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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빛바랜 ‘치안 한국’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로 첫손에 꼽는 것이 ‘치안’이다. 개발도상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선진국이라고 하는 유럽, 미국 출신들도 대한민국의 치안에 대해선 기꺼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실제로 치안 상태가 평균 이상이라는 선진국이라고 해도, 성인이 한밤중에 대도시 골목을 혼자 활보하는 일은 삼갈 때가 많다고 한다. 대한민국처럼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한밤중에 별다른 거리낌 없이 도심을 거닐 수 있는 나라는 드물다는 말도 덧붙인다. 한국 사람으로 이런 말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우쭐해진다.
사실 우리나라의 치안 상태는 세계적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외국인들에게는 직접 한 번 한국을 방문해 체험해 보고 싶은 아이템이 됐다. 안정된 치안이 관광 상품의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이처럼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의 안정된 치안이 요즘 빛이 바래고 있다. 최근 잇따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이상동기 범죄, 일명 ‘묻지 마 범죄’가 등산로, 지하철역, 길거리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면서 국민이 느끼는 치안 불안감이 매우 높아졌다. 한밤중 외출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국민들이 이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호신용품을 구매하는 일도 부쩍 늘었다고 하니, 불안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치안 불안을 개탄하는 소리가 잇따르면서 경찰 책임론과 함께 치안 강화 여론이 들끓은 것은 예견된 일이다. 정부는 서둘러 대도시 중심가에 경찰 특공대와 장갑차를 배치하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흉악 범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국민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일회성의 보여 주기식 대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만 확인했을 뿐이다. 결국은 일상에서 사각지대 없는 생활치안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정석은 주택가나 유동인구 밀집 지역 등 현장 순찰을 대폭 늘리는 방안이다. 대도시 중심가에 중무장한 경찰 특공대와 장갑차를 배치하는 일은 폼 나긴 하지만, 오래 할 수는 없다. 또 범죄 예방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크게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답은 뻔한데, 문제는 현장 인력이 태부족하다는 점이다.
정부와 경찰은 여기서 또 국민에게 실망감과 함께 한숨만 나오게 했다. 경찰의 현장 인력 부족을 의무경찰 재도입으로 해결하자는 발상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담화문 발표를 통해 제시했다. 그러나 이틀 만에 바로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유야무야됐다.
현역병 복무 인력의 부족 때문에 얼마 전 폐지한 의경 제도를 재도입한다고 하면서 핵심 관련 부처인 국방부와는 숙의조차 없었다고 하니, 애초부터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빗발치는 반대 여론에 정부의 정책 난맥상만 드러낸 꼴이 됐다. 정부가 이런 주먹구구식 대응으로 활개 치는 묻지 마 범죄로부터 과연 국민의 생활안전을 지킬 수 있을지 의구심만 더 커지게 했다.
시급한 현장 인력 보충은 지금으로선 우선 경찰 내부 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한 총리의 담화문 발표에 배석했던 윤희근 경찰청장은 최근 일련의 범죄나 테러 또는 사회적인 재난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대략 7500~8000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경찰 내부에서 이 정도의 인력을 충당하기는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윤 청장의 말을 들어 보면 언뜻 수긍이 가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경찰의 내부 인력 운용에 비효율성이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윤 청장은 “‘14만 경찰’이라고 흔히 얘기하지만, 길거리에서 (치안) 활동을 할 수 있는 인력은 3분의 1 수준인 3만 명 정도”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나머지 11만 명의 경찰은 현장에서 치안 활동을 할 수 없는 인력이라는 얘기인데, 현장에서 활동할 수 없는 경찰이라면 도대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법기관인 경찰 인력의 약 80%가 일상적인 치안과 동떨어진 업무를 하고 있다면 이는 경찰의 인력 구조와 운용에 매우 심각한 비효율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윤 청장은 당시 브리핑에서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일부에선 그동안 경찰의 인적 관리 실패가 기형적인 조직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경사 이하 하위직과 경위 이상 간부의 인력 비대칭 구조가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경찰 내부부터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현장 인력을 확보하는 노력을 먼저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국민의 든든한 보호막으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치안 한국의 기둥은 누가 뭐래도 경찰이고, 경찰의 현장 활동이 살아나야 그 명성도 유지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8-2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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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이류 부산대병원’을 원하지 않는다
부산대병원 노조의 파업이 2주 차를 넘기고도 해결될 기미가 없다. 전국보건의료노조의 파업은 벌써 막을 내렸지만, 부산·울산·경남의 최대 거점 병원인 부산대병원은 오히려 노사 갈등이 더 심화하는 양상이다. 환자들은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대 쟁점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노사 입장은 파업 초기에 비해선 다소 진전됐다고는 하나, 아직 합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노조가 지난 25일 부산역 광장에서 폭로한 부산대병원의 불법 의료행위는 시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예전 일부 병원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얘기가 돌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부산대병원과 같은 거점 병원에 근무 중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공개된 장소에서 직접 이를 증언한 사례는 보지 못했다. 부산대병원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금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너질 만한 수준이다.
간호사의 대리 처방은 약과에 속하고, 집도 의사를 대신해 환자에게 설명하고 대리 서명을 한 것은 물론 심지어 간호조무사가 암 진단까지 했다고 한다. 또 의사가 환자를 만나지도 않고 신체 사진만 보고 진료를 한 적도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정말 어디까지 사실이라고 믿어야 할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번 파업의 종료 여부와는 별개로 부산대병원의 불법 의료행위 폭로는 진료 불신은 물론 병원 위상에도 큰 타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 병원의 가장 큰 무형 자산이 바로 환자들의 신뢰인데, 여기에 치명상을 입는다면 그 자체가 곧 위기다. 부산대병원 노조는 31일에도 추가 폭로를 예고했다.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부산대병원은 안 그래도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을 놓고 수년 동안 심각한 노사 갈등을 빚었다. 이 때문에 직원 간 내부 불신과 불협화음이 팽팽한 상태다. 이러한 어수선한 내부 상황 자체가 모두 부산대병원의 위상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지역 최대의 거점 병원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지역 의료계의 심각한 문제인 환자들의 역외 유출도 더 심화할 것은 뻔하다.
