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부산발 글로컬과 퐁피두
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부산 인문연대’라는 이름의 시민학술단체가 부산에서 5년째 활동하고 있다. 다른 지자체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경우다. 부산 시내 7개 대학의 연구소와 학술원, 시민인문교육기관, 문화공간 등 18개 단체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인문연대가 표방한 지난해의 대의제는 ‘글로컬 시대의 인문학-지역과 세계의 만남’이었다. 초국가적인 경제·문화적 지배 체제와 서울 일극 중심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공동체의 인문정신을 살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였다.
지난해 9월에는 처음으로 공동 학술행사를 기획하여 ‘동북아 지역의 글로컬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부경대에서 이틀간 행사를 했다. ‘글로컬 시대의 보편적인 삶과 철학’ ‘부산발 글로컬 문화콘텐츠 육성 방안’ ‘한류의 새로운 방향성’ ‘바람직한 다문화사회 형성을 위한 상호 문화교육’, 이렇게 4개의 방향이었는데, 일반 시민이 의외로 많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로컬의 시선으로 본 세계문학’이라는 별도의 국제 학술포럼도 열렸다.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문학적 성과를 부산 문학과 접목하는 자리였다. 개별 단체들도 자기 단체의 전문성과 개성을 고민하며 1년 내내 분주하였다. ‘서사와 기억장치로서의 문화 비교’ ‘청소년 비평 공모’ ‘한자의 문화 편력’ ‘창작곡 연주회’ ‘시네마 수필-일상으로의 초대’ ‘찾아가는 해역 인문학’ ‘배 위에서의 문화유산 아카데미’ ‘금요 인문학’ ‘지역성의 혁명: 지역 도시 주권 확립의 문제’ ‘시각 콘텐츠와 지역주의’ 등이 지난해의 주요 프로그램이었다.
진정으로 지역 쇠락 멈추려면
주체적·중장기적 안목 통해
개성 있는 부산문화 지켜내야
거창한 외국 권위 기댄다고
문화도시로 탈바꿈하진 않아
지역 예술 집중 지원 더 중요
이런 노력은 하나의 초점과 방향을 향하고 있다. 올해의 의제도 ‘부산발 글로컬의 모색과 탐구’,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지역의 문화력과 인문정신을 지켜내고, 우리만의 개성 넘치고 독특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흩어져있는 인문 역량, 문화 잠재력을 정비하고 조직화하여 부산만의 주체적이고 개성 있는 글로컬 문화를 만들어나갈 때 우리의 ‘정신 주권’이 바로 서고, 부산의 쇠락도 진정으로 멈출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퐁피두 사태는 대단히 유감이다. 부산시와 시의회는 1000억 원의 공공 건설비와 120억 원의 연간 운영비를 들여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의 부산 분관을 꼭 짓겠단다. 수억 년 동안 형성된 천혜의 이기대 해안공원 일대를 허물고 기어이 거기에 서구 미술관 분관을 유치하겠다는 모양이다. 중국 상하이에도 있고 서울 63빌딩에도 들어선다는 퐁피두 분관을 굳이 부산에 여분으로 또 지어야 할까. 게다가 이 엄청난 사업을 밀실에서 비공개로, 단 한 번의 이렇다 할 시민 공청회도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고 한다. 5년간 운영 뒤에는 미술관 처분권을 전적으로 프랑스 측에 넘기고, 재개발 비용까지 100% 부산시가 떠안는 악조건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프랑스 법에 따라 프랑스어로만 작성한 비밀 계약서도 문제이다. 소싯적에 기자 생활을 해본 필자의 개인적 공상일 수 있는데, 그 어떤 세력과 ‘뒷배들’ 사이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을까 싶다.
돌아가는 일이 이렇다 보니 문화예술계는 물론이고, 경제와 관광 분야 등의 일부 단체를 제외한 다수의 시민사회단체와 지식인들이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퐁피두 분관 부산 유치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도 ‘퐁피두 분관 반대 대학교수 성명서’에 15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부산에는 이미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이 해운대와 을숙도에 있다.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부산을 글로컬 도시로 만들려면 막대한 예산을 들여 훌륭하게 지은 이런 공공미술관을 잘 키우고 육성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외국계 대형 명소 유치보다는 지역 화가와 문화인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게 더 중요하다.
부산의 자매도시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가면 예카테리나 2세가 서유럽 회화와 조각을 잔뜩 사서 모아놓은 유명한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있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인들은 ‘이동파’를 비롯한 자기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과 페테르부르크 ‘러시아미술관’을 더 아낀다. 서유럽에서 각종 예술사조를 늦게 받아들였어도 자생력을 키우는 노력 덕에 그 나라는 지금 세계적인 예술의 나라가 되어있다. 외국의 권위에 굴종적으로 기댄다고 부산이 하루아침에 고급의 문화도시로 탈바꿈하진 않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김소월문학관을 부산에 먼저 짓자”라는 제안을 여기저기 수년째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지역의 유력인사들이나 공무원들에게서 듣는다. “소월이 이북 출신이지 부산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묻고 싶다. “프랑스인 퐁피두는 부산 사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