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굴욕’ 당한 젤렌스키… 트럼프와 화해 압박까지

이은철 기자 eunche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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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정상 “백악관 돌아가” 종용
동맹 균열 우려 발등 불 떨어져
러시아, 미·우크라 파국 반색
종전 협상서 우위 포석 기대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동을 갖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동을 갖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나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표정이 엇갈렸다. 러시아는 반색하는 속내를 굳이 숨기지 않은 반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유럽 정상들로부터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가봐라”라는 취지의 압박을 받았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 DC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50여 분간 진행했다. 회담은 초반부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된 건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방문이 영광"이라고 표현했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는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담이 40여 분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 문제가 화두로 거론되면서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된 언론의 질문에 "푸틴에 대한 그(젤렌스키)의 혐오 때문에 내가 협상을 타결하는 게 매우 어렵다"고 말했고, 배석한 J.D. 밴스 미국 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위해 러시아와 외교를 하는 것이라고 옹호했다. 그러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작심한 듯 반박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불법으로 병합한 이후 체결된 민스크 평화협정을 위반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실을 지적하고서 "J.D. 무슨 외교를 말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이처럼 미국과 우크라이나 정상이 얼굴을 붉히고 헤어지면서 러시아는 미소를 보였다. 1일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광대”로 칭하며 트럼프 대통령과의 백악관 정상회담을 “인정사정없는 질책”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아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크렘린궁의 의중을 잘 아는 소식통은 가디언에 “푸틴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즐겼으리란 것은 명백하다”며 “이제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더 많은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에게 이번 회담은 전쟁 시작 이후 그 어떤 군사작전보다 커다란 승리”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와 미국 사이에 균열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만큼 러시아는 향후 종전 협상에서 러시아가 우위에 설 수 있게 됐다고 계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선회할 가능성도 제기됐던 만큼, 러시아의 반응에는 일종의 안도감도 섞인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유럽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에 트럼프 대통령과의 화해를 요구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회담 직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백악관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스타머 총리는 뒤이어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전화를 걸어 과열된 상황을 식히려 했지만, 미국 당국자들이 회담으로 돌아오기 전에 격분이 누그러져야 한다고 답하면서 중재 노력이 무산됐다고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곧이어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도 공개적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과 화해를 촉구했다. 뤼터 사무총장은 BBC에 나와 전날 젤렌스키 대통령과 통화했다면서 그에게 “트럼프 대통령 및 미 행정부와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유럽 정상들이 앞다퉈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과 화해하라고 압박하고 나선 것은 파국으로 끝난 양국 간 회담 이후 대서양 동맹의 균열이 커질까 우려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을 찾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종전 협정의 조건으로 미국의 안보 보장을 거듭 요구하자 “당신이 합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끊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이 같은 발언에 유럽은 미국 없이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나아가 유럽의 안보를 어떻게 보장할지 실질적 방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유럽 정상들은 2일 영국 런던에서 회담을 열고 현 상황을 논의할 예정이다. 유럽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이 정상회담의 ‘최우선 순위’는 “동맹의 균열이 더 커지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은철 기자 eunche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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