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중립’이라는 함정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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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광장 물들이는 “탄핵 저지” 목소리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를 바 없다는
기계적 양비론 어느 때보다 부각

가해자가 피해자인 양 약자의 언어
대중 판단력 막고 내란 본질 흐려
내란 동조·역사 퇴행 가담하는 꼴

광장에서 태극기·성조기를 들고 연일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함성의 기세가 갈수록 맹렬하다. 대통령은 불법 계엄 의도가 없었으며 그래서 구속기소라는 법적 대접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소수의 목소리라 해도 존중돼야 함은 물론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용인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출 경우에 그렇다. 이들은 온 세상이 보았고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부정하고, 대한민국 사법 제도마저 흔든다. 거의 ‘망상’ 수준이다. 그럼에도, 분노 자체는 적어도 ‘거짓’이 아닌 듯하다.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울, 그러니까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존재감이다. 어쩌면 탄핵 사태는 이들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가 포용 못 하는 복지 시스템의 구멍이라고 보는 시각, 설득력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8년 전 탄핵 풍경의 데자뷔를 마주하는 심정은 편치 않다. 헌정사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일만큼 국가적인 불행도 없다. 지금의 탄핵 사태를 당시와 비교하면 유사점이 많지만 상이한 대목도 없지 않다. 대표적으로 ‘기계적 양비론’을 꼽을 수 있겠다. “계엄 발동에 문제가 있다 해도 민주당의 국회 폭주 때문”이고, “(법원 난입) 폭도들이 잘못했지만, 경찰도 잘못이 있다”는 식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를 바 없다는, 중립을 가장한 양비론이 과거에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과도하게 부각된 적은 없다. 어느 잘못이 더 중대한가를 따지지 않는 기계적 중립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결국 편향을 낳는다. 그래서 위험하다.

‘중립’에 대해 생각해 본다. 중립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음을 뜻한다. 더 적합한 말로 ‘중용’이 있다. 상대방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에서 적절함을 지키라는 의미다. 언행을 돌아봄으로써 도덕적인 실천과 의미 있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중용이다. 곧 내적 성찰과 자기 수양의 방편에 가깝다. 그런데 중용은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사회집단 내에서는 무용한 편이다. 가치 판단이 필요할 경우 어느 한쪽에 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중립’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중용이든 중립이든 객관의 입장이든, 책임 회피 혹은 현실 도피에 가까울 때가 많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兩是)는 황희 정승의 태도는 미덕인가. 그렇지 않다. 무책임한 것이다. ‘이편도, 저편도 아니다’(兩非)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비겁한 보신일 뿐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립이 의도된 속임수일 때도 있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 부합하지 않는 쪽을 비판할 때 주로 나타난다. 어느 한쪽을 두둔하기 위한 꼼수로 보아 무방하다. 중립의 허구성은 자동차를 생각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중립 기어는 경사진 곳에서 결코 머무르지 못한다.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프란치스코 교황)거나 “중립은 가해자에게만 이로울 뿐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이다”(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 같은 통찰은 진실을 품는다.

12·3 내란 사태는 현직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친위 쿠데타를 벌인 초유의 사건이다. 무장 군인이 국회의사당을 짓밟는 헌정질서 파괴 시도를 온 국민이 다 지켜봤다. 그런데도 내란 수괴 피의자의 불법적인 궤변을 정당한 주장인 것처럼 호도하는 목소리가 정치권 일부와 광장 일각에서 횡행한다. 진원지는 유튜버를 필두로 한 극우 세력이다. 이들은 시시비비가 명백한 사안까지 정쟁화하고, 법적 근거도 없는 말장난을 사실처럼 부풀린다.

검증 없이 이들 목소리를 스피커처럼 옮기는 여당도 한통속이다. 엊그제 윤석열 대통령을 구치소에서 접견한 지도부의 행태는 더 가관이다. 원내 제1정당을 독일 ‘나치’에 비유하며 대통령의 ‘옥중 변론’을 있는 그대로 퍼 날랐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양 약자의 언어를 도용하는 이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사태의 본질을 가려,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지지세를 확대함으로써, 탄핵 저지의 목표를 이루는 것. 그러니 중립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내란에 동조하는 것이요, 반역사적 퇴행에 가담하는 것이다. 내란 세력은 바로 이걸 노린다.

국면마다 소재를 바꿔 가는 중립론과 양비론은 그 어느 때보다 집요하다. 당장의 효과는 거둘 수 있겠으나, 허구성과 불합리성을 알아차리는 데는 정교한 논리나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이성적 사고를 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일반 상식이면 충분하다. 가슴에 새길 만한 경구를 단테의 〈신곡〉에서 만날 수 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가 닥쳤을 때 중립을 지키는 자들에게 예약돼 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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