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남겨진’ 피해자들, 야속한 국가에 또 운다
피해자 조사 일정 몰라 접수 못 해
확인된 179명 등 1800여 명 추산
부산시 추가 조사 필요 요청도 허사
정부 측 “여력 없어 불가능” 답변만
구제 방법 없어 스스로 입증 나서야
피해 조사 연장·상설기구화 여론
지난 16일 <부산일보> 취재진이 만난 형제복지원 조사 미포함 피해자들은 직접 수용 기록을 확보하거나, 진화위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피해자들로부터 인우보증을 받아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생, 이명진, 배병일 씨. 정대현 기자 jhyun@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강제 노동과 폭력 등 인권 유린을 당하고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로부터 아무런 조사를 받지 못한 피해자가 최소 180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이 조사에서 배제된 이유는 단 하나, 2년간의 신청기간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조사조차 받지 못한 피해자들
20일 부산시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기준 179명의 피해자가 형제복지원 피해 설문지를 작성했지만, 2기 진화위 조사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2기 진화위는 2020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을 받았는데 이 기간을 지나 나타난 피해자들은 조사를 받지 못했다. 부산시는 앞서 751명의 형제복지원 피해자 설문을 접수하고,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후 찾아온 179명의 늦은 피해자에 대해선 설문을 접수하고 보관해 둘 뿐이다.
부산시는 진화위 측에 공문을 보내거나 시도실무협의회를 통해 형제복지원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요청했지만, 조사 여력이 없어 추가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부산시 관계자는 “혹여 국가 차원의 조사가 재개되는 경우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피해자가 찾아오면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안내하고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은 조사 미포함 피해자 규모가 최대 18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는 “1987년 형제복지원 폐쇄 때로 좁혀 보더라도 2000~3000명이 있었다”며 “당시 고령자 500여 명을 제외하고, 진화위 조사를 신청한 750여 명을 제외하면 여전히 18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조사 신청을 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진화위 조사에서 배제된 피해자 대부분은 형제복지원의 참상에 대한 보도가 나온 것은 알아도 국가 차원의 조사가 진행되고 그 결과가 피해 회복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영생(66) 씨는 “그동안 형제복지원 원생들이 가혹하게 생활했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정도라고 생각했다”며 “국가가 나서서 조사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이명진(67) 씨는 부산시 형제복지원피해자지원센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당시 자료도 찾았지만, 그 어디서도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 씨는 “지난해 12월 국가배상 소송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사람들이 한번 알아보라고 이야기해서 찾아보게 됐다”며 “형제복지원 생활하며 신발공장을 다닌 자료가 있지만, 조사는 못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피해자는 진화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피해자들의 인우보증을 받기도 했다. 배병일(64) 씨는 함께 수용됐던,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피해자 3명의 인우보증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자료가 향후 피해자 인정에 얼마나 효력을 가질지는 미지수다. 배 씨는 “시가 갖고 있는 자료에 내 이름이 없다고 해서 인우보증을 받았는데, 아무튼 진화위 추가 조사는 안 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구제받을 길 없는 고통
문제는 조사 미포함 피해자들은 피해를 구제받을 기회가 사실상 사라진다는 점이다. 진화위 진상규명 결정은 피해자로 공식 인정받는 첫 단계인데, 현재 활동 중인 2기 진화위 활동이 내년이면 종료되기 때문이다.
진화위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2005년에 처음 출범한 독립 조사기관이다.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 시 일어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등에 대해 조사하고 진실을 밝힌다. 2020년에 출범한 2기 진화위는 조사 기간이 1년 연장되어 2025년 5월 27일 활동을 종료한다.
1기 진화위 해체 이후 2기 진화위 출범까지 걸린 시간은 10년. 조사 미포함 피해자들은 기약 없는 진화위 출범을 기다리거나, 개별적으로 피해 입증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진화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지 못하면 부산시의 의료·생활 안정 지원에서도 배제된다.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등 피해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서는 진화위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부산시 거주 피해자로 의료·생활 안정 지원 대상을 정하고 있다. 한 대표는 “직권조사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을 법적으로 구제할 방법은 없는 상황이다”며 “국가 폭력 피해자 조사 상설기구가 필요하다고 그동안 계속해서 주장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진화위 조사기간 연장 또는 상설기구화 취지를 담은 개정안이 4건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만료 폐기됐다. 이달 초 더불어민주당 복기왕 의원 대표 발의로 △조사 기간 3년→5년 연장 △진실화해재단 설치 명문화 등 내용을 담은 개정안이 발의됐다.
진화위 관계자는 “안타깝지만 조사 인력과 기간 한계로 추가 조사가 어렵다”며 “법 개정을 통한 진화위 조사 기간 연장, 상설기구화 등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가 폭력 피해자가 피해 입증 책임에 놓이는 불합리한 상황을 해결하려면 조사기구의 상설화나 조사 기간의 획기적인 연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동아대 남찬섭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피해자 중에서는 저소득층이나 정보 접근이 어려운 이들이 많다"며 "진화위를 상설기구로 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게 어렵다면 조사 기간을 10년 정도로 두고 사실관계를 규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