부산대병원은 대리 처방 등은 전국 병원 공통의 문제로, 개선 노력을 약속했다. 그렇다고 해도 불법 의료행위가 묻히지 않는다. 이것은 신뢰의 문제다. 무너지기는 쉽지만, 회복은 어려운 게 신뢰의 속성이다. 당장 본인이나 가족, 지인이 큰 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 선뜻 부산대병원을 권유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서울행을 권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현실을 냉정히 봐야 한다.
사실 부산대병원이 서울의 대형 병원보다 낫다고 믿는 지역민은 많지 않다고 봐야 한다. 여러 병원 평가가 있지만, 올해 초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사가 의료 전문가 추천과 환자 만족도 등을 종합해 공개한 ‘2023 세계 최고 병원’에서 부산대병원은 국내 병원 중에서 20위권 밖이었다. 그마저 갈수록 하락세다. 대구·경북, 호남, 충청의 대학병원에도 밀렸다.
부울경 지역 환자의 역외 유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오는 대답이 있다. 의료진과 진단 장비 등 측면에서 서울의 대형 병원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고, 후유증 관리나 재발 여부 관찰에는 지역 대형 병원이 훨씬 우수하다고 말한다. 서울의 대형 병원 선호는 단지 지역 환자들의 선입견 탓이라고 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나, 그럼에도 지역 환자들의 서울행은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부산·경남만 해도 1년에 100만 명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줄어들지 않는지, 특히 지역의 최고 병원인 부산대병원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부산대병원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잘 듣지 못했다. 안 그래도 환자는 넘쳐나고, 예약은 밀려 있다. 지역 최고의 병원이라는 자만심과 넘치는 환자는 역설적으로 부산대병원을 친절과 정성을 가장 원하는 환자들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
게다가 이번에 드러난 부산대병원의 신뢰성 훼손은 지역 의료계 전체에도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하다. 부산대병원이 전국은 물론 지역에서도 ‘이류 병원’이라는 냉소를 받지 않으려면 시민들의 신뢰 회복을 위한 환골탈태 수준의 개선책을 내놔야 한다. 그동안 수 개월간의 원장 공석 상태와 뒤이은 장기 파업, 그 과정에서 드러난 불법 의료행위는 그 자체로 시민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요인이다. 그동안 내부적으로 곪아 왔던 이런 일들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도 어렵게 했을 터이다.
어쨌든 부산대병원은 여전히 지역의 대들보 병원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되고, 갈수록 시민들의 불신이 쌓인다면 이류 병원 취급의 수모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이는 부산대병원이나 지역민이나 모두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7-2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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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올 여름밤도 소음에 잠 못 이루나
이제 겨우 하지(夏至)인데 날씨는 벌써 한여름 폭염의 기세다. 낮뿐 아니라 밤에도 은근히 더운 게 올여름을 어떻게 견뎌 낼지 조금 걱정이 된다. 에어컨을 켜고 자기에는 아직 어색해 창문을 열어젖혀 보지만, 한여름 밤만 되면 더 기승인 도시의 소음을 벗어날 재간이 없다.
그중에도 특히 오토바이 소음은 짜증 유발이나 수면 방해 등 인간의 심리·생리적 요소에 부정적 영향이 크다. 안 그래도 숙면이 어려운 한여름 밤, 허공을 찢을 듯 울리는 굉음은 시민에게 ‘한밤의 테러’와 다름없다. 더욱이 해수욕장이 많은 부산은 매년 여름이면 오토바이 굉음과 폭주로 인한 고통이 가히 전국 최고다.
민원에 견디다 못한 부산 해운대구가 직접 국민청원으로 문제를 제기한 게 벌써 2년 전이다. 그사이 다른 지자체들도 뜻을 같이해 정부에 오토바이 소음 규제 강화를 요청했다. 전국적인 움직임에 전담 부처인 환경부도 작년 3월 이륜차 소음 규제 강화 발표로 화답했다. 이 사례는 지자체의 문제 제기에 정부가 호응한 좋은 본보기로 회자했다.
그러나 끝내 현실 정책으로 채택되는 데는 실패했다. 최근 국무조정실 규제개혁위원회가 환경부의 소음 규제 강화 시행규칙 개정안에 대해 재검토 의견을 밝힌 것이다. 30년 만에 오토바이 배기소음 기준을 강화하려던 환경부의 계획은 규제개혁위에 막혀 무산되고 말았다. 부산의 선도적인 노력으로 정부의 30년 묵은 정책을 바꿀 기대에 부풀었던 시민으로서는 매우 아쉽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계속 오토바이 소음에 대책 없이 시달려야 하는 시민들로서는 규제개혁위의 이번 결정이 정말 서운하고 야속하게 느껴진다. 굉음의 고통이 도시 안전은 물론 시민 안녕까지 해치고 있는 지경임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규제개혁위가 단번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싶다.
환경부가 1993년에 마련된 이륜차의 배기소음 기준 강화에 나선 것은 이 기준이 지금 현실과 맞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코로나 사태로 배달 용도 등 이륜차가 크게 늘면서 소음 민원이 급증했다. 정부로서도 더는 이런 상황을 놔둘 수 없게 된 것이다.
