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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말 사라진 국민, 말 넘치는 정치인
코로나19가 창궐한 지 3년 만에 거리 두기가 없는 설날 연휴를 보냈다. 각자 여건에 따라 마음만 먹으면 예전처럼 가족·친지와 모처럼 얼굴을 맞대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측면과 달리 설날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낀다. 설날 풍경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말은 이미 꽤 됐지만, 이제는 연중 통과의례로 취급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어릴 적 설날 고향을 생각하면,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게 정말 많다. 마음속에 새겨진 ‘고향’은 아늑하지만, 실제로 가 보면 헛헛함을 감출 수 없다. 마을의 옛 모습은 이미 뭉개진 지 오래고, 보이지 않는 어르신들도 많다. 인사하면 반갑게 맞아 주시던 어르신들이 하나둘 떠나면 빈집만 남는다. 같이 놀던 친구들도 타지에서 사느라고 바쁜지, 설날인데도 고향에서 얼굴 보기가 어렵다. 고향이지만 딱히 얘기를 나눌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게 요즘 설날이다.
외형적인 풍경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지와의 대화도 매우 조심스럽다. 설날이라고 형제, 조카들을 만났지만, 마음속에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이 떠오른다. 무심결에 나올지 모르는 껄끄러운 말을 하지 않도록 자기 단속부터 한다. 직장에 다닌다면 연봉이나 결혼 계획을, 이미 결혼했다면 집 장만, 임신 여부 등 질문은 피해야 한다. 아직 중·고교생이나 취준생이라면 성적이나 취업에 관한 사항은 더 금기다.
정치 얘기 역시 금기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정치 얘기는 언제나 가장 만만한 대화의 소재다. 게다가 우리나라 국민은 정치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그런데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정치 얘기가 언제부터인지 서로 피해야 하는 소재가 됐다. 특히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에 괜히 정치 얘기를 꺼냈다가는 지청구를 듣기 십상이다. 여야로 갈려 서로 헐뜯기에만 바쁜 정치판 싸움이 명절 밥상에 고스란히 올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민생과 동떨어진 여야의 정치 싸움이 극에 달한 이번 설날에는 더욱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정치 얘기엔 입을 꾹 닫는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뒤 처음 맞는 설날인 만큼 새 정부의 국정 수행 등 많은 얘깃거리에도 정치 얘기는 달갑지 않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관련 뉴스가 나오면 그사이에 침묵만 흐른다. 괜히 이런저런 말을 꺼냈다가 논쟁으로 이어질까 꺼리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설날 밥상에 모인 국민들의 말마저 사라지게 한 셈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모인 귀한 만남인데도 별달리 서로 주고받을 만한 얘깃거리가 없다. 얼굴만 한 번 쳐다본 뒤 어른들은 대부분 텔레비전으로, 조카들이나 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반면, 정치권의 말은 너무나 많고 복잡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설날에는 특히 여야 정치권을 막론하고 민심 탐방을 명목으로 돌아다니면서 쏟아 내는 말들이 더 흘러넘친다. 하지만 여야 모두 최근의 정치 상황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당리당략에 따른 의도적인 탐방과 분석이어서 편향성이 매우 심하다. 매년 명절 때마다 서로 경쟁하듯이 내놓은 각 정당의 민심 분석이 정작 국민들에게는 큰 반향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다.
올해는 유독 이런 측면이 더한 것 같다. 윤 대통령의 최근 강공 위주의 국정 수행을 두고는 여야 간 가시 돋친 말들이 오간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빈번한 검찰 소환에 대해서도 여야의 팬덤·진영 간 힘겨루기가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분석한 올해 설날 민심 역시 여야의 입맛에 따라 늘 그렇듯이 아전인수식 해석이 대부분이다. 단적으로 국민의힘 소속의 한 의원은 “대통령을 도우라는 것이 설날 민심”이라고 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는 게 설날 민심”이라고 말했다. 이러니 가족·친지들과 마주 앉은 설날 밥상머리에서 정치 얘기가 사라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의 관심사로 떠오른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마찬가지다. 정작 국민들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이 문제가 복잡한 탓도 있지만, 정치권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제도 자체가 관건이 아니라 정치권 자체가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2020년 제21대 총선 당시 ‘꼼수 위성정당’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보통의 국민들은 갈수록 정치에 대한 공개적인 얘기조차 꺼린다. 정작 정치의 주인인 국민은 말을 잃고, 정치인들의 말만 횡행하는 꼴이다. ‘정치의 말’은 이제 정치인의 전유물이 된 느낌이다.
2023-01-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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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부울경, 특별연합 폐지도 각자도생?
