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무너지는 세계에서 버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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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20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영화
개성적 캐릭터들의 성장과 변화
뉴욕에서 밀라노로 무대 옮겨
급변하는 미디어 생태계 꿰뚫는 서사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패션이라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전쟁터 같은 사회를 누비는 여성들의 초상을 그려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명품 브랜드와 세련된 스타일링은 보는 이들의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누군가는 소비 지향적인 판타지를 그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아찔한 킬힐 소리 뒤에 숨겨진 땀방울을 목격하며, 화려한 외양 너머 존재하는 이면을 그려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2006년 개봉한 영화에서는 사회초년생 ‘앤디’(앤 해서웨이)가 패션 매거진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비서로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까다로운 상사와 어수룩한 신입, 패션을 중심으로 한 볼거리는 가볍게 소비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앤디의 미숙함, 완벽해 보이지만 언제든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미란다의 불안을 교차시키면서 20~30대 여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 가히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속 그들. 가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던 그들이 20년 만에 돌아왔다.

2편은 20년 전 런웨이를 떠났던 앤디가 탐사보도 기자로 저널리즘 상을 수상하면서 문을 연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앤디는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받는다. 회사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간 탓이다. 시상대 위에서 트로피를 쥔 채 실직자가 되는 이 아이러니한 장면은, 영화가 응시하는 2026년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성실하게 축적해온 시간과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경험, 그 불안은 특정 직종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된 감각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2편이 전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전개될 것임을 예상케 한다.

먼저 영화가 포착하는 또 하나의 축은 권력의 이동이다. 과거 미란다의 비서였던 ‘에밀리’는 현재 럭셔리 브랜드의 임원이 되어 협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다. 상사의 눈치를 살피던 위치에 있던 인물이 이제는 런웨이의 생사를 좌우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갑과 을이 뒤바뀐 이 장면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위계의 재편과 냉정한 속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맞물려 2편은 화려한 외양에 머물지 않고,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저널리즘의 생존을 다룬다. “치실로 써도 될 만큼” 얇아진 잡지의 두께,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광고가 아니면 매체도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 편집장의 직관보다 알고리즘이 우선하는 환경에서 가치 있는 기사는 의미가 없다. 미란다와 앤디 또한 아름다움과 조회 수 사이에서 헤맨다. 그들에게 패션은 예술이나 철학이 아닌, 데이터에 의해 재단되는 숫자에 불과해진 것이다.

영화는 ‘악마’로 불리던 미란다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린다. 한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그의 권위적인 태도는 이제 문제적 행위로 읽힌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코트를 비서에게 던지던 과거와 달리, 끙끙거리면서 스스로 옷을 정리한다. 부하 직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던 모습도 볼 수 없다. 강화된 HR 규정은 그 아무리 미란다라고 해도 비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묘하게 씁쓸하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권력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과연 사라진 것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상황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레거시 미디어의 생존이라는 현실적 고민이 판타지로 치환되는 순간, 공들여 쌓아 올린 질문의 무게는 힘을 잃고 만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자본의 논리나 선의로 덮어버리는 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무너지는 기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미란다와 앤디를 통해 말한다.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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