 정상(1984 LA 올림픽)에 오른 뒤 교수(동아대)를 거쳐 스포츠 행정가(국민체육진흥공단)로 변신하기까지, 여러분이 몰랐던 하형주의 숨겨진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소개합니다.
-유년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보다는 체격이 좀 컸고요. 체격과 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포츠를 접하는 횟수가 많았고요. 그러다 보니까 다양한 놀이 문화로서 하나씩 스포츠를 접했던 것 같습니다.
-유도 이전에 씨름 선수로 활약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가운데 아무래도 체격도 있고 하니까 운동하는 각 부에서 저를 많이 탐냈던 건 사실이고 유혹도 많았습니다. 근데 저는 어릴 때부터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돼서 장군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우연히 씨름을 접하게 됐습니다. 근데 씨름도 접했을 때 진주상고라는 걸출한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잘했던 고등학교인데 거기에서 스카우트 돼서 딱 6개월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6개월 동안 씨름도 참 재미있었고 실력도 왕성히 늘었고 나중에는 그 씨름의 계기가 유도 대표 선수 생활하는데 큰 받침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유도로 종목을 전향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이왕 운동할 거면 올림픽 종목 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앞에 여러 종목 중에서 유도라는 스포츠가 저한테 어릴 때부터 매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먼 친척 중에 한국 유도 챔피언이 있었거든요. 그분을 따라서 막연히 유도에 대한 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 운동할 때 올림픽 종목 유도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작정했습니다. 유도는 제가 있었던 진주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전학을 가서 마음에 드는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전학 가서 본격적으로 하게 됐고, 그 와중에 체육고등학교라는 특수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다 보니까 레슬링부에서도 전국체육대회에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이 들어와서 유도도 하면서 전국체전 때만 시합을 나갔었습니다. 레슬링 시합을 나갔는데 레슬링은 아시다시피 그레코로만형하고 자유형하고 두 종류 있잖아요. 두 종류 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가서 전국체전 금메달을 두 개 따고 3학년 때도 전국체전 금메달 두 개, 총 레슬링에 금메달 네 개를 딴 적이 있습니다. 레슬링을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유도를 했던 바탕이 돼 있고 그다음에 레슬링은 심판 룰을 알아야 하니까 경기 룰만 좀 배워서 나갔는데 운 좋게 제가 전국에 1등 하게 되고 그랬었습니다.
-동아대 시절 훈련법이 독특했다고 들었습니다.
본격적인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 시작했던 건 대학에 들어가면서인데요. 제가 유도 헤비급이었기 때문에 연습 파트너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늘 연습량이 부족했는데 우리 동아대학교 유도부의 전통은 헤비급들이 다 잘했습니다. 우리 동아대학교 뒤에 보면 구덕산이라고 아주 명산이 있습니다. 지금은 동아의료원으로 바뀌어 있고 그 뒷산에 보면 편백나무가 너무 많습니다. 편백나무는 아시다시피 쫙쫙 뻗어 있는데요. 그래서 동아대학교에서만 내려오는 연습 방법의 하나가 편백나무를 잡고 밭다리후리기라든지 기술 넣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걸 한 6개월 정도 하고 나면 일반 사람들은 그냥 넘기기가 좀 쉬웠지요. 그만큼 우리들만의 그 파트너가 부족했고 연습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걸로 연습량을 채웠습니다.
재미나는 뭐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저녁에 혼자 운동하고 있으니까, 절에서 스님이 "나무 부러진다"고 (제가) 우리 동아대학교 운동복을 입고 있으니까 동아대학교 총장한테 일러준 거예요. 그래서 총장님한테 불려 잡혀갔는데, "왜 나무를 못살게 굴었나" 하길래 "못살게 군 게 아니고 연습량이 부족해서 나무를 붙잡고 연습을 매일 밤 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 유도부 전통 훈련 방법입니다. 나무 안 다칩니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칭찬도 받고 고기 사 먹으라고 용돈도 받고 그랬었습니다.
-훈련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저는 운동하면서 힘들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즐거웠고, 매일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게 너무 빨리 밤이 지나서 다음날 오기를 바랄 정도로 유도에 푹 빠져 있었거든요.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유도가 제 인생이 있어서 하나의 종교로 자리 잡을 정도였으니까요. 매일 새로 바뀌어 나가는 내 모습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했지 힘든 거는 별로 못 느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 개막을 40여 일 앞두고 큰 부상을 당했는데, 당시 어떤 심정이었나요.