환경부는 현행 102~105㏈인 오토바이의 배기소음 허용 기준을 86~95㏈로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륜차가 정지 상태에서 출발하거나, 저속에서 고속으로 갑자기 속도를 높일 때 배기소음 피해가 가장 크다는 점을 고려했다. 강화된 기준을 이륜차 제작 단계부터 적용해 근본적으로 소음 피해를 줄인다는 방침이었다.
규제개혁위는 평온한 생활 환경을 조성하려는 명분은 인정하면서도 국제적인 흐름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지자체가 이륜차 소음을 단속할 수 있는 다른 근거가 있는 상태에서 환경부의 추가 규제는 지나치다고 보았다. 소음 기준 강화에 따른 운전자들의 반발 요인도 감안했다.
규제개혁위의 이런 판단에 일면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비춰 본다면 다소 한가한 결정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규제개혁위의 지적처럼 지금 지자체가 주거 지역에서 운행되는 이륜차를 단속할 근거가 있기는 하다. 환경부가 작년 10월 ‘이동소음 규제 지역’ 내에서 배기소음 95㏈을 넘는 이륜차를 단속 대상에 포함한 조치가 그것이다. 지자체가 자체 고시를 통해 단속 지역과 시간을 정하면 된다. 이 범위 안에서 소음이 큰 이륜차의 운행을 제한할 수 있고, 위반 대상엔 과태료를 물린다.
그러나 현재 지자체의 행정력으로 이를 실행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환경부 방침에도 지금까지 자체 고시를 마련한 지자체는 경기도 광명시가 유일하다. 고시 제정 절차를 시작한 곳도 충남 천안시와 충북 청주시 정도다. 고시를 이미 만든 광명시도 실제 단속은커녕 아직 구체적인 계획도 없다고 한다.
단속에 나설 인력과 장비 확보의 한계 등 행정력이 제한된 지자체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굉음의 오토바이를 단속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또 지자체 간이나 경찰, 한국교통안전공단 등과의 협조 체계 마련도 여전히 요원하다. 게다가 이륜차 운전자들은 이동소음 규제 지역 내 운행 제한·금지 조치에 대해 소송까지 할 태세다. 이런 마당에 환경부의 소음 기준 강화 계획까지 물거품이 됐다. 굉음의 이륜차 운전자들이 혹 정부와 지자체에는 자기들을 단속할 실질적인 수단이 없다고 여기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시민으로서는 한여름 더위만큼 답답하고 짜증 나는 상황이다. 정부가 개선안을 더 찾아보겠다고는 했지만, 시민들이 올여름에도 오토바이 굉음에 잠 못 드는 밤을 면하기는 어렵겠다.
2023-06-2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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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도마뱀 꼬리 자르기와 탈당 행진곡
예전 동남아시아 국가의 한 숙소에서 벽에 붙어서 오르내리는 도마뱀 두 마리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저절로 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아예 침대 밑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직원의 말에도 밤새 잠을 설쳐야 했다. 사실 대부분의 도마뱀은 사람에게 해가 없다고 한다. 이전엔 우리나라 들판이나 집 마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특유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도마뱀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정치권에 연일 도마뱀이 입길에 오르내린다. 도마뱀과 꼬리 자르기가 한 세트로 묶여 통째 유통된다. 최근 김남국 의원이 가상화폐 보유·거래 의혹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자, 국민의힘에서 도마뱀의 꼬리 자르기에 빗대 민주당의 도덕성과 진정성을 거세게 공격하고 있다.
김 의원이 자초한 의혹의 진실 여부야 관련 기관에 맡겨 두더라도, 또 국민의힘의 비난이 아니더라도, 국회의원의 탈당은 이제 완연히 하나의 ‘정치 일회용품’이 됐다. 여기에 무슨 정치적 견해차이나 지향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소속 정당과 자신의 이해만 맞는다면 이런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민주당은 김 의원 탈당으로 당과의 연계성을 차단할 수 있고, 김 의원은 당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진다는 모습만 연출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 의원 스스로 “잠시 떠난다”라고 한 것처럼 복당은 암묵적으로 이미 탈당 속에 포함돼 있다. 이런 장면을 국민이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러니 누굴 바보로 아느냐는 말이 안 나올 리가 없다.
도마뱀의 잘린 꼬리가 별 탈 없이 나중에 온전히 재생될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요란한 탈당의 행진곡은 응당 복당의 변주곡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일은 민주당에 예삿일이 됐다. 탈당도 아무렇지 않고, 뒤의 복당은 더 아무렇지 않다. 이러다 탈·복당 무감각의 당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최근 사례를 보면 돈 봉투 의혹으로 탈당한 윤관석·이성만 의원과 송영길 전 대표가 있다. 모두 탈당은 했지만, 역시 복당의 실꾸리까지 자르고 나가지는 않았다. 헌법재판소의 위법 판결에도 꼼수 탈당 1년 만에 복당한 민형배 의원,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자진 탈당한 뒤 4개월 만에 복귀한 양이원영 의원도 모두 복당의 실꾸리를 동아줄처럼 품고 있다가 되돌아왔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최근 최고위원 문제로 국민의 눈총을 받고 있는 점은 야당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오십보백보 정도다. 그러나 헌법 근거를 바탕으로 온갖 제도적 혜택을 누리는 국회의원이 자기로 인해 벌어진 의혹 모면을 위해 탈·복당의 곡예를 부리고, 소속 당은 이를 무슨 큰 결단인 양 여기는 모습은 민주당 쪽이 더 많다. 여야가 이처럼 서로 뒤질세라 꼴불견의 행태만 벌이고 있으니, 모두 지지율이 바닥이다. 지지율만 보면 제1, 2당이 맞나 싶다. 국민들이 선거구제 개편을 통한 국회의원 정수 증가에 그토록 반대하는 심경을 알 만하다.