지난 10월 부산·울산·경남 광역지자체장들이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을 폐지하고 대신 부울경 초광역 경제동맹 출범과 부산·경남 행정통합 추진을 선언한 지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이 선언으로 메가시티는 출발을 눈앞에 두고 사라지게 됐고, 부울경 지역민은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예정대로였다면 보름 뒤엔 출범할 메가시티 대신 추진하기로 했던 경제동맹은 여전히 실체조차 모호하다. 행정통합 역시 동네 뒷산도 오르지 못하는 사람이 고산 준봉을 넘겠다는 격이어서 이래저래 지역민의 연말 심사만 꼬이게 한다.
그런 터에 순조로울 것으로 여겼던 특별연합 폐지를 둘러싸고도 최근 마찰음이 잇따른다. 특별연합 폐지 과정에서도 동상이몽인 부울경 지자체의 속마음이 엿보이는 것 같다. 수도권 집중의 폐해가 이미 임계점을 넘어 부울경마저 지방소멸의 소용돌이 속에 허우적대는 상황에서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논란만 분분하다.
부울경 지자체장의 선언으로 일단락된 듯했던 이 문제는 이달 9일 부산시의회의 특별연합 폐지규약(안) 심사보류 의결로 올해 내 해체에 제동이 걸리면서 다시 수면으로 떠 올랐다. 특별연합 폐지는 부울경의 광역의회를 모두 통과해야만 공식적으로 해체되는데, 그 첫 단계인 부산시의회가 한 달간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며 결정을 미룬 것이다. 특별연합 규약을 제정할 때는 다양한 공론화 절차가 있었던 반면, 폐지안 준비 과정에서는 이런 사회적 합의 노력이 부족해 입법의 합리성이 결여됐다는 게 부산시의회가 내세운 이유다.
하지만 지지 여론이 높은 메가시티를 해체하는 데 부산시의회가 맨 먼저 총대를 메고 싶지는 않다는 책임 회피성 보류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결정한) 단체장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왜 시의회에 특별연합을 없애라고 공을 넘기는 것이냐”는 한 시의원의 언급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결국 먼저 나서서 궂은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공은 다음 순번인 경남도의회로 넘어갔는데, 도의회는 정파 간 시각 차이가 큰 상황이다. 무엇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도의원들의 입장이 강경하다. 지난 8일 민주당 소속 도의원 4명의 특별연합 졸속 폐지 규탄과 사수 결의 이후 12일에는 민주당 경남도당 부울경특별연합 추진 특위가 “부산시의회의 결정을 환영하며, 도의회도 특별연합 폐지를 보류하고, 정상적으로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며 도의회를 압박했다.
하지만 압도적 의석으로 도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국민의힘은 15일 본회의에서 폐지 규약안을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효율성을 내세우는 박완수 경남지사와 ‘김경수 업적 지우기’라는 민주당 소속 도의원들의 주장이 맞서면서 정파 간 대립 양상마저 띠었다. 국민의힘이 장악 중인 울산시의회도 16일 본회의에서 폐지 규약안을 처리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경실련이 12일 부산지법에 박형준 부산시장을 상대로 특별연합 대신 추진하기로 한 초광역 경제동맹의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시민합의 과정 없이 특별연합을 파기해 신뢰보호의 원칙을 위배했다는 것이다. 이와 별도로 특별연합 폐지 중단을 요청하는 집행정지 소송도 예고했다.
당초 수도권 집중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주목받던 부울경 특별연합이 3개 단체장의 합의로 폐지 결정될 때부터 예견된 후폭풍이 아닐 수 없다. 기대만큼 실망감도 컸던 지역 여론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법원의 판단이 주목되기도 하고 민주당의 반발도 거세지만, 현재 분위기로선 특별연합을 예전 상태로 돌려놓기는 어렵다. 특별연합의 실행 주체인 3개 단체장이 이미 결정을 내린 데다, 부산시의회의 보류 결정도 사실상 시간 끌기라고 한다면 경남도의회와 울산시의회의 결정을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특별연합 폐지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계속된다면 수도권 집중에 대응할 부울경의 공동 전략 의지마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특별연합 폐지는 그렇다고 쳐도, 초광역 경제동맹과 행정통합 추진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의미 있는 논의가 시작된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구호만 있을 뿐 실행은 전혀 없고, 부울경 지자체 간 엇박자와 각 지자체 내부의 문제만 자꾸 얽혀가는 중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자칫 특별연합, 경제동맹, 행정통합 모두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게 무리가 아니다.
