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일기로 하늘로 떠난 ‘평화 중재자’ 카터
실패한 대통령서 퇴직 후 반전
카터센터 세워 국제활동 나서
주로 외교·사회봉사에 집중해
1994년 남북 정상회담 주선키도
100세를 일기로 29일(현지 시간)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보다 퇴임 후의 활동으로 더 많은 관심과 평가를 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민주당 소속으로 주 상원의원을 두 번 역임한 뒤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1977∼1981년 4년간 재직했다. 이어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해 단임에 그쳤다.
재임 기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국내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했고 대외적으로 '인권외교'를 내세워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어려움도 겪었다. 경제 부문에선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 등이 발목을 잡았다. 물가상승률이 1977년 연평균 6.5%에서 1980년 13.5%까지 치솟았다. 이란의 정권 교체로 석유 수급에 차질이 생겨 고유가 문제가 불거졌다. 임기 말 100만 개가 넘는 일자리 창출, 재정 적자 감소, 사회보장제도 강화 등의 실적이 있었지만 빛이 바랬다.
재임 때 주한미군 문제로 한국과 관계에서 긴장이 높아지기도 했다. 카터는 대선 출마 때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고, 취임 후에는 자신의 소신인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려고 해 적잖은 저항과 논란을 야기했다. 2018년 공개된 미 외교 기밀문서를 보면 카터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1979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두고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펼쳐진 '인생 2막'에서 완전히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한창 일할 나이인 57세에 백악관을 나온 카터는 이때부터 세계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개선, 보건·여성 문제 해결을 위해 뛰면서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세간의 평가를 뒤엎었다.
부인 로절린 여사와 함께 고향인 조지아주로 귀향, 퇴임 이듬해인 1982년 애틀랜타에 세운 비영리기구 '카터 센터'(카터재단)가 그 기반이 됐다. 인권 증진과 인류의 고통 감소를 목표로 내건 카터 센터는 평화 달성과 질병 퇴치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카터는 1989년 이래 수십 개 국가에 선거감시단을 파견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저개발 국가 질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발에 기생해 종양을 일으키는 아프리카 기니 벌레 박멸 운동을 1986년부터 펼쳤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사태를 정리한다, 해결한다'는 뜻에서 '미스터 픽스 잇'(Mr. Fix it)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물밑이나 막후에서 이뤄지는 외교 협상에서, 외교 관례상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현직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대신해 그는 각종 국제 문제에서 '특사'이자 '해결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방북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하고 당시 김영삼(YS)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받아 서울과 판문점을 경유해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평양 방문이 허용된 첫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결국 카터 전 대통령을 매개로 하는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이은철 기자 eunche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