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일상 밀착 스릴러 탄생…‘그녀가 죽었다’ [경건한 주말]
극장에 불어온 훈풍이 반갑습니다. ‘파묘’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천만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배우 마동석 주연의 영화 ‘범죄도시4’가 개봉 22일 만인 지난 15일 1000만 관객을 넘어섰습니다.
이날은 변요한-신혜선 주연의 기대작 ‘그녀가 죽었다’가 개봉한 날이기도 합니다. 15일 극장에서 만난 미스터리 스릴러 ‘그녀가 죽었다’는 30대 신예 감독의 야심 찬 데뷔작답게 신선하고 독특한 재미를 선보였습니다.
부동산 카페에서 유명한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에게는 변태적인 악취미가 있습니다. 고객이 맡긴 열쇠로 집에 몰래 들어가 구석구석을 훔쳐보는 겁니다. 심지어 집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 하나를 촬영해 수집하는 괴팍한 강박증까지 있습니다.
그런 정태의 레이더망에 이웃 주민 한소라(신혜선)가 포착됩니다.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먹으면서 SNS에는 채식 식단 사진을 올리는 소라의 이중적인 모습을 훔쳐본 게 계기였습니다. 알고 보니 소라는 SNS 인플루언서. 흥미가 생긴 정태는 소라를 스토킹하기 시작합니다.
늘 소라를 관찰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정태는 마침내 소라의 집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날 정태는 피투성이가 된 채 소파에 널브러진 소라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경찰에 신고하자니 함부로 남의 집에 들락거리던 사실이 드러날 수 있는 데다,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 딜레마에 빠진 정태에게 미스터리한 일들이 펼쳐지면서 영화는 스릴러물로 변모합니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전반부입니다. 정태의 변태적 습관을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보게끔 하는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로 자신의 일탈을 조곤조곤 설명하며 합리화하는 정태의 내레이션은 그를 더욱 소름끼치는 인물로 보이게 합니다. 남을 몰래 관찰하다가 살인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샤이아 러버프 주연의 ‘디스터비아’(2007) 초반부를 볼 때와 같은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그렇게 늘 남을 지켜보던 정태가 어느 순간 자신도 관찰의 대상이 됐음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잡힐 때부터 관객이 느끼는 긴장감도 배가됩니다. 쉽사리 전개를 예측할 수 없어 긴박감이 있고 신선합니다.
SNS를 주요 소재로 활용한 것은 이 영화만의 독특한 관람 포인트입니다. 정태는 SNS와 인터넷 방송 영상을 통해 소라를 살해한 진범을 추적하는데, 그 과정이 영화 ‘서치’ 시리즈를 연상시킵니다. 한편으로는 친숙한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 범행에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는 경각심이 들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영화는 이 밖에도 SNS와 인터넷 방송의 폐해를 꼬집어 공감을 자아냅니다. 자기 연민과 과시에 빠져 위선적인 삶을 사는 소라도, SNS로 남을 관음하는 데 몰두하는 정태도 SNS의 병폐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인터넷 방송을 재현한 장면이나, 큰 인기를 끌던 인플루언서가 소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린 대목이 쓴웃음을 짓게 합니다. 유튜버끼리 다투다 칼부림까지 나는 세상이니, 일견 극단적인 것 같은 영화 속 장면이나 설정도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개봉 시기를 늦춘 것이 오히려 묘수가 된 모양새입니다.
정태가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는 동시에 미지의 존재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중반부 역시 흥미롭습니다. 낮은 조도를 기반으로 공포심을 유발하는 연출이 제법 긴장감을 줍니다. 어두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심한 촬영과 편집은 신예 감독의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주요 단서나 핵심 요소를 카메라로 일일이 비춰 주고 강조하는 촌스러운 연출이 아닌 암시 위주의 촬영을 통해 관객 스스로 핵심을 깨닫게 합니다.
배역도 훌륭합니다. 정태는 기본적으로 관객에게 불쾌함을 안기는 엄연한 범죄자인데, 자기 스스로는 “나쁜 짓은 안 한다”며 나름의 선을 넘지 않는다고 믿는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경쾌하고 유쾌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녀가 죽었다’가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와는 달라 보이게 하는 차별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정태는 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캐릭터인데, 이 극단적이고 이중적인 인물을 완벽히 구현해 낸 변요한의 연기가 대단합니다. 신혜선도 의문스러울 정도로 극단적이며 충동적인 소라라는 캐릭터에게 설득력을 부여할 정도로 열연을 펼쳤습니다.
조연 캐스팅 역시 ‘찰떡’이었습니다. 특히 배우 이엘은 형사인 영주 캐릭터로 카리스마를 선보였는데, 메인 포스터에서 주연들과 나란히 자리 잡은 것에 비해선 비중이 낮아 존재감이 약간 떨어졌습니다.
후반부 전개는 상대적으로 아쉬웠습니다. 시나리오에 억지로 맞춘 듯한 극 중 인물들의 선택은 개연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또 중요할 때마다 무능하게 그려진 경찰의 모습이 작위적입니다. 그러나 배우들의 호연 덕에 전체적인 완성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범죄를 미화하지 않는 메시지도 잊지 않고 임팩트 있게 전달했습니다.
연출을 맡은 김세휘 감독은 갓 데뷔한 신예입니다. 고교 시절 연극부에서 쓴 시나리오로 부산청소년연극제에서 대상을 받는 등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여러 영화에서 스태프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다가 ‘그녀가 죽었다’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김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녀가 죽었다’에 대해 “남들은 모르는 걸 나만 알고 싶다는 나쁜 열망과 타인의 관심을 원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그리고자 했다”면서 “상업 영화를 추구하는 감독으로서 첫째도 재미, 둘째도 재미라고 늘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라는 판타지 사극 시리즈물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