국회의원의 탈당을 빗대 도마뱀 꼬리 자르기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사실을 알고 나면 적어도 우리 정치권은 함부로 이를 입에 올려선 안 될 것 같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필살기라고 한다. 한 번 잘린 꼬리는 다시 생기더라도 원형처럼 재생되지 않고, 또다시 자를 수도 없다. 또 잘린 꼬리로 인한 몸의 전체 균형 상실로 운신에 많은 제한을 받아 오히려 천적의 위험에 더 잘 노출된다고 한다.
단 한 번의 위기 탈출을 위해 앞으로 예상되는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결단할 수밖에 없는 처절함이 도마뱀의 꼬리 자르기에 있다. 당장의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헌신짝 버리듯 쉽게 탈당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당을 되풀이하는 정치권의 행태와는 차원 자체가 다른 행위다.
여야 할 것 없이 국민의 속만 뒤집어 놓은 행태가 잇따르면서 국민들 사이에 정당과 국회의원의 특권적 위상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강하게 이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적잖은 설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정당과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도는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런 정치권에 현재와 같은 특권적인 위상과 혜택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한 의구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민의 신뢰도나 역할에 비해 과도한 대접을 손볼 때가 됐다는 공감대는 지금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도 정당과 의원들의 헛발질은 그치지 않는다. 마치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모습이다.
정치권의 시계는 벌써 다음 4·10 총선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시계 자체를 바꿀 태세다. 도마뱀의 필살기처럼 내년엔 국민의 대대적인 정치인 꼬리 자르기가 행해질지 모른다.
2023-05-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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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빚 앞에 장사 없다
‘가을 빚에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갚을 형편이 되지 않는 데도 일단 다가오는 가을에 있을 수확물을 염두에 두고 빚부터 내고 본다는 뜻이다. 또는 추수철인 가을에는 빚을 내기가 쉬우므로 빚부터 얻어서 분수에 맞지 않게 흥청망청 쓴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어쨌든 자기 분수나 앞으로 예상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빚에 의지하는 것으로, 지금 당장의 안일함에 취해 미래의 부담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꼬집는 의미가 강하다.
빚에 관한 속담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자기 분수를 넘는 빚은 경계의 대상으로 치부한다. 나라를 운영하든, 가정을 꾸리든, 큰 차이가 없다. 물론 국가를 운영하는 경우에는 일부러 빚을 내야 할 때도 있고, 또 빚이 없는 상태가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빚 앞에 장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은 국가나 가정이나 다르지 않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2022년 국가결산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나랏빚에 대한 걱정이 많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순채무(중앙정부에 대한 채무는 제외)가 사상 처음 1067조 원으로, 1000조 원을 넘었다는 소식에 많은 국민이 놀랐다. 1000조 원은 보통 사람의 수치 감각으로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규모다. 국가채무가 2018년 680조 원에서 4년 만에 1000조 원을 돌파하면서 정치권에선 또 책임 공방이 불거졌다.
대략적으로는 코로나19를 겪었던 지난 3년간 내수 진작과 전 국민 대상의 지원금 확보를 위해 수차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확장재정 영향으로 나랏빚이 많이 늘어난 탓이다. 코로나 시기 기댈 곳 없었던 소상공인 지원과 내수 활성화를 위한 확장재정의 필요성은 당시 세계적인 추세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어느 정부라도 코로나와 같은 비상시국에는 비상한 정책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1000조 원의 국가채무가 비록 놀라운 규모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 정책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다. 비상한 국면이 지나면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와야 한다. 더구나 중장기적인 관점을 놓쳐서는 안 되는 국가재정에 관한 문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지난해 국가채무가 1000조 원을 넘었다는 것보다 더 우려되는 점은 채무의 증가 속도다. 지난해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9.6%였는데, 이는 처음 40%를 넘어선 2020년(43.8%) 이후 불과 2년 만의 일이다. 작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현재처럼 조세·재정개혁이 없으면 최악의 경우 국가채무 비율은 2060년께 GDP 대비 230.9%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금보다 나랏빚이 약 5배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빠른 채무 증가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국제신용평가사들은 물론 국내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나랏빚 1000조 원을 넘어선 우리나라는 지금도 분당 1억여 원씩 빚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하루에 1800억 원가량으로 올해만 60조 원이 증가할 예정이다. 향후 4년간 이자만 1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국가채무 제어 장치의 필요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제도적으로는 재정준칙 마련이 첫손에 꼽힌다. 그런데 현재 재정준칙 법제화 내용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8개월째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다. 재정건전성을 판단하는 지표인 정부의 관리재정수지(통합재정수지에서 4대 사회보장성 기금 수지를 제외한 것)에서 적자 한도를 GDP의 -3%로 제한하고, 부채 비율이 GDP 대비 60%를 넘기면 적자 비율을 -2%까지 낮추는 게 핵심이다. 여야 모두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치적 이해에 얽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파른 국가채무 증가 속도를 고려하고, 또 대부분의 선진국이 재정준칙 아래 엄격하게 재정을 운용하고 있는 현실에 비춰 보면 이 제도의 도입을 더는 미룰 수 없다. 더구나 내년 총선 등 정치 상황에 재정이 휘둘리지 않으려면 실효성과 구속력을 갖춘 제도 도입은 불가피하다.
