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일본 '패전' 80주년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전쟁)’.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지칭하는 용어다. ‘조선 출병’도 아니고, 그냥 연호를 앞세운 무미건조한 표기라 누가 누구를 침략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시 왜군은 도공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는데, 이들이 제 발로 따라 나선 것처럼 서술되는 것도 예사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도광산과 군함도 안내문에서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강제’ 노역 표현이 누락된 것과도 판박이다. 역사 서술에서 가치 판단을 생략하는 건 기억의 탈색을 노린 것이다.
전후 일본을 지탱한 건 평화주의였다. 피폭자 등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내세운 전쟁 피해 서사가 그 바탕에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천황에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가해자 없는 피해자 정체성은 완성되기 어려웠다. 허약한 논리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시인 이후 급반전했다. 드디어 가해자가 특정된 것이다. 재무장·집단적 자위권·헌법 개정론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전후 세대를 ‘피해자 코스프레’로 ‘계몽’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과오를 집단 망각하는 장치는 촘촘하게 작동한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했지만 ‘패전’ 표현을 극구 기피한 채 ‘종전’을 고집했다. ‘전쟁이 종료됐다’는 저관여적인 표현을 해야 전란의 참상과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올 1월 “‘패전’을 ‘종전’이라고 하면 본질을 오해하게 된다”고 하자 보수 세력이 극력 반발하면서 퇴진 압박에 나선 까닭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는 전후 50주년에 이르러 이뤄졌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를 공식화했다. 이는 고이즈미 담화(2005년)와 아베 담화(2015년)로 10년 단위로 계승되며 정부 공식 입장이 됐다. 이시바 총리는 4일 의회에서 올해 80주년 담화에 대한 질의를 받자 “각의 결정에 의한 발표” 형식에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보수 세력은 ‘패전’ 표현과 과거사를 직시하려는 이시바 담화를 저지하려 총궐기에 나섰다. 일본 언론은 8월 15일 발표는 난망이고, 9월 중 총리 개인 메시지가 될 것으로 점친다.
역대 정부 입장을 계승하는 공식 담화가 무산되는 건 우려스러운 신호다. 고통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한 주변국과의 ‘기억의 전쟁’을 끝내는 길이 요원해진다. 일본은 대체 ‘패전’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어디로 나아가겠다는 것인가.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