저희는 국제 경기를 앞두고는 일요일이나 현충일 때도 연습했거든요. 그날 내가 너무 많은 긴장도 했었고 또 연습량이 너무 많은 상황에서 선수를 던졌습니다. 선수가 앞에 한 바퀴만 돌아가야 하는데 한 바퀴 반이 돌아가면서 빨려 들어가면서 제 머리를 매트에 박혔습니다. 머리를 매트에 박히니까 허리 목 밑으로 마비 증세가 왔지요. 그래서 허리를 크게 다쳤던 기억이 있었던 게 그때 첫 좌절이라 할까요. 지난번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도 내가 못 나갔는데 다쳤으니까, ‘나하고 올림픽하고는 인연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그다음에 참 많이 억울해하면서도 울면서 병원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다쳤을 때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이제 우리 모든 선수촌 관계자가 와서 격려하고 했는데 저한테 격려해 주신 선수촌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언제든지 곧 일어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너는 대한민국 기수로 뽑혔다.” 였어요. 선수단 기수로 뽑혔다길래 제가 깜짝 놀라요. 기수는 참 영광스러운 자리거든요.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 상징적으로 금메달을 확실히 딸 수 있는 사람을 시키거든요. 그래서 내가 꼭 붙잡고 “저는 안 됩니다. 그 어려운 막중한 기수를 내가 어떻게 합니까. 지금 내 허리도 제대로 못 쓰는데” 하니까. “너는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신 분이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동메달 두 번이나 딴 김성집 총장이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많이 도와줬고 그분에 의해서 제가 금메달 딸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LA 현지에 가서 연습 파트너가 부족하다고 했는데, 제 선배 되시는 분이 딱한 사정을 알고 대신 받아줬습니다. 유도를 그분도 안 하다가 하니까 온 전신에 멍이 들 정도로 낙법을 쳐도 우리는 몸이 평상시에 많이 단련돼 있지만 그분은 유도 안 하다가 하시다 보니까 멍이 들 정도로 제 유도 파트너가 돼 주셨습니다. 또 그 아픔을 다 견뎌내고 내색 한 번 안 한 이 분을 위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하겠다는 각오가 좀 있었고요.
-8강전에서 세계 1위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 선수와 맞붙습니다. 어떻게 준비했나요.
미하라 선수가 세계 최강이었는데 제가 81년도부터 국제 대회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언젠가는 저 선수하고 한 번 붙을 거다. 그래서 저 선수를 면밀히 제가 검토를 하고 일기도 쓰고 저 사람의 장단점을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해왔는데 희한하게도 국제 대회에서 한 번도 붙어 본 적이 없는데 LA 올림픽 8강전에 붙었습니다. 8강전에 붙고 나니까 일본 선수하고 대진표가 짜져 있으니까, 대진표가 한 3~4일 전에 나오거든요. 한국에서는 “큰일났다. 하형주가 금메달 후보인데 대진 운이 안 좋다”고 그렇게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으로 ‘잘 됐다. 나는 언제든지 너랑 붙을 준비가 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고등학교 때 잠깐 배웠던 씨름 기술로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미하라 선수를 무너뜨린 그 기술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예, 똑같은 들배지기 기술이고 한번은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한번은 왼쪽으로 들어가고 똑같이 들어가는데 상대가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오른쪽 들어올 줄 알았는데 왼쪽 들어오고 왼쪽 들어올 줄 알았는데 오른쪽 들어가니까 자기로서는 감당을 하지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게 한판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세계 유도 연맹 회장이 미하라 선수 모교의 총장이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때 당시 화면을 보면 그 총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는 그런 장면도 보입니다.
그때 당시 세계 유도 연맹 회장도 일본 사람, 국제 심판장도 일본 사람, 대부분 심판도 일본 사람들한테 눈치 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 심판들도 그렇게 한판으로 크게 처박는 기술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 기술을 보고 심판도 당황해서 아마 절반을 준 거 같습니다. 그 절반 때문에 한 번 더 들 기회를 맞이한 나는 두 판의 통쾌한 승리를 거두면서 안 그래도 한일전에 숙명전 관계인데 그런 것 때문에 돌아와서 우리 한국 국민들한테 인상이 아주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강호 권터 노이로이터와의 4강전은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권터 노이로이터 선수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선수입니다. 모스크바 올림픽 1등 했고, 몬트리올 올림픽도 은메달 따고, 각종 국제 대회에서 늘 3등 안에 드는 선수입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제가 81년도부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만나면 큰 대회 만날 때마다 저랑 붙습니다. 저랑 붙어서 한 번도 제가 져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연습을 해보면, 우리 시합을 마치면 각국 나라들 합동 훈련 일주일 가거든요. 내가 이 선수를 어떻게 던졌을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강한 선수예요. 나보다 힘도 세고 빠르고요. 근데 시합만 했다 하면 내가 이기는 거예요.
