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꽃이 아니고, 파도는 파도가 아니야”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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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화랑 연말까지 김은주 개인전
종이와 연필로만 작업하는 작가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는 작품
다양한 색 드로잉 화첩도 매력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작업실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김은주 작가. 맥화랑 제공 작업실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김은주 작가. 맥화랑 제공

30여 년 경력의 김은주 작가는 오직 종이와 연필 2가지 재료만으로 험난한 미술판, 미술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달라 보이고 싶고 돋보이고 싶은 것이 이 바닥의 생리지만, 김 작가는 묵묵히 검은색만 나오는 연필로 어느새 ‘미술관급’ 작가로 성장했다. 연필 하나로 수십 가지의 검은색을 만들어냈고, 수십m에 이르는 대작까지 선보였다. 치열한 작업 태도로 연필의 한계를 넘고 심지어 작가의 한계까지 넘었다는 말도 듣는다. 그래서 종종 지역 후배 작가에게 “존경하는 선배”라는 말을 듣는다. 물론 김 작가는 “겨우 50대 후반인데 그런 말을 듣는 게 민망하다. 좀 더 오래오래 작업을 하고 난 후 나중에 이야기해 달라”며 손사레 친다.

부산 해운대구 맥화랑에서 ‘그려보다’라는 제목으로 김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마침, 전시장에서 방정아, 감민경 작가 등 요즘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유명 작가조차 김 작가의 신작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전시 제목이자 작가의 작품 이름이기도 한 ‘그려보다’는 연필 하나만 가지고 종이 위에 선과 선을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쌓은 작가의 인생을 단적으로 느끼게 한다. 김 작가는 작은 연필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선을 긋고 연필 층을 쌓아 간다. 노동집약적이고 수행 같은 이 작업은 작가 내면 깊은 곳에서 태동한 생명력이자 에너지의 발현이다.

“내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시시포스와 같은 것이다. 시시포스는 일어나 돌을 굴려 올리고 저녁이면 다시 굴러 떨어져 원점이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돌을 굴려 올린다. 젊은 시절엔 조금만 더 하면 굉장히 유명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주변에서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톱으로 갈 수 없다 하더라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 그림을 계속 그린겠다고 생각하고 묵묵히 작업한다.”

수행 같은 이 작업을 어떻게 버텼느냐 물으니 현자 같은 답을 내놓는다. “요즘 사람들은 그림에서 형태와 모습을 찾는데 제 그림의 꽃은 꽃이 아니고 파도는 파도가 아니다. 그건 나 자신일 뿐이다.”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김은주 ‘그려보다’. 맥화랑 제공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몇 미터에 이르는 대작 그림도 연필 하나만으로 완성한다. 맥화랑 제공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몇 미터에 이르는 대작 그림도 연필 하나만으로 완성한다. 맥화랑 제공

작업실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김은주 작가. 맥화랑 제공 작업실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김은주 작가. 맥화랑 제공

연필 하나만으로 작업하는 김은주 작가 작업실에서 쉽게 보이는 몽당연필들. 맥화랑 제공 연필 하나만으로 작업하는 김은주 작가 작업실에서 쉽게 보이는 몽당연필들. 맥화랑 제공

실제로 김 작가는 구상 단계나 밑 스케치가 없다. 정말 무엇에 홀린 듯, 빠져들어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그림을 마친다. 몇 미터에 이르는 큰 작품조차 다 끝난 후에야 “내가 이렇게 미친 짓을 했구나”라고 알게 된다고 한다. 그림이 바로 김은주 그 자신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인 것 같다. 그리는 행위가 좋아서 시작했고 30년이 넘도록 선을 긋는 행위를 이어가며 이 세상의 모든 형태와 관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본래 모습 안에서 평온하게 머물며 본질을 담아내고 있다.

부산 토박이인 김 작가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부산이 있고 부산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시끄럽지만 따뜻하고 에너지가 강하다. 이건 부산 미술의 매력이자 힘이다.

2000년대 초반 무작정 포트폴리오 하나만 들고 서울 갤러리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림에 반한 갤러리 대표가 무료로 전시를 할 수 있는 갤러리를 연결해 주었다. 당시 전시를 본 일본인이 김 작가에게 연필을 한가득 사 주고 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품 속에 담긴 치열함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 같다.

3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선 파도와 꽃 작품을 비롯해 작가의 드로잉 화첩도 여러 권 볼 수 있다. 오일파스텔로 그린 인물들은 흑백 작업과 다르게 다양한 색이 들어갔다. 작은 인물 드로잉이지만, 김 작가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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