일부의 우려처럼 재정준칙의 도입이 경기 침체 국면에서 정부의 확대재정 요구와 꼭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경기 부양 수단으로 국가재정의 활용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급속한 나랏빚 증가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어떠한 제도적 제어 장치도 없이 운용되는 국가재정은 필연적으로 방만하게 흐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많은 나라에서 그 사례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돈을 마음껏 쓰는 일은 일견 즐겁고 폼 나는 일이지만, 언제나 그 후폭풍이 가혹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상에 빚 앞에 장사 없고, 더더욱 공짜는 없다.
2023-04-1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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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한우 세일 행사 ‘소프라이즈’
며칠 전 전국이 한우(韓牛) 세일 행사인 ‘소프라이즈’로 들썩거렸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도매가격이 크게 떨어진 한우의 ‘소비 촉진’을 위해 최대 5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쇠고기를 판매하는 행사를 벌이면서 전국 곳곳의 판매점이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할인된 쇠고기를 살 수 있는 전국 농협유통 하나로마트에는 개장도 하기 전부터 수백 명의 구매 인파가 몰리는가 하면 개장과 동시에 유례없는 ‘한우 오픈런’까지 벌어졌다.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하나로마트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빚어졌다고 하니, 가히 소프라이즈 열풍이라고까지 부를 만하다. 이달 17일 처음 시작해 3일간 진행됐던 소프라이즈 행사는 23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10일간 또 진행된다. 이어 오는 6~7월, 10~12월 중에도 열릴 예정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흥행 가도가 예상된다.
정부가 이처럼 한우 소비 촉진 행사를 기획한 것은 최근 솟값 폭락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한 전국의 한우 사육 농민들을 돕기 위한 일환이다. 정부에 따르면 올해 전국에서 사육 중인 한우는 역대 최대치인 약 358만 마리로, 2015년부터 연속 7년간 계속 증가세라고 한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당분간 더 지속할 전망이다.
반면 최근 산지 솟값은 사육 두수 증가와 사료비 폭등으로 인한 밀어내기 출하로 지난해 대비 최대 30% 가까이 폭락했다. 사육 농민들의 경영난이 가중되면서 얼마 전에는 이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면서 정부는 어떤 식이든 한우 농가를 돕는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일단 한우 소비 촉진을 통한 해결책을 선택했다. “한우 소비를 촉진시키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런데 며칠 전 진행된 한우 세일 행사를 보면 사육 농민의 어려움은 그동안 한우 소비가 부진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님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전국 판매장에는 할인 소식을 들은 구매자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구매자들은 판매장 앞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곳은 준비한 물량이 금방 바닥났다. 이런 상황에 ‘소비 촉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동안 가격이 너무 비싸 사 먹지 못했을 뿐, 적정한 가격만 된다면 소비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늘 그렇듯 ‘쇠고기 가격의 미스매치’ 현상이 문제였다.
알다시피 한우는 돼지고기, 닭고기와 같이 육류 중 주류로 꼽힌다. 그러나 서민에게 한우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비싼 데다 고급스럽다는 인식이 강하다. 평소 가장 먹고 싶은 육류지만, 자주 마음껏 한우를 먹을 수 있는 국민은 많지 않다. 잠재적인 수요는 항상 차고 넘치나,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여력이 되는 유효 수요층은 한정적인 것이 바로 쇠고기다. 한우 세일 행사 소식에 귀가 번쩍 뜨여 아침 일찍 판매장으로 달려간 수많은 서민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우 수요는 이처럼 흘러넘치기 때문에 굳이 소비 촉진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여건만 적절하게 조성한다면 한우 소비는 가만히 놔둬도 저절로 해결될 사안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지적이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솟값 파동이 일 때마다 제기되는 단골 해결책임에도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없다. 대표적으로 한우 판매의 유통 구조를 꼽을 수 있다. 산지에선 사육 농민들이 사육을 포기할 만큼 솟값 폭락이 극심한 데도, 소비자들은 전혀 이를 체감하지 못한다. 사육 농민과 소비자 사이에 쇠고기 가격의 미스매치 현상을 일으키는 6~8단계의 복잡한 유통 구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가 밝힌 쇠고기 가격 비중에서 농민 몫은 약 52%에 불과하다. 나머지 48%는 유통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일부에선 쇠고기는 가공과 분류 등 처리 과정이 다른 육류에 비해 복잡하고, 일반 식당에서 판매되는 부위도 몇몇 특정 부위에 한정돼 유통 과정에 드는 비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해도 복잡한 유통 구조의 문제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도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산지와 소비자 간 가격 괴리를 줄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또 도매가격의 등락에 따라 소매가격도 함께 변동하는 가격 시스템의 필요성도 자주 거론된다.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대야 하는 지점이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한우 파동을 생각하면 이제 유통 구조 개선은 더는 미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사육 농민도, 소비자인 국민도 모두 피해자로 만드는 구조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번 한우 세일 행사가 바로 그 생생한 실례다.
2023-02-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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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말 사라진 국민, 말 넘치는 정치인
코로나19가 창궐한 지 3년 만에 거리 두기가 없는 설날 연휴를 보냈다. 각자 여건에 따라 마음만 먹으면 예전처럼 가족·친지와 모처럼 얼굴을 맞대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측면과 달리 설날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낀다. 설날 풍경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말은 이미 꽤 됐지만, 이제는 연중 통과의례로 취급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어릴 적 설날 고향을 생각하면,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게 정말 많다. 마음속에 새겨진 ‘고향’은 아늑하지만, 실제로 가 보면 헛헛함을 감출 수 없다. 마을의 옛 모습은 이미 뭉개진 지 오래고, 보이지 않는 어르신들도 많다. 인사하면 반갑게 맞아 주시던 어르신들이 하나둘 떠나면 빈집만 남는다. 같이 놀던 친구들도 타지에서 사느라고 바쁜지, 설날인데도 고향에서 얼굴 보기가 어렵다. 고향이지만 딱히 얘기를 나눌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게 요즘 설날이다.
