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세계적'이라는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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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스페이스 배 대표

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 '오텔로' 추진
퐁피두센터 분관 유치도 절차적 문제
해외 브랜드 수입보다 예술가 성장 중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의 시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에는 어김없이 가족이 가운데 자리한다. 가정의 달의 거창한 형식보다 “사랑합니다” 한마디가 더 묵직한 계절.그러나 오월, 부산에서는 그 온기를 비집고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부산시청 집무실 어딘가에는 아마도 이런 지도가 걸려 있을 것이다. 오페라하우스, 퐁피두 분관, 라 스칼라 공연. 점점이 찍힌 세계 지도 위에서 부산은 이미 뉴욕과 밀라노와 파리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형준 시장에게 문화는 브랜드다. ‘세계적’이라는 형용사는 그의 통치 언어에서 가장 자주 소환되는 주문(呪文)이고, 그 주문이 통할 때마다 시민 혈세는 대서양 너머로 흘러간다. 지금 부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문화 행정의 성취가 아니다. 문화 이해의 빈곤을 드러내는 연속극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세 차례 올리기 위한 업무협약 동의안을 부산시의회가 심의 중이다. 1778년 개관해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 스칼라. 그 이름만으로도 개관 첫날의 포스터는 완성된다. 부산시장 입장에서 이보다 완벽한 홍보 그림도 없을 것이다.

화려한 그림의 이면을 보라. 이 공연 하나를 위해 라 스칼라 측에 지불해야 할 금액은 105억 원으로 추산된다. 반면 올해 부산소극장오페라축제와 창작오페라 지원사업에 대한 시비 지원은 2억 2000만 원에 불과하다. 세계 정상급 오페라단 초청에는 100억 원을 쾌척하면서, 그 무대의 씨앗이 될 지역 예술 생태계에는 2억 원을 쥐여준다. 이것이 이 행정의 민낯이다.

오텔로는 공연되고, 객석은 환호하고, 국제 언론은 짧게 보도할 것이다. 그리고 밀라노의 예술단은 유유히 돌아가고, 부산에는 105억 원의 공백과 여전히 무대를 갖지 못한 지역 오페라 가수들만 남는다. 이것은 개관이 아니다. 전시(展示)다.

오페라하우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유치는 민선 8기 핵심 공약이다. 부산시는 총 1099억 원을 투입해 남구 이기대 예술공원 일대에 미술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연간 예상 수입은 약 50억 원, 총지출은 약 125억 원이다. 매년 75억 원의 적자를 시민 세금으로 고스란히 메워야 한다. 그것도 사업비와 일반 운영비의 ‘전시’ 항목에 브랜드 사용료만 연간 65억 원이 들어갈 것으로 확인됐다. 요컨대, 부산 시민은 매년 65억 원을 내고 ‘퐁피두’라는 프랑스 미술관의 이름을 임차하는 셈이다. 도시의 문화적 자존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외국 브랜드의 하청 문화 기지가 되겠다는 선언 아닌가! 절차적 문제도 심각하다. 시민단체는 지방재정법상 투자 심사와 타당성 조사 의무를 어겼다며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청구했다. 업무협약(MOU)은 비공개다. 시민의 돈으로 시민이 알 수 없는 계약을 밀실에서 맺는다. 이것이 민주적 문화 행정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선의 문법, ‘세계적’이라는 면죄부! 작금의 문화 행정에는 일관된 문법이 있다. 세계 최고 브랜드를 유치하면 나머지 논란은 자동으로 봉합된다는 논리다. 라 스칼라가 오면 오페라하우스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퐁피두가 들어서면 부산은 문화도시가 된다는 식이다. 이 논리 안에서 지역 예술인의 소외, 시민 의견 수렴 부재, 천문학적 적자는 모두 ‘보완할 과제’로 가볍게 축소된다.

문화는 수입(輸入)되지 않는다. 비스마르크가 군함을 사들였다고 독일 해군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은 것처럼, 라 스칼라가 북항을 한 번 다녀간다고 부산에 오페라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는다. 진짜 문화도시는 외부에서 브랜드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예술가를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에 전략적으로 투자해 동북아시아 특화 미술관을 만드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한 외국 간판이 그 길을 가렸다.

독선은 나쁜 의도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옳다는 확신에서 가장 두꺼운 독선이 자란다. 라 스칼라와 퐁피두를 동시에 향해 달려가는 부산시장의 모습은 웅장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달음박질 속에서 정작 부산의 문화 토양은 짓밟히고 있지 않은지, 이 물음을 시민이 제기할 때가 되었다. 그 시점이 지금이다. 세계적인 것을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간판을 사들이는 것과 세계적인 문화를 일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모르는가! 하나는 돈의 문제고, 하나는 철학의 문제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혹은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독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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