그때도 사실은 미하라 선수하고 하면서 그 8강전에서 팔을 많이 다쳤었고 우두둑 소리 날 정도로 다쳤었고 부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올라갔을 때 힘이 너무 좋으니까 이 선수는 나한테 여러 번 져봤으니까, 힘으로 막 버팁니다. 키도 나보다 크니까 제가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가면 판정으로 지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무리해서라도 공격해서 점수를 따지 않으면 분위기가 내가 안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제가 무리하게 기술을 걸다가 되치기로 당했습니다. 이게 효과가 날아갔고 그다음에 앉아서 이 선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팔도 아프고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의료 시간을 갖다가 최고로 다 활용하면서 그 선수를 이길 수 있는 전략 방법을 생각했는데 마침 이제 그 선수가 이기고 있으니까 자기는 방어가 급급했습니다. 방어가 급급하다 보니까 내 기술에 자기가 말려서 38초 남겨놓고 저한테 더 큰 점수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선수하고 또 제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은 가장 큰 결승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승전을 앞두고 긴장되진 않았나요.
긴장 많이 했죠.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던지는 게 유도의 매력이에요. 왜냐면 지렛대의 원리라고 합니까?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의 빈 곳에 들어가서 큰 사람을 던지든지 안 그러면 상대의 힘을 이용해서 상대를 던지는 게 유도의 매력입니다. 내가 아무리 힘이 있다 해서 비슷한 체급인데 다 비슷할 건데 근데 그 선수는 조건이 나보다 키가 많이 작았습니다. 저런 선수들한테 업어치기나 이런 것들이 약한 게 우리 큰 선수들이 약점이에요. 근데 그거만 배제하면 되게 이길 수 있겠다.
그다음 그 선수도 우리나라 우리 동양 지역의 아시안 게임을 하듯이 팬암 대회를 하고 있습니다. 팬암 대회에서 늘 1등 하는 선수고 그래서 그런 선수한테 말리기 쉬운 기술을 정확하게 제가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다시 나도 그 사람 키에 맞춰서 자세를 낮춰서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조건이 내가 키가 크고 그때까지 국제 경기력도 내가 높았기 때문에 충분히 이긴다고 보고 시합에 임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이제 부상했는데, 이듬해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서는 일본의 스가이 히토시 선수에게 패배합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85년 또 열리는데 결승에 딱 올라가니까 스가이 선수가 결승에 올라온 거예요. 근데 일본 선수한테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만큼 일본인 킬러였는데 스가이를 딱 내보냈는데 딱 잡자마자 우리는 잡으면 바로 전율을 느낍니다. 이 시합에 이긴다 진다. 그다음에 까다롭다. 또는 30초 또는 1분에 한판 돌릴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많이 느끼는데 딱 잡고 아이고 큰일 났다 싶은 거예요. 나는 결승에 올라왔기 때문에 붙잡아 보기 전에는 또 금메달 따겠다는 자만심도 있었는데 잡자마자 이어 큰일났다는 생각이 결승을 7분인가 8분인가 했는데 8분 내내 큰일 났다. 그러나 한 번만 걸려주면 된다. 8분 경기하면 한 네 번 정도의 찬스가 오거든요. 그중에 한 번만 걸려라. 한 번만 걸려라 한판 돌린다. 결국은 세 번 걸렸는데, 세 번 다 스가이가 고양이처럼 몸이 엄청나게 부드러운 친구입니다. 근데 유도는 아시겠지만 앞으로 떨어지면 점수가 없습니다 등이 닿아야 점수가 나타납니다. 근데 앞으로만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집어던져도 고양이처럼 그래서 10초 정도 남았길래 이거 뭐 이판사판이에요.
지고 있으니까 뛰어 들어가서 한 번만 걸려도 1초도 안 가고 던질 수 있는 게 유도의 매력이거든요. 뛰어 들어가는데 아주 기본적으로 뒷당겨치기로 스가이한테 딱 말리면서 한판 돌아갔습니다. 참 수치스러운데 아찔했습니다. 근데 내 실력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처음 잡아 보는 상대였거든요. 근데 100명의 한 서너 명 있을 정도의 타입입니다. 저는 공격형이고 상대는 공격에 들어오면 그 틈을 보고 점수를 얻는 선수 스타일입니다.
-이듬해 아시안게임에서 스가이 선수와 다시 격돌해서 패배를 설욕하는데요. 비결이 궁금합니다.