외형적인 풍경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지와의 대화도 매우 조심스럽다. 설날이라고 형제, 조카들을 만났지만, 마음속에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이 떠오른다. 무심결에 나올지 모르는 껄끄러운 말을 하지 않도록 자기 단속부터 한다. 직장에 다닌다면 연봉이나 결혼 계획을, 이미 결혼했다면 집 장만, 임신 여부 등 질문은 피해야 한다. 아직 중·고교생이나 취준생이라면 성적이나 취업에 관한 사항은 더 금기다.
정치 얘기 역시 금기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정치 얘기는 언제나 가장 만만한 대화의 소재다. 게다가 우리나라 국민은 정치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그런데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정치 얘기가 언제부터인지 서로 피해야 하는 소재가 됐다. 특히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에 괜히 정치 얘기를 꺼냈다가는 지청구를 듣기 십상이다. 여야로 갈려 서로 헐뜯기에만 바쁜 정치판 싸움이 명절 밥상에 고스란히 올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민생과 동떨어진 여야의 정치 싸움이 극에 달한 이번 설날에는 더욱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정치 얘기엔 입을 꾹 닫는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뒤 처음 맞는 설날인 만큼 새 정부의 국정 수행 등 많은 얘깃거리에도 정치 얘기는 달갑지 않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관련 뉴스가 나오면 그사이에 침묵만 흐른다. 괜히 이런저런 말을 꺼냈다가 논쟁으로 이어질까 꺼리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설날 밥상에 모인 국민들의 말마저 사라지게 한 셈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모인 귀한 만남인데도 별달리 서로 주고받을 만한 얘깃거리가 없다. 얼굴만 한 번 쳐다본 뒤 어른들은 대부분 텔레비전으로, 조카들이나 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반면, 정치권의 말은 너무나 많고 복잡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설날에는 특히 여야 정치권을 막론하고 민심 탐방을 명목으로 돌아다니면서 쏟아 내는 말들이 더 흘러넘친다. 하지만 여야 모두 최근의 정치 상황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당리당략에 따른 의도적인 탐방과 분석이어서 편향성이 매우 심하다. 매년 명절 때마다 서로 경쟁하듯이 내놓은 각 정당의 민심 분석이 정작 국민들에게는 큰 반향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다.
올해는 유독 이런 측면이 더한 것 같다. 윤 대통령의 최근 강공 위주의 국정 수행을 두고는 여야 간 가시 돋친 말들이 오간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빈번한 검찰 소환에 대해서도 여야의 팬덤·진영 간 힘겨루기가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분석한 올해 설날 민심 역시 여야의 입맛에 따라 늘 그렇듯이 아전인수식 해석이 대부분이다. 단적으로 국민의힘 소속의 한 의원은 “대통령을 도우라는 것이 설날 민심”이라고 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는 게 설날 민심”이라고 말했다. 이러니 가족·친지들과 마주 앉은 설날 밥상머리에서 정치 얘기가 사라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의 관심사로 떠오른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마찬가지다. 정작 국민들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이 문제가 복잡한 탓도 있지만, 정치권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제도 자체가 관건이 아니라 정치권 자체가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2020년 제21대 총선 당시 ‘꼼수 위성정당’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보통의 국민들은 갈수록 정치에 대한 공개적인 얘기조차 꺼린다. 정작 정치의 주인인 국민은 말을 잃고, 정치인들의 말만 횡행하는 꼴이다. ‘정치의 말’은 이제 정치인의 전유물이 된 느낌이다.
2023-01-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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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부울경, 특별연합 폐지도 각자도생?
지난 10월 부산·울산·경남 광역지자체장들이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을 폐지하고 대신 부울경 초광역 경제동맹 출범과 부산·경남 행정통합 추진을 선언한 지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이 선언으로 메가시티는 출발을 눈앞에 두고 사라지게 됐고, 부울경 지역민은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예정대로였다면 보름 뒤엔 출범할 메가시티 대신 추진하기로 했던 경제동맹은 여전히 실체조차 모호하다. 행정통합 역시 동네 뒷산도 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고산 준봉을 넘겠다는 격이어서 이래저래 지역민의 연말 심사만 꼬이게 한다.
그런 터에 순조로울 것으로 여겼던 특별연합 폐지를 둘러싸고도 최근 마찰음이 잇따른다. 특별연합 폐지 과정에서도 동상이몽인 부울경 지자체의 속마음이 엿보이는 것 같다. 수도권 집중의 폐해가 이미 임계점을 넘어 부울경마저 지방소멸의 소용돌이 속에 허우적대는 상황에서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논란만 분분하다.
부울경 지자체장의 선언으로 일단락된 듯했던 이 문제는 이달 9일 부산시의회의 특별연합 폐지규약(안) 심사보류 의결로 올해 내 해체에 제동이 걸리면서 다시 수면으로 떠 올랐다. 특별연합 폐지는 부울경의 광역의회를 모두 통과해야만 공식적으로 해체되는데, 그 첫 단계인 부산시의회가 한 달간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며 결정을 미룬 것이다. 특별연합 규약을 제정할 때는 다양한 공론화 절차가 있었던 반면, 폐지안 준비 과정에서는 이런 사회적 합의 노력이 부족해 입법의 합리성이 결여됐다는 게 부산시의회가 내세운 이유다.
