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사랑에는 사랑으로 답해야 한다
논설위원
비정상이 정상 둔갑 역사에 트라우마
불안 고조 국민 탄핵심판 갈등 겪어
찬탄·반탄, 나라 걱정·사랑 공통분모
정치권 기만·선동 심리적 내전 부추겨
무책임 발언·전망 헌재 정신도 짓밟아
이율배반 행태 탈피 보편 가치 실천을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했다. 국민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대한민국이 망했다” 등의 탄식 너머엔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라는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선고 이후에도 국민은 여전히 반으로 쪼개져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선고 당일 진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파면 결정 불수용 응답이 44.8%에 달했다. 헌재가 8 대 0으로 탄핵소추를 인용했지만 윤 전 대통령의 복귀를 기대한 국민의 상당수는 파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헌재가 국민을 기만했다는 식의 억측도 이어지고 있다.
헌재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국회 군경 투입 등 5가지 소추 사안이 모두 적법하지 않다고 선고했다. 재판관 8명은 자신의 이념 성향과 무관하게 전원일치로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상 이번 탄핵심판의 결론은 좌고우면할 사안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파면 이외의 선택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헌재가 결정문을 통해서도 밝혔지만 계엄 목적 자체가 ‘병력을 동원해 국회와의 대립을 타개하려는 것’이기에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을 충격에 빠트리고,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에 걸쳐 혼란을 야기한 것은 대통령의 책무에 명백하게 반한다. 특히 군인들의 국회 진입을 담은 동영상 등 불법성에 대한 증거까지 다양하게 확보된 상황이다 보니 탄핵 기각이나 각하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헌재의 존립 목적 자체가 권력 통제 속성을 가진 헌법을 수호, 미완성인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다면 파면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헌재 선고를 두고 왜 여론은 극심하게 분열되었을까.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뒤 122일 동안 ‘심리적 내전’이 한층 극렬해지는 상황으로 치달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겠지만 분열된 민심의 밑바닥에 깔린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한민국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혼돈의 역사를 이어왔다. 즉,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비정상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정상이 비정상으로 매도되는 아프고 서러운 역사를 너무도 많이 목도했다. 탄핵심판 과정에 표출된 극심한 국민 갈등의 기저엔 이런 과거에서 비롯한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던 듯하다. 찬탄이나 반탄 국민 모두 불법이 합법으로, 합법이 불법으로 둔갑하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과 초조함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불안을 인지 편향 등 병리 현상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사랑이 없으면 걱정도 없듯이 국민 불안의 가장 깊은 곳엔 이념 성향을 초월한 ‘나라 걱정과 사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들의 애국심은 정치권에 의해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정치권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습관화된 기만과 선동으로 민심을 격앙시키고 분열시켰다. 진실한 사랑에는 감사와 더 큰 사랑으로 답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표 계산과 잇속 챙기기로 일관했다. 극성 유튜버와 일부 극렬 지지층도 국민들의 사랑을 이용해 갈등을 부추겼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선고 직전까지 대통령 직무 복귀를 전망하면서 헌재가 정치적 판단을 할 것이라거나 5 대 3 교착 상태였는데 최근 4 대 4로 됐다는 등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민심을 쪼개고 기름을 부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탄핵 찬성과 정권교체 여론, 이재명 대표 지지율 등이 동시 상승했기에 재판관들이 파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자의적 해석으로 일관했다.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정치권의 목소리는 1987년 민주항쟁 결과물인 헌법재판소의 정체성은 물론 자유와 평화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신마저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다시 조기 대선이라는 격랑 속으로 접어들었다. 정치권은 또 무분별한 진영 싸움에 골몰하고 있다. 국민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아전인수식 선동은 날로 거칠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통과 통합을 강조한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한강 작가는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너무도 당연했던 ‘파면 선고’를 통해 대한국민은 미래를 향한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또 내디뎠다. 이제는 정치권이 보편적 가치를 이행할 시간이다. 국민의 ‘나라 사랑’에는 더 큰 ‘나라 사랑’으로 화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보편적 가치 실천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