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규제 예외 업고 '그린워싱' 검증 없이 무분별한 투자 [33조 녹색채권 어디에]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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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채권 흥행 숨은 이유

현대캐피탈 2000억 발행 계획
6000억 투자 몰려 85% 증액
부산은행·LG에너지솔루션 등
당초 발행액보다 수요 3배 이상
과수요에 그린워싱 방치 논란
유럽선 규제 강화해 신뢰 유지

국내 최초 상업용 해상풍력발전 단지인 제주시 한경면 탐라해상풍력발전 전경. 녹색채권은 재생에너지 같은 지속가능한 미래에 투자한다는 것을 앞세워 발행만 이뤄지면 사실상 흥행이 보장돼 있다. 부산일보DB 국내 최초 상업용 해상풍력발전 단지인 제주시 한경면 탐라해상풍력발전 전경. 녹색채권은 재생에너지 같은 지속가능한 미래에 투자한다는 것을 앞세워 발행만 이뤄지면 사실상 흥행이 보장돼 있다. 부산일보DB

‘그리니엄’은 그린과 프리미엄의 합성어로, 녹색채권의 금리가 일반 채권의 차입 금리를 밑도는 현상을 뜻한다. 채권은 가격과 금리가 반대로 움직인다. 금리가 낮다는 건 그만큼 수요가 많아 채권의 가격이 올라갔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인기 있는 채권이다.

그리니엄의 크기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시장이건 녹색채권 수요가 일반 채권보다 많다. 구매자 입장에서 녹색채권은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지만, 녹색금융 투자자로서 얻게 되는 ‘녹색 라벨’의 가치는 가격 차이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견고한 녹색 흥행 신화

지난 4월 현대캐피탈은 친환경 자동차 할부 지원과 리스 사업 등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2000억 원 상당의 녹색채권 발행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수요 조사에서 6000억 원에 이르는 투자 수요가 몰렸고, 계획보다 85% 증액된 총 3700억 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했다.

BNK부산은행은 같은 달 녹색채권 1000억 원을 연 4.37% 금리로 발행했다. 당시 수요 예측 조사에서 발행액의 3배가 넘는 3360억 원이 몰린 것이 금리 측면에서 은행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해당 녹색채권은 국고 금리와의 차이가 0.88%P로, 지방 은행 역대 최저 기록이다.

지난 2월 LG에너지솔루션은 8000억 원의 녹색채권 발행 계획을 세웠는데, 5조 6100억 원이 몰렸다. 수요 예측 사상 최대 규모로, 결국 최종 발행액은 1조 6000억 원으로 2배 늘렸다. 지난해 4월엔 배터리 소재 업체 포스코퓨처엠도 1500억 원 발행 계획을 세웠다가, 7.1배인 1조 600억 원이 몰려 최종 발행액을 3000억 원으로 늘렸다.

3년 전인 2021년 4월엔 당시 한화건설이 역세권 개발, 복선전철 건설 등을 위해 800억 원의 녹색채권 발행 계획을 세웠다. 역시 수요예측에서 6.8배인 5440억 원의 자금이 몰렸고, 최종 발행액은 1200억 원이 되었다.

시기와 업종 상관없이 녹색채권은 웬만하면 흥행한다는 게 금융계의 설명이다. 수요 예측에서 당초 계획을 압도하는 자금이 몰리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국내 녹색채권 시장은 연기금,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기관 투자자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들 기업과 기관은 투자금의 일정 비율을 ESG로 채우고 있다. 특히 ESG 테마펀드나 ETF 등을 통해 유입되는 국외 자금도 흥행을 뒷받침해 준다. 홍콩 현지의 한 금융회사 채권 담당자는 “한국에서 녹색채권에 왜 더 적극적이지 않은지 의아하다. 한국 시장에서 새로운 녹색채권이 올라오는지 매일 들여다보는 자금 운영자들이 많다”고 전했다.

■흥행 유지 조건은 신뢰감 유지

녹색채권의 흥행도 시장 논리의 결과다. 가치 지향적 투자가 선호되는 시장이다 보니, 구매자들이 녹색채권을 사야 할 경제적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뜻이다.

녹색채권 구매자는 ESG 투자만으로도 채권 발행사와 마찬가지로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특히 EU의 지속가능금융 공시 규제(SFDR)처럼 금융시장 참여자가 ESG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경고가 잦아지고, 기업의 투자 정보가 더 많이 공개될수록, 마케팅 측면에서 녹색채권의 매력은 향상된다. 이런 이유로 기관과 기업 등은 내부적으로 녹색금융 투자 목표치를 정하고 할당량을 채우고 있다.

ESG가 기업 평가 지표로 자리 잡으면서, 녹색채권은 홍보를 넘어 경영 측면에서도 실질적인 이점을 제공한다. 유럽 등은 녹색금융 관련 투자가 많으면 다른 환경 규제 등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펀드나 기금의 종류에 따라 아예 일정 비율 이상을 녹색산업에 투자할 것을 강제하기도 한다. 외국 자본이 한국 시장 내 녹색채권 구매에도 적극적인 이유이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만들어진 ‘녹색채권 흥행 신화’에 대한 우려도 있다. 수요가 많다 보니 시장의 검증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녹색채권은 인기가 많다 보니, 투자 프로젝트의 경제적 가치나 환경 개선 효과 등에 대한 검증 없이 빠른 시간 내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시장 내 자체적인 그린워싱 검증이 어려워진 셈이다.

실제로 녹색금융이 먼저 시작돼 고도화된 유럽에선 2022년 전후로 시장이 그린워싱을 방치하고 있다는 논란이 거세게 일어, 관련 규제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녹색채권 신뢰가 흔들리면, 탄탄한 수요도 빠르게 이탈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아시아 녹색금융 시장에서도 큰 손에 해당하는 유럽이 이렇게 기준을 높이면 국내 녹색채권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법제연구원 ESG법제팀 최정윤 연구위원은 “시장에서 녹색채권이 획득한 지위는 녹색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그린워싱이 발생한 경우라면, 최대한 엄정하게 대처하고 제도적 실효성을 제고해 이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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