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폭설
김려 (1957~)
노인은 앉은뱅이 아내를 업고 밭으로 갔다
텃밭 한쪽 꽃방석 위에 아내를 앉혀 놓고 봄날을 골랐다
햇살의 흰 머리카락
수정 브로치를 단 민들레 곁에서 반짝거렸다
풀 한 번 뽑고
아내 한 번 쳐다보고
풀 한 번 뽑고 아내 한 번 쳐다보고
잇몸만 남은 한낮
다소곳 늙은 아내가 전하는 말
올해도 영감이 좋아하는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아무렴, 내년에도 볼 수 있지
감나무 그늘
노부부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텃밭의 노부부가
앞당겨 본 겨울
눈부신 봄날이
꽃잎인 듯 흩어져 내렸다
시집 〈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 (2020)에서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봄날 텃밭에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눈 내리는 겨울을 앞당겨보는 노부부의 대화에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카프카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주름이 생기지 않는 마음, 친절하고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령을 극복하는 힘이 아니겠는지요. 삶은 순간순간의 있음이며 그것은 모두 한때일 것입니다. 단순한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 작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는 나이. 그래서 늙은 아내를 향한 영감님의 다정한 눈빛이 봄볕보다 따듯합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삶을 마주하는 것. 누구나 꿈같은 인생의 봄날 지나가겠지만 두려움보다는 더 넓은 시야와 깊은 지혜를 선사해준다는 나이야말로 존경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정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