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한국인 '히바쿠샤'
히바쿠샤. 피폭자(被爆者)의 일본어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피해자들을 지칭한다. 인류 최초의 사건이라 국제적으로 피폭 피해자는 일본어 발음 ‘hibakusha’가 보통 명사처럼 쓰인다. 방사능에 노출된 이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마에 시달렸고 자녀에까지 대물림됐다.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생존자에 ‘건강 수첩’을 발급하고 의료비와 수당을 지급했다. 하지만 징용으로 끌려갔다 피폭당한 채 귀국한 한국인들은 일본은 물론 한국 정부로부터도 외면당했다.
한국인 피폭자가 겪은 고통은 1986년 부산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무대에 올린 연극 ‘히바쿠샤’에 생생히 담겨 있다.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던 여성이 일본에 밀항한 뒤 피폭자 인정을 요구하는 각고의 과정을 그렸다. 이 기구한 이야기는 1989년 KBS 광복절 특집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추산에 따르면 한국인 피폭자는 10만 명이다. 생존자 5만 명 중 4만 3000명이 해방 후 귀국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보상이 끝났다며 한국인에게는 ‘건강 수첩’을 발급하지도 않고 의료비와 수당도 지급하지 않았다. 한국인 피해자와 일본 시민단체가 1990년대 들어 제기한 여러 소송에서 승소한 끝에 국외 피폭자도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피폭 이후 60년이 훌쩍 넘었고, 피폭자 상당수가 사망한 뒤였다.
한국에선 뒤늦은 2016년 ‘원폭피해자지원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2세를 배제해 논란을 불렀다. 피폭 2세인 고 김형률 씨가 대를 이은 고통의 실상을 알리다 2005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올해 노벨평화상에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선정됐다.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인정받았다. 이 단체는 내달 10일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정원술(81)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과 피폭 2세인 이태재(65)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장을 초청했다. 평생을 바쳐 피폭의 참상을 증언하고 반핵 평화 활동을 벌인 데 대한 연대 의식이 읽힌다. 또 피폭자 74만 명 중 한국인이 13% 이상인 점을 감안할 때 시상식 동반은 수상의 의미를 뜻깊게 한다.
목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 핵무기 언급이 공공연하고, 북핵 위협은 날로 고조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벨평화상 시상대에 오를 한일 피폭자의 심경은 착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날 시상식이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큰 울림이 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길 기원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