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여파 ‘비닐 대란’ 조짐… 종량제 봉투도 동났다
공산품 원료 나프타 가격 급등
플라스틱 일회용품 수급 비상
편의점 곳곳서 봉투 싹쓸이
시장선 ‘검은 봉다리’ 사재기
테이블 덮개용 비닐도 품절
25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의 한 편의점에 종량제봉투가 품절돼 봉투를 넣어둔 박스가 텅 비어 있다. 정종회 기자 jjh@
“평소에는 하루에 10장 남짓 나가는 종량제 봉투가 오늘은 100장이나 팔렸어요. 고객들이 순식간에 종량제 봉투를 쓸어가 오후 5시 30분에 모두 동이 났습니다. 그 뒤로도 종량제 봉투를 사러 왔다가 헛걸음을 하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요.”
부산 해운대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 모(35) 씨는 갑자기 종량제 봉투가 불티나게 팔리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종량제 봉투 재고를 확보하기 위해 날이 밝자마자 발품을 팔아야겠다”고 말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여파로 나프타 등 석유화학 원료 수급에 비상이 걸리면서 전국적으로 ‘비닐 대란’ 조짐을 보인다. 해운대 일대 편의점에서는 종량제 봉투가 잇따라 동나고 한 번에 수십 장씩 사들이는 싹쓸이 구매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사용하는 업소도 경영난 가중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24일 오후 10시께 〈부산일보〉 취재진이 해운대구 우동 편의점 5곳을 확인한 결과 종량제 봉투는 모두 매진된 상태였다. 점주 정 모(36) 씨는 “한 번에 10~20장씩 종량제 봉투를 구매하는 고객이 많아 재고가 금세 떨어졌다”며 “내일부터는 1인당 구매 개수를 2장으로 제한해야겠다”고 밝혔다.
취재진이 있는 와중에도 종량제 봉투를 사러 왔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고객이 이어졌다. 주민 한 모(39) 씨는 “직장 근처 편의점에 종량제 봉투가 매진돼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집 근처 편의점들 상황도 다 마찬가지라 큰일”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통시장에서는 이른바 ‘검은 봉다리’ 사재기가 불이 붙었다. 동구 수정시장에서 과일 가게를 운영하는 김 모(47) 씨는 “공장에서 앞으로 비닐을 안 준다는 말이 상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며 “평소 하루에 비닐을 200장 정도 구매하는데 오늘은 500장을 사뒀다. 내일은 더 많이 사둘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업장 특성상 일회용품을 많이 사용하는 소상공인들도 비상이 걸렸다. 주로 테이크아웃 음료를 판매하는 부산진구의 한 카페 주인 김 모(51) 씨는 “업소 특성상 일회용 플라스틱 컵 이용이 많은데, 컵을 못 구하거나 가격이 올라가면 카페 운영 자체가 힘들어진다”며 “전쟁이 장기화되면 생계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부산 광안리와 서면 등에서 타투샵을 운영하는 김 모(43) 씨도 고심이 깊다. 그는 “타투샵은 위생을 위해 침대·테이블 등 피부와 닿는 모든 장비에 비닐을 씌워야 해 비닐값만 월 200만 원 정도 든다”며 “그런데 기존에 사용하던 비닐 제품이 대부분 품절돼 가게 운영을 못 하게 될 판”이라고 토로했다.
서민들과 자영업자의 ‘비닐 대란’ 불안을 키운 것은 나프타 가격 급등이다. 나프타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며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 등 다양한 공산품의 기초 원료로 활용된다. 이란 전쟁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석유화학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치솟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나프타 국제가격은 지난 1월 첫째 주 배럴당 56.9달러(약 8만 6000원)에서 지난주 129.7달러(약 19만 6500원)로 약 127.9% 상승했다. 여기에 국내 소비량의 40~45%를 수입에 의존하고, 이 중 54%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구조여서 중동 분쟁으로 해협이 봉쇄되자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에 정부는 나프타 수출을 제한하고, 이를 국내 수급으로 돌리는 조치를 시행할 예정이다. 산업통상부 양기욱 산업자원안보실장은 지난 2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을 통해 “나프타의 생산·도입 물량을 의무적으로 보고받고, 매점매석을 금지하고, 수출을 제한할 수 있는 조치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빈 기자 bysu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