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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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거란·몽골 침입 막으려 불경 인쇄 시작
목판 위한 대대적 벌채 목재 고갈 초래
궁여지책으로 구리 사용한 활자 탄생

안보 불안에 통상 압력까지 안팎 위기
빈곤 극복한 경제 성장도 한계 부닥쳐
과거 집착 대신 새로운 착상·기술 필요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유산 중에 금속활자 인쇄술이 있다. 그런데 중국이나 다른 나라가 아닌 고려에서 먼저 금속활자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주된 이유는 대장경 조판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직면하여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1011년부터 대장경 조판 사업을 시작하여 77년 후인 1087년에 초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경판의 수는 6000매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도성을 옮긴 고려는 소실된 대장경을 대신하는 새로운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년)에 시작해서 1251년(고종 38년)에는 이른바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이처럼 고려는 240년에 걸쳐 목재로 대장경판을 만들었다.

목판에는 당연히 나무가 필요하다. 팔만대장경 목판의 총 무게는 280t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속적인 대장경판의 조성은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팔만대장경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경판 자체의 크기만 길이 50~60㎝에 이른다. 그렇다면 최소한 판각에 필요한 목재의 직경은 65㎝를 넘어야 하고, 그런 나무의 둘레는 2m에 이른다. 이른바 한아름 이상 되는 나무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큰 나무는 지금도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더욱이 판각에 쓰이는 목재의 종류도 제약이 있다. 우선은 재질이 균일하고 나무를 이루는 세포 하나의 크기가 작아 글자 한 획 한 획이 깨끗하게 파져야 한다. 또 너무 단단하여 글자를 새기기 어려워도 안된다. 너무 연한 나무는 인쇄를 할 때 획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버리므로 적당치 않다. 이러한 조건에 맞는 나무는 그렇게 많지 않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의 침엽수는 세포 크기가 크고 나이테가 너무 뚜렷하여 부적합하다.

실제로 팔만대장경에 사용된 나무는 주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라고 한다. 물론 그 밖에도 거의 다른 재료로는 잘 쓰이지 않은 층층나무나 재질이 특히 우수하다고 할 수 없는 고로쇠나무나 후박나무 등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섞여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량 경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목판으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목재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나무들은 오히려 목재의 크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막대한 양의 경판재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경판에 적합한 목재는 이미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금속활자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신서상정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해는 1234년에서 1241년 사이라고 한다. 대장경을 만들기 위한 대장도감이 설치된 것은 1232년이다. 이때는 이미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목재의 벌채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국가적인 사업이자 몽골의 침략 저지를 염원하는 사업이었던 만큼, 당연히 다른 책을 인쇄하기 위해서 나무를 벌채하는 일은 용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판을 만들 목재는 이미 초조대장경과 속장경 등을 간행하면서도 적지 않게 벌채되어 사용된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기는 하였지만 목재의 부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인쇄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목활자의 단점을 개선할 새로운 소재로 구리가 선택된 것이다. 금속활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은 결코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쇄 상태도 조악하고 글씨도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판으로 인쇄한 책처럼 깔끔하지도 정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직지〉의 경우에도 글자꼴이 전혀 다른 글자들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 글자가 뒤집힌 채로 인쇄되기도 하였다. 결국 대장경을 판각할 목재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금속활자를 태어나게 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금속활자는 목판 인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다.

거란·몽골의 침략에 직면했던 고려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현실도 결코 녹록지 않다. 미국은 관세 장벽을 세우고 있고, 주둔 미군의 역할도 변화시키려고 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우리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는 점이다. 60년대 이후 유지되어 온 한국 경제 활력의 원동력은 어찌 보면 절대 빈곤이 초래한 절박함이었을지 모른다. 전쟁의 폐허 위에 선 당시의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로 세계 최빈국이었다. 그렇게 70년 이상 경제성장을 위해 질주해 왔는데, 현재의 우리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신, 성장 동력은 모호해지고 내부의 갈등은 첨예화되었다. 지금이야말로 금속활자와 같은 새로운 착상과 기술이 필요한 때이다. 목판 인쇄는 낡은 기술이고 목재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과거의 방식에 집착하지 말고,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모두의 지혜를 다시 한번 모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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