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경, 현대시조의 ‘K문학’ 가능성에 도전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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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도 꽃 피네> 출간으로
‘시조는 고루하다’ 편견 깨뜨려
아마존에 영문 시조집 등록도


정희경 시조시인이 해운대 부산시립미술관 앞에서 오래된 나무를 올려다 보고 있다. 정희경 시조시인이 해운대 부산시립미술관 앞에서 오래된 나무를 올려다 보고 있다.

최근 부산의 시조시인이 쓴 한 권의 시조집을 통해 현대시조의 K문학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아무리 디밀어도/벽면은 딱딱하다/스펙에도 고학력에도/또 튕기는 나사못/누군가 힘껏 돌린다/세상에 박히는 중.’ 매우 간결한 ‘드라이버’라는 제목의 시조다. 서정적이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요즘 시조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할 때쯤, 현대시조는 가속페달을 더 세게 밟는다. ‘스피드에 별점 하나/단맛에 별점 다섯//별로 주는 점수에/가게마다 별천지다//밤하늘 사라진 별들/도시를 휙휙 달린다.’ 하늘의 별을 ‘별점’으로 연결시킨 감각이 신선하다. 쉽게 이해가 되면서도 곰곰이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다.

정희경 시조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작가)는 시조에 대한 오래된 편견을 깨뜨리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하지’ 같은 토속적이고 정겨운 맛이 느껴지는 시조도 있다. ‘밭에서 따온 지가 한 시간도 안 됐심더/투박한 1톤 트럭 흥정이 한창이다/노랗게 물들어버린 운촌시장 길거리/장마도 올라카고 보관도 안되고예/긴 해에 얼굴마저 누렇게 익어가는/속까지 타들어 가서 단내 풀풀 참외들.’ 농익은 참외 향이 지면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살가운 경상도 지역어로 시조의 정형성을 지켜 생긴 리듬 덕분이다. ‘동네시장’이라는 공통 부제가 붙은 ‘용천각’, ‘생선가게’, ‘갈매기 주점’ 등의 연작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정 시조시인은 고교 문예부 시절에 시조를 시작했다. 2008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과 2010년 <서정과현실> 신인작품상 당선으로 늦깎이 등단했으니 너무 오래 걸렸다. 대신 그만큼 큰 기대를 받고 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그에 대해 “서정시의 한 양식인 현대시조를 통해 기억의 과정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보여 주는 우리 시조시단의 장인(匠人)이다. 한국 시조의 현대성 제고에 크게 기여하는 큰 시인으로 훤칠하게 나아가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했다.


정희경 시조시인이 네 번째 시조집 을 발간했다. 정희경 시조시인이 네 번째 시조집 을 발간했다.

이 말이 단순한 덕담에 그치지 않는 이유도 있다. 정 시조시인은 지난해 5월 부산에서 활동하는 이광 시조시인과 함께 세계 최대 온라인 종합 쇼핑몰 아마존에 ‘K-poem Sijo: the Root of the Korean Wave’라는 전자책으로 영문 시조집을 올렸다. 그의 작품 ‘The Old Electric Fan(낡은 선풍기)’ ‘Mayflies(하루살이)’ ‘A Nap(낮잠)’ 등 30편이 번역되어 실렸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인에게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 2004년에 설립된 세종문화회의 루시 박 교수 등이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정 시조시인은 <어린이시조나라>의 편집주간도 맡고 있다. 이 잡지의 지난해 호에는 제25회 사이버시조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 부산 금양초등 박준하 군의 ‘별 가족’ 시조 작품을 비롯해, 해외시조 부문에 중국 동포 어린이 시조까지 소개되었다. 또한 미국에서 세종문화회 주최로 열린 제2회 국제시조경연대회에 참가한 세계 29개국 344편의 영어 시조 가운데 수상작품이 나와 있다. 세종문화회는 웹사이트(sejongculturalsociety.org)를 통해 올해 국제시조경연대회 접수를 9월 30일까지 받고 있다.

정 시조시인은 “시조 번역 사업이 몇 년 새 많이 늘었다. 저를 포함한 부산 시조시인 4명의 시조를 일본어로 번역 출간하는 작업도 막바지에 있다.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처럼 시조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 한국의 노벨문학상은 시조에서 나올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미나리도 꽃 피네> 표지. <미나리도 꽃 피네>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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