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금융 자사고'라는 이름의 '인서울 준비반'
한국거래소·시·교육청 등 추진 박차
인재 키워내 금융 중심지 비상 목표
졸업생 의대 진학하면 계획 어긋나
청년 수도권 유출 부추긴다는 지적
지난 10일 부산의 한 식당에서 한국거래소의 출입기자 신년 간담회가 열렸다. 한국거래소는 본사의 부산 이전 20주년을 맞아 부산의 금융중심지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한국거래소 측이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3개의 핵심 방안이 나열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거래소가 첫 번째로 내세운 ‘부산 금융 특화 자율형 사립고 설립’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거래소와 부산시, 부산시교육청, BNK금융지주가 설립을 추진 중인 전국 단위 금융 자사고는 부산의 국제 금융중심지 도약을 위한 ‘글로벌 금융인재 육성’에 방점이 찍혔다. 이 자사고는 2029년 개교를 목표로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17일 꾸려진 부지선정위원회가 부산의 16개 구·군을 대상으로 부지 공모 절차에 돌입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금융 자사고에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 뒤 부산의 금융 인재로 오롯이 남아 있을지 말이다. 한국거래소 측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학생이 금융 자사고에서 공부한 뒤 금융이 자신의 길이 아니다고 생각하고 다른 진로를 선택한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 지역의 금융 인재 육성이라는 금융 자사고 설립 취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실 교육 과정의 자율성이 보장된 자사고는 국·영·수 과목을 집중적으로 강화할 수 있어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 유리한 구조다. 자사고가 의대 진학을 위한 경로로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일부 학부모와 학생들의 선호도 또한 높다. 이 때문에 입시에 편중된 자사고에서 심도 깊은 금융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진정한 지역의 금융 인재를 키우고 싶다면 학생이 졸업 후 금융계에 바로 취업할 수 있도록 금융 특성화고를 설립하거나, 지역 대학과 협력해 전문 교육을 강화하는 게 더 나은 대안일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금융 자사고를 추진하는 진짜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결국 부산에 이른바 ‘인서울’ 실적이 뛰어난 고등학교를 세우려는 게 아닐까. 실제로 한국거래소가 금융 자사고 설립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런 의구심을 키웠다. 금융 자사고 설립 브리핑을 진행하던 한 관계자는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으로 올 때 읽은 기사를 언급했다. 그는 서울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부산 지역 고교가 드물다고 지적하며, 이를 근거로 부산의 교육 환경이 수도권에 비해 뒤처져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거래소는 금융 자사고가 수월성 교육을 목표로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정은보 이사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사례를 언급하며 경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시장에서 1등과 2등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말하며, 치열한 경쟁이 결국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는 메시지로 귀결되는 듯해 씁쓸했다. 미국의 엘리트 금융인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했지만, 결국 탐욕과 단기적 이익 추구가 월가를 지배하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그 결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엘리트들이 시장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도 금융시장의 역사가 잘 보여주는 셈이다.
한국거래소가 지역의 ‘소멸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인서울 진학률이 높은 자사고 설립 카드를 쉽게 내놓을 수 있었을까 싶다. 부산은 2020년 대도시 중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데 이어, 불과 4년 만에 노인 인구 비율이 23.87%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1만 3657명이 순유출됐으며, 특히 20~30대 청년층의 유출률이 1.1%를 기록하며 수도권으로의 인구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역 대학들은 신입생 감소로 존폐 위기에 몰렸다. 금융 자사고를 통해 인서울 진학생을 늘리는 것이 지금의 부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이유다.
지역 교육계 일각에서는 금융 자사고의 설립이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시도와 맞물려 있다는 추측도 나온다. 서울의 금융권 종사자들이 부산으로 내려오기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로 ‘부산에는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다’는 점이 지적됐다. 물론 이 교육기관은 수도권 소재 대학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는 학교를 말한다. 금융 자사고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채택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부산시장이나 부산시교육감이 득표를 염두에 둔 정치적 이득으로 이 정책 추진에 나섰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소멸 위기의 도시에서는 경쟁력 있는 금융 중심지가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금융 자사고가 '입시 사관학교'로 전락한다면, 이는 오히려 수도권으로의 인재 유출을 부추기는 꼴이 된다.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수도권 대학 진학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황석하 블록체인팀장 hsh03@busan.com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