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함께할 때, 더 단단해지는 여성의 목소리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최나현·양소영·김세희
탄핵 광장 누빈 지역 여성들 이야기
부산 3인, 비수도권 중심 13명 인터뷰
10년간 여성 혐오와 싸우는 법 체득
소수자 향한 지지와 연대 나눈 기록
지난해 12월 3일 계엄령 이후 전국에서 펼쳐진 윤석열 탄핵 집회에는 2030 여성들이 응원봉을 들고 대거 참여했다. 부산일보DB
지난해 12월 3일 계엄령 이후 전국 광장에서 몇 달간 펼쳐진 탄핵 집회는 전 세계 주목을 받았다. 응원봉을 흔들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한민국의 집회 문화가 놀랍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집회에 관한 국내 언론의 주요 이슈는 일명 ‘응원봉 부대’로 호칭되는 2030 여성들이 이번 탄핵 집회를 주도하고 매우 많은 인원이 참가한다는 점이었다.
청년 여성들을 12·3 내란의 밤 이후 뚝 떨어진 존재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청년 여성들은 지난 10여 년간 거리에서 항상 자신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에 분개해 거대한 추모 물결을 일으켰고, 낙태(임신중단)죄 폐지를 위해 검은 옷을 입고 시위에 나섰다. ‘페미’ 낙인과 사상 검증, N번방과 딥페이크 성착취물 등 무수한 사건들이 여성의 삶을 박살할 때 서로 도우며 함께 싸우는 법을 체득했다. 그 시간이 모여 탄핵 광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는 부산 여성 3명이 탄핵 광장에서 만난 13명의 여성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저자들은 자신을 ‘무명’이라고 소개할 만큼 평범한 사람이다. 언론과 학계 등 여기저기서 탄핵 집회의 여성을 언급했지만, 정작 여성의 실제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인터뷰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국선언을 한 1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골고루 참여했고, 비수도권 출신을 우선 섭외했다. 저자에게는 ‘여성’이 지워지는 문제만큼 ‘비수도권 여성’의 경험이 제대로 기재되지 않는 문제 역시 중요했기 때문이다. ‘고졸 생산직 노동자’ ‘TK의 딸’ ‘프로야구단 한화 이글스를 좋아해서 한화 오션 투쟁에도 함께 한다는 야구팬’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부산의 여고생들’ ‘집회 현장에 의료부스를 연 간호사’ ‘자유발언으로 화제를 모은 부산의 술집 여자’ ‘아이돌 덕후인 고3 담임교사’ 등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다채로운 정체성을 뽐낸다.
이들은 모두 내란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밥을 먹고 나서 새로운 내일을 준비했고, 일찍부터 자느라 계엄령 속보를 보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날 이후, 일상의 풍경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집회 현장으로 달려갔다. 친목을 도모하던 단톡방이 집회 인원을 모집하고 참석 여부를 묻는 모임이 되었고 출퇴근에 평일, 주말 집회 일정까지 보태며 고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MZ세대들이 지독히 따진다는 ‘워라밸’을 포기하며 거리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가만히 있는 것보단 그냥 거기 가서 뭐라도 하면 덜 부끄러우니까”라고 했고, 어떤 이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고 집회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좀 더 나은 세상에 동참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간호사 은영 씨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 학생들과 동갑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에 이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라고 답한다.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해진 소결 씨는 “대구에서 이런 집회에 나가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과할 일이 생기면 대구 서문시장에 와서 악수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국민의힘에 한 방을 먹이고 싶었다고 말한다.
예문여고 3인방은 “청소년은 미래를 이끌어 갈 사람이라는 허울 좋은 말 아래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했다. 여태껏 청소년에게 발언할 기회도, 투표권도 주지 않았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세대다. 우리들이 살아갈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만들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시국선언문도 발표하고 이후 청소년 시민대회도 열었다. 이서 씨는 계엄령 속보에 국회로 달려간 동생이 걱정돼 따라갔을 뿐인데, ‘12월 3일 국회 앞 시민들이 나라를 구했다’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져 이후 집회에 계속 가게 된 경우이다.
‘윤석열 탄핵’이라는 구호로 뭉쳤지만, 광장에선 다양한 의제가 펼쳐졌다. 자유 발언에서 가정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인권, 고졸출신 생산직 차별, 여성혐오 피해자 등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이든 당당히 이야기했고, 지지와 연대를 받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탄핵 정국은 4월 4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일단락되었지만, 책에 등장한 여성들의 여정은 계속 진화 중이다. 최나현·양소영·김세희 지음/오월의 봄/312쪽/2만 1000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