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그날 밤 우리는 퀴어였다
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5분, 윤석열 대통령의 입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이후 햇수로 45년만의 일이었다. 국회로 계엄군을 태운 헬기가 날아들었고, 국회 정문은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다. 국회 담을 넘은 국회의원들이 신속히 본회의장으로 모였고, 12월 4일 오전 1시 3분, 재석 190명 의원들 중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계엄 포고 2시간 38분 만의 일이었다.
박안수 계엄사령관의 명의로 선포된 계엄포고령은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포고령 위반시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혹자는 진짜 간첩이 아니면 위 포고령을 굳이 두려워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으로 문을 연 한국현대사가 말해주듯, 비상계엄 치하에서 소위 ‘반국가세력’의 기준은 하염없이 위아래로 요동친다. 내가 무사통과할 허들의 높이가 어딘지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최대한 낮게 몸을 웅크린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기준을 통해 사람들을 납작 엎드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이 원하는 일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 해제 요구안이 통과되던 그 짧은 2시간 38분 동안 많은 단위들이 성명과 논평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유독 회원 및 구성원들의 정서적 안위를 걱정한 3개의 단체를 알고 있다. 그 중 두 곳은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였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는 아무쪼록 동요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뉴스에 귀기울일 것과, 비상계엄으로 마음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각자 연락의 끈을 놓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회의 낙인으로 인하여 평소 구성원들의 높은 자살률과 정신건강 악화 문제에 부딪치는 운동단체의 행보였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계엄포고령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일순간 일상이 날아간 느낌과 유서 깊은 불안에 떨었다. 비상계엄 치하의 삶이란 그러하다. 혹여 계엄군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검열해보는 것, 낮게 엎드린 상태로 누군가에 의해 마음이 함부로 헤집히는 것, 알 수도 없는 남의 기준을 이미 존재하는 무기물의 돌과 거기에 쓰인 십계명인 양 기어코 내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2시간 38분의 시간 동안 구성원들의 마음을 달랜 3개 단체 중 마지막 한 곳은, 오전 0시 18분 “부디 너무 큰 불안을 가지지 말 것”을 강조한 전남대 총학생회였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계엄군이 캠퍼스 안 학생들을 끌어내 예비검속한 바로 그곳에서의 일이었다. 퀴어는 비단 성소수자뿐 아니라 자연을 참칭하는 밑도끝도 없는 기준에 스스로를 늘 검열해야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날 밤 2시간 38분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몸으로 수상한 공포에 떨던 우리는 모두 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