하지만 지지 여론이 높은 메가시티를 해체하는 데 부산시의회가 맨 먼저 총대를 메고 싶지는 않다는 책임 회피성 보류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결정한) 단체장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왜 시의회에 특별연합을 없애라고 공을 넘기는 것이냐”는 한 시의원의 언급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결국 먼저 나서서 궂은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공은 다음 순번인 경남도의회로 넘어갔는데, 도의회는 정파 간 시각 차이가 큰 상황이다. 무엇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도의원들의 입장이 강경하다. 지난 8일 민주당 소속 도의원 4명의 특별연합 졸속 폐지 규탄과 사수 결의 이후 12일에는 민주당 경남도당 부울경특별연합 추진 특위가 “부산시의회의 결정을 환영하며, 도의회도 특별연합 폐지를 보류하고, 정상적으로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며 도의회를 압박했다.
하지만 압도적 의석으로 도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국민의힘은 15일 본회의에서 폐지 규약안을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효율성을 내세우는 박완수 경남지사와 ‘김경수 업적 지우기’라는 민주당 소속 도의원들의 주장이 맞서면서 정파 간 대립 양상마저 띠었다. 국민의힘이 장악 중인 울산시의회도 16일 본회의에서 폐지 규약안을 처리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경실련이 12일 부산지법에 박형준 부산시장을 상대로 특별연합 대신 추진하기로 한 초광역 경제동맹의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시민합의 과정 없이 특별연합을 파기해 신뢰보호의 원칙을 위배했다는 것이다. 이와 별도로 특별연합 폐지 중단을 요청하는 집행정지 소송도 예고했다.
당초 수도권 집중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주목받던 부울경 특별연합이 3개 단체장의 합의로 폐지 결정될 때부터 예견된 후폭풍이 아닐 수 없다. 기대만큼 실망감도 컸던 지역 여론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법원의 판단이 주목되기도 하고 민주당의 반발도 거세지만, 현재 분위기로선 특별연합을 예전 상태로 돌려놓기는 어렵다. 특별연합의 실행 주체인 3개 단체장이 이미 결정을 내린 데다, 부산시의회의 보류 결정도 사실상 시간 끌기라고 한다면 경남도의회와 울산시의회의 결정을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특별연합 폐지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계속된다면 수도권 집중에 대응할 부울경의 공동 전략 의지마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특별연합 폐지는 그렇다고 쳐도, 초광역 경제동맹과 행정통합 추진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의미 있는 논의가 시작된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구호만 있을 뿐 실행은 전혀 없고, 부울경 지자체 간 엇박자와 각 지자체 내부의 문제만 자꾸 얽혀가는 중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자칫 특별연합, 경제동맹, 행정통합 모두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게 무리가 아니다.
지금은 빨리 현 상황을 정리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인 부울경 지자체장들이 새해에는 어떤 형식을 통해서라도 가능한 실행 방안을 지역민에게 밝힐 책임이 있다. 이대로 간다면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절박한 과제는 정말 구호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2022-12-1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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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또다시 맞이하는 우울한 연말
11월로 들어서면서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또 한 해의 끄트머리가 다가왔음을 느낀다. 매년 이맘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는가 싶다.
연말이면 늘 그렇듯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지만, 올해는 특히 그 지긋지긋한 코로나19 사슬에서 벗어나 예전과 같은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그랬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퍼진 2020년 이후 연말연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올해도 이런 기대는 이뤄지지 못할 듯하다. 지난달 말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인해 예전과 같은 흥겨운 연말연시는 어렵게 됐다. 많은 젊은 목숨이 희생된 마당에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맞지 않는다.
이미 올 연말 회식이나 모임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수개월 전부터 연말 대목을 준비해 온 유통, 호텔, 외식업계도 대형 행사를 전면 중단하고 있다. 11월을 쇼핑 성수기로 만든 블랙프라이데이, 코리아세일페스타, 광군제 등 대규모 온오프라인 행사도 연기 또는 축소됐다. 11일 ‘빼빼로데이’ 역시 마찬가지다. 또 수능 시험을 보는 수험생을 위한 응원 행사나 각종 할인 이벤트도 평소보다 크게 줄거나 아예 취소됐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최대의 축제인 월드컵축구 열기마저 잠재우고 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이 이달 20일로 다가왔지만, 예전처럼 우리 대표팀을 위한 단체 응원은 없다. 대한축구협회가 4일 거리 응원 취소를 이미 결정했고, 2018년, 2014년 월드컵 때 아시아드주경기장 등을 개방해 시민들의 단체 응원을 주관했던 부산시 역시 올해는 계획이 없다.
일말의 아쉬움이 없지는 않겠으나, 국가적인 큰 슬픔을 겪은 뒤임을 감안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긴 코로나19의 터널에서 벗어나 이제야 정상적인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한 많은 국민의 실망감은 마음속으로 삭혀야 할 듯싶다.
이태원 참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올해 연말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드는 요소는 한둘이 아니다.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촉발된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민들의 삶을 움츠러들게 하는 물가 급등, 특히 겨울철을 맞아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서민들의 방바닥을 벌써 싸늘하게 식힌다. 각 가정의 난방·온수 사용량을 계량기로 검침해 부과하는 열요금은 올해에만 벌써 40% 가까이 급등했다. 올해 들어 4월, 7월, 10월에 걸쳐 연속 세 차례나 올랐다. 열요금이 오른 것은 2019년 8월 이후 3년 만인데, 한 해에 또 이렇게 세 차례나 상승한 것도 올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농어촌 등 주택에서 실내 난방용으로 사용하는 등유 가격도 리터 당 지난해보다 무려 50% 가까이 올랐다.