힘든 고통의 시간이 그 1년이었습니다. 최고 힘들었던 시기. 반드시 1년 후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열리는데 일본 선수로 반드시 나올 거고 나도 한국 대표로 나갈 건데 붙을 수밖에 없어요. 근데 도저히 이길 기술이 없습니다. 그 선수한테 제가 갖고 있는 기술 가지고 그래서 제가 일본을 보내 달라고 그랬어요. 일본에 전지훈련 좀 보내 달라. 일본에 가면 그런 스타일을 가끔 만날 수 있으니까. 우리는 몸으로 체득해야지 머리로서 되는 게 아니거든 스포츠는 다 몸으로 체득해야 하거든요. 몸으로 익혀야 하고 세포 하나하나의 기억을 남겨서 반사적으로 써먹어야 할 반복 훈련 중에 연속인데 대한민국에서 기술 노출한다고 안 보내 줍니다. 이미 졌는데 기술 노출한다고 안 보내주고 그게 지방 대학으로서의 서러움이었고요. 그래서 일본에 있는 코치를 초빙합니다. 스가이라는 사람하고 연습을 많이 해본 사람이에요. 코치가 하는 말이 "하형주 왜 스가이한테 지냐?" 왜냐하면 스가이가 일본에서 같은 체급에서 전국 3등 정도 하는 선수예요. 근데 하형주를 던지기 위해서 스가이를 내보낸 거죠. 그래서 그게 효과를 봐서 하형주 누르고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땄죠.
또 아시안 게임에서 붙기 때문에 일본 지도자 코치가 와서 연습하는데, 일본말로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센데 어떻게 스가이한테 졌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한 3개월 태릉선수촌에 같이 있다가 돌아갔는데, 그 선생이 나한테 3개월 동안 해 준 조언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용기, 너 충분히 이긴다. 지면 내 손을 지진다. 분명히 이번에 이긴다. 그게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됐고요.
마침내 시간이 다가와서 아시안 게임을 서울에서 하면서 마음고생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딱 시합을 붙는데 역시 센 거예요. 역시 센데 한 번만 걸려주면 되는데 안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의 생각을 총정리해서 지난번에 1년 전에 딱 10초 남겨 놓고 제가 한판 떨어진 게 있습니다. 그 기술 그 모션 그 느낌 그 힘의 강도에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딱 들어가니까 그대로 기억하고 있던 기술이 스가이로부터 들어옵니다. 또 모두걸기라는 기술로 쳐서 그것도 공중에서 또 떨어지지, 앞으로 처박히려고 하는 거 갖다가 뒤에 우리 미끄러운 핸들 빙판에 한 번씩 쏠리면 놀라는 거 있잖아요. 그 핸들 활짝 집어넣어야 등이 닿으니까, 제가 절반을 얻었습니다. 절반은 큰 득점이거든요. 그래서 시간을 보니까 아직도 2분 30초 남았습니다. 근데 이번 30초 아무 걱정이 안 되는 게 내가 공격만 안 하면 그 선수는 나를 던질 기술이 없어요. 내가 공격하면 겉으로 보고 들어오는 기술이기 때문에 손싸움만 이렇게 하다가 2분 딱 보내놓고 1년 동안 마음고생 많았고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그만큼 어려운 기간을 보냈던 게 없었고 금메달 따고 숙소에 와서 ‘내가 이거 하나 따려고 내가 이렇게 마음고생이 심했냐’ 하면서 내가 운 적이 있습니다.
-패배와 부상 등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훈련량이 많았고요. 우리나라도 또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 있었고 그래서 포기라는 단어는 감히 있을 수 없고요. 그런 것들이 나를 지탱해 주고, 그러한 것들이 모여서 내게 용기를 줬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그 힘 원천이 그거예요.
두 번째로는 이제 순간마다 어려운 것들이 밀려옵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때마다 항상 초심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인지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돌아와서 다시 그 원인을 스캔을 떠냅니다. 그때부터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본기가 있는 것이 나한테 극복할 수 있는 원천의 힘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제 자신의 싸움이었고 처절한 고독의 연속이었고 이거는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나이가 아니다. 남자가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나를 늘 바로 서게 했던 힘이었습니다.
-유도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유도라든지 태권도 무도 쪽의 운동은 종교입니다. 자기와 신앙이고 종교고 그다음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싸움이지 남이 있다고 해서 남하고 꼭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자기를 얼마나 추스르느냐 낮추느냐. 그래서 겸손을 배우느냐. 그리고 다가오는 순간마다 그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느냐. 이런 것도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특히 내가 전공했던 유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아니겠느냐.
