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커 향한 '기습 숭배' [키워드로 트렌드 읽기]
최근 서울 청계천 인근에 '페이커 신전'이라는 특별한 체험관이 마련됐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 e스포츠 '전설의 전당(Hall of Legends)' 초대 헌액자가 된 '페이커' 이상혁 선수(이하 '페이커')를 축하하기 위해 게임 제작사에서 직접 그의 행적과 업적을 주제로 꾸민 이벤트다. 주로 스포츠, 예술 등 특정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나 업적, 명성을 쌓은 사람·단체를 대상으로 하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을 e스포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게임과 e스포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 헌액 대상인만큼 페이커의 선정은 예견된 일이었다. 2013년 프로게이머로 데뷔한 이래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통산 4회 우승과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포함해 LoL e스포츠 역사상 가장 많은 국제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선수다. 제작사 라이엇게임즈도 "페이커는 e스포츠가 성장하는 원동력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최고의 성과를 내고 있다"며 "인간 이상혁 또한 팬들이 추앙할 만한 인성을 보여주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이를 증명하듯 서울 도심 한복판에 '살아있는 전설' 페이커를 기념하는 '신전'이 세워졌다는 소식에 많은 e스포츠 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페이커 선수를 향한 기습 숭배를 함께해 주세요!"라고 적힌 표지판 뒤로 관람객들이 '직접 숭배 챌린지'에 나선 장면이 큰 화제였다. SNS에는 눈을 감고 있는 페이커의 초대형 사진을 마주한 채 무릎을 꿇고 양손을 치켜 들거나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리는 등 각자만의 경건한 방식으로 모두가 '대상혁(大+이상혁)'이라고 외치는 모습들이 전해졌다.
이렇게 '숭배'라는 단어까지 붙은 데는 페이커를 향한 팬심을 넘어 신앙심이 생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의 과장섞인 유머가 있는데, 흡사 과거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를 진짜 신으로 섬긴다며 축구팬들이 탄생시킨 '마라도나교'와 유사한 면이 있다. 당사자인 페이커는 "신전이라는 단어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가볼 생각"이라며 "많은 분이 거기서 '대상혁 예배'를 하시던데, 저도 예배 한 번 드리고 오겠다"고 겸손 섞인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
다만 특이한 점은 당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주제와 동떨어진 댓글로 특정 대상을 향한 찬양을 뜬금없이 갑자기 남발하던 행위를 '기습 숭배'라 불렀고, 다른 이용자들은 이를 비꼬거나 조롱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가을 페이커의 대활약과 맞물려 소속팀 T1이 롤드컵 정상에 오른 뒤 해석이 달라졌다. '기습'이라는 말이 조롱처럼 들리지 않도록 실력으로 증명한 셈이다. 오히려 이를 비틀어 "우리는 항상 숭배 중이었고, 당신이 기습 목격했을 뿐이다"라는 반응과 함께 정말로 '상시 숭배'에 가까운 '밈(유행어)'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성규환 부산닷컴 기자 basti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