에너지 가격 급등이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해도, 서민들로서는 올겨울 어지간히 춥지 않은 다음에야 보일러를 선뜻 가동하기도 쉽지 않다. 추위에 더 서러운 게 서민들임을 감안하면 올해는 서민들에게 유달리 가혹한 겨울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여기다 다른 생활 물가마저 치솟은 상황이니 이래저래 올해 연말이 더 춥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젠 거의 끝나는가 싶었던 코로나 상황에도 다시 경고등이 켜졌다. 방역 당국에 따르면 최근 주간 일평균 확진자는 4만 명대로 한 달 새 2배 이상 늘었다. 8일엔 54일 만에 최다인 6만 2000여 명을 기록했다. 정기석 코로나19 특별대응단장은 7일 “12월에는 새 변이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유행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계절 특성상 겨울에는 면역력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바이러스는 훨씬 더 많이 창궐하기 때문이다. 사회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어려움이 더하는 지경이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니, 연말연시 분위기가 살아날 리가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불가피성은 인정한다고 해도, 전 국민이 집단적인 우울감에 빠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안전시스템 재구축, 책임자 처벌 등은 당연히 당국이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이와 별개로 정부는 국민의 정신적 일상 회복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애도 기간이 끝났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건 물론 아닐 테다. 또 연말연시를 즐긴다고 해서 희생자를 애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국민적인 아픔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할 기회는 열려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이 올 연말연시를 이런 바탕 위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국가의 책무일 것이다.
2022-11-0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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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메가시티 좌초 땐 부울경은 무엇을 잃게 되나
〈맹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맹자와 양혜왕 사이의 대화는 ‘이익’에 대한 중층적인 시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국시대였던 만큼 당장 눈앞의 가시적인 이익을 바라는 양혜왕에게 맹자는 공의에 바탕을 둔 긴 호흡의 ‘인의(仁義)’로 응수했다. 양혜왕의 단견을 지적하는 쪽도 많으나, 당시 상황에 비춰 보면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 언급할 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 보존이 최우선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양혜왕 입장에선 곧바로 나라에 이익이 되는 방안이 필요했고,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현실을 종식해야 하는 맹자로서는 결국 인의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맹자가 단기 이익을 백안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합당한 명분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맹자와 양혜왕의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의 좌초 위기를 보면서 문득 이 대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년 6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내년 초면 불완전하게나마 첫 출발의 꿈에 부풀었던 메가시티가 좌초 위기에 놓인 것도 결국은 내 몫으로 떨어질 ‘눈앞의 이익’이 원인이다.
지난달 19일 박완수 경남지사는 “부울경 특별연합은 비용만 들고, 실익이 없다”며 불참을 선언하면서 대신 행정통합을 대안으로 내놨다. 일주일 뒤 김두겸 울산시장도 “현재 상태로는 부울경 특별연합에서 울산이 얻을 부분은 거의 없고, 울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도 어렵다”며 역시 메가시티 불참을 선언했다. 경남과 울산 모두 지금 상태로서는 자기들에게 돌아올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지자체장이 거론한 ‘이익’이 메가시티 출범 석 달을 앞둔 현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경남은 서부경남의 소외, 울산은 부산 빨대 효과 등을 많이 우려하는 듯하지만, 여기에 대한 의론은 여전히 분분하다.
그럼에도 두 지자체장은 지금과 같은 수도권 일극 집중을 막기 위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모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이를 연결해 보면 메가시티 중단·불참의 이유로 든 이익이라는 것이 대체로 단기 이익임을 짐작하게 한다. 수도권 집중 완화를 통해 부울경이 기대할 수 있는 중장기 이익보다는 당장 지자체장으로서 존재감을 각인할 수 있는 단기 이익의 확보 여부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임기가 정해진 선출직 지자체장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리스크를 이번 메가시티 사태를 통해 확실하게 실감하는 셈이다.
경남도와 울산시가 이탈을 밝히면서 내년 초부터 특별연합 사무를 시작하려던 애초 계획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게 됐다. 부울경은 물론 전국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메가시티가 이처럼 위기에 처한 모습을 지켜보는 지역민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메가시티라는 공통 목적물이 막판 암초에 부딪힌 것도 그렇지만,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에 쌓인 불편한 감정은 상당 기간 남을 것 같다. 가장 걱정되는 대목은 부울경 상호 간의 신뢰 훼손이다. 아무리 지리·역사적으로 한 뿌리임을 강조하고 현재의 수도권 일극 체제에 대응할 만한 곳으로는 부울경밖에 없다고 자부한다고 해도, 눈앞의 작은 이익 앞에서 이런 것들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는 현실을 이번에 똑똑히 목도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예전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도 저절로 떠오른다. 신공항 입지와 신항 명칭, 물 문제 등 공통 현안을 두고 갈등이 빚어졌지만, 부울경 어디에서도 중재나 화해를 주선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겉으로는 한 뿌리임을 내세우면서도 결국 또 각자도생으로 갈라서면서 생기게 될 상호 간 신뢰 훼손은 부울경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게다가 부울경 메가시티는 순전히 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동력을 씨앗으로 추진된 사안이다. 대한민국에서 수도권에 유일하게 대응할 역량이 있는 곳이라는 자부심과 지역균형발전의 선도자가 되겠다는 대의가 합해져 시작된 만큼 부울경의 자존심과도 직결된 최대 현안이다. 그런데도 지자체장 교체라는 정치적인 변수 앞에서 위기를 맞았다. 앞으로 부울경이 지역의 대형 공통 현안을 놓고 다시 자발적인 동력을 형성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이번 메가시티 좌초 위기가 너무 안타깝고 실망스럽다.
‘부산 빨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수도권 빨대’는 갈수록 온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는데, 부울경은 언제까지 와각지쟁(蝸角之爭)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2022-10-04 [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