-선수 은퇴 후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갖고 있었던 그 경험들 선수촌 생활하고 시합을 앞두면 그 전날 잠 못 자는 거는 기본이고 그 며칠 전부터 불안, 초조, 긴장의 연속이고 또는 그때마다 또 새롭게 난 할 수 있어 훈련량이 상대보다 많았다. 또는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는 확신 신념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왔다 갔다 하는데, 그것을 컨트롤하는 게 스포츠 심리학입니다. 불안, 긴장, 초조함에 사로잡혀있는 선수들 때문에 메달 색깔이 달라지거든요.
근데 그러한 시합 출전에 임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불안, 초조, 긴장보다는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확신, 용기, 자신감 이런 걸로 충만했을 때는 결과는 뻔한 겁니다. 자신감이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찬 선수가 이길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것도 역시 트레이닝이 돼야 해요. 그게 스포츠 심리학입니다. 제가 후배들한테 저보다 더 많고 좋은 색깔의 메달을 따게 해야 한다는 소명감 그게 좀 나아가면 좀 커진다면 그 국가이 나한테 꽉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팬들이 ‘왕발’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 발 크기에 관한 사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제 발 크기가 310mm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맞는 게 없었어요. 학교 앞에서 맨발로 다니고 공 찰 때도 맨발로 차다 보니까 발가락 10개가 전부 다 멍이 들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신발에 대한 애환이 많습니다. 내 발에 맞는 신발이 나한테 왔을 때 가장 기뻤던 것 같아요.
저를 이 자리까지 있게 한 정신적 지주가 우리 큰누나였습니다. 큰누나가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부산 국제시장에서 미군들이 신는 신발을 운동화를 두 켤레나 사 온 거예요. 그 두 켤레 신발을 들고 발 크기보다 오히려 조금 큰 것도 있고 딱 맞는 것도 신어 보니까 그냥 한 3년 만에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봤습니다. 너무너무 좋았는지 고맙다는 걸 물론이고 그걸 안고 잤어요. 우리 큰 누님이 '그리 좋나?' 이러더라고요. '너무 좋다 이거' 이러니까 우리 큰 누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 그거 꼭 기억해라 오늘! 이 기쁨을 기억해라. 그리고 나중에 커서 혹시 인터뷰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오늘이 기쁨을 인터뷰해라” 그때 당시엔 상상도 못 했죠.
-한때 한국은 물론 세계 유도계를 주름잡았던 부산 유도가 침체에 빠진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요.
참 안타까운 질문을 해주셨는데 지금 전체적인 한국 스포츠 현상으로 봐도 될 거고요. 최근에 항저우 아시안 게임이라든지 도쿄 올림픽이라든지 성적이 매우 안 좋습니다. 워낙 힘든 운동이었기 때문에 인구 절벽이라서 또 그런 상황도 생길 수 있는데 특히 유도가 부산의 동아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메카였습니다. 그다음에 동아대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또 부산 체육고등학교라는 명문고등학교도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자꾸 선수가 줄어든다는 거 그다음에 다른 스포츠가 발전하면서 가치관이 좀 달라졌다는 거 그다음에 물질 만능주의로 자꾸 빠진다는 거 이런 것들이 혼합된 문제점들이 지금 우리 한국 전체 스포츠가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고요.
부산 지역의 유도하시는 분들의 부분도 그런 문제와 같이 함께하는 거 아닌지 그래서 조금 안타깝습니다. 용인대학교가 너무 독점하다 보니까 지방대학에서는 어렵게 하고 있고 특히 사립대학에서는 IMF 이후에 등록금이 동결돼서 거의 제일 먼저 운동부부터 축소하고 폐지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 여파가 크고 특히 동아대학교 유도가 폐지될 정도라면 다른 대학에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크겠지요. 한쪽에 독주 되는 시절이 되다 보니까 지방대학에서는 국제 경기도 한 번 못 나가는데, 국제대회에 못 나갈 정도라면 이런 부가 뭐가 필요하냐고 학교에서도 폐지를 많이 시키고. 지금 전국적으로 지방 대학, 한국 체육이 죽었다고 하죠.
-지역 유도를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안을 만들 것인가 대학 총장 위원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데서도 지금 대학 체육부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그 돈 역시 서울 올림픽 기념 체육진흥공단에서 간접적으로 보조를 하고 있고 그다음에 대학생도 중요하지만, 초, 중, 고등학교 밑의 풀뿌리부터 운동부가 활성화돼야 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좀 열악해서 앞으로도 그런 부분은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제가 정책을 만들고 준비하고 있고 아주 큰 관심이 있습니다.
김동우 기자 friend@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