지금은 빨리 현 상황을 정리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인 부울경 지자체장들이 새해에는 어떤 형식을 통해서라도 가능한 실행 방안을 지역민에게 밝힐 책임이 있다. 이대로 간다면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절박한 과제는 정말 구호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2022-12-1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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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또다시 맞이하는 우울한 연말
11월로 들어서면서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또 한 해의 끄트머리가 다가왔음을 느낀다. 매년 이맘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는가 싶다.
연말이면 늘 그렇듯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지만, 올해는 특히 그 지긋지긋한 코로나19 사슬에서 벗어나 예전과 같은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그랬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퍼진 2020년 이후 연말연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올해도 이런 기대는 이뤄지지 못할 듯하다. 지난달 말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인해 예전과 같은 흥겨운 연말연시는 어렵게 됐다. 많은 젊은 목숨이 희생된 마당에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맞지 않는다.
이미 올 연말 회식이나 모임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수개월 전부터 연말 대목을 준비해 온 유통, 호텔, 외식업계도 대형 행사를 전면 중단하고 있다. 11월을 쇼핑 성수기로 만든 블랙프라이데이, 코리아세일페스타, 광군제 등 대규모 온오프라인 행사도 연기 또는 축소됐다. 11일 ‘빼빼로데이’ 역시 마찬가지다. 또 수능 시험을 보는 수험생을 위한 응원 행사나 각종 할인 이벤트도 평소보다 크게 줄거나 아예 취소됐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최대의 축제인 월드컵축구 열기마저 잠재우고 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이 이달 20일로 다가왔지만, 예전처럼 우리 대표팀을 위한 단체 응원은 없다. 대한축구협회가 4일 거리 응원 취소를 이미 결정했고, 2018년, 2014년 월드컵 때 아시아드주경기장 등을 개방해 시민들의 단체 응원을 주관했던 부산시 역시 올해는 계획이 없다.
일말의 아쉬움이 없지는 않겠으나, 국가적인 큰 슬픔을 겪은 뒤임을 감안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긴 코로나19의 터널에서 벗어나 이제야 정상적인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한 많은 국민의 실망감은 마음속으로 삭혀야 할 듯싶다.
이태원 참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올해 연말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드는 요소는 한둘이 아니다.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촉발된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민들의 삶을 움츠러들게 하는 물가 급등, 특히 겨울철을 맞아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서민들의 방바닥을 벌써 싸늘하게 식힌다. 각 가정의 난방·온수 사용량을 계량기로 검침해 부과하는 열요금은 올해에만 벌써 40% 가까이 급등했다. 올해 들어 4월, 7월, 10월에 걸쳐 연속 세 차례나 올랐다. 열요금이 오른 것은 2019년 8월 이후 3년 만인데, 한 해에 또 이렇게 세 차례나 상승한 것도 올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농어촌 등 주택에서 실내 난방용으로 사용하는 등유 가격도 리터 당 지난해보다 무려 50% 가까이 올랐다.
에너지 가격 급등이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해도, 서민들로서는 올겨울 어지간히 춥지 않은 다음에야 보일러를 선뜻 가동하기도 쉽지 않다. 추위에 더 서러운 게 서민들임을 감안하면 올해는 서민들에게 유달리 가혹한 겨울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여기다 다른 생활 물가마저 치솟은 상황이니 이래저래 올해 연말이 더 춥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젠 거의 끝나는가 싶었던 코로나 상황에도 다시 경고등이 켜졌다. 방역 당국에 따르면 최근 주간 일평균 확진자는 4만 명대로 한 달 새 2배 이상 늘었다. 8일엔 54일 만에 최다인 6만 2000여 명을 기록했다. 정기석 코로나19 특별대응단장은 7일 “12월에는 새 변이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유행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계절 특성상 겨울에는 면역력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바이러스는 훨씬 더 많이 창궐하기 때문이다. 사회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어려움이 더하는 지경이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니, 연말연시 분위기가 살아날 리가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불가피성은 인정한다고 해도, 전 국민이 집단적인 우울감에 빠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안전시스템 재구축, 책임자 처벌 등은 당연히 당국이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이와 별개로 정부는 국민의 정신적 일상 회복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애도 기간이 끝났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건 물론 아닐 테다. 또 연말연시를 즐긴다고 해서 희생자를 애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국민적인 아픔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할 기회는 열려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이 올 연말연시를 이런 바탕 위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국가의 책무일 것이다.
2022-11-0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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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메가시티 좌초 땐 부울경은 무엇을 잃게 되나
〈맹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맹자와 양혜왕 사이의 대화는 ‘이익’에 대한 중층적인 시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국시대였던 만큼 당장 눈앞의 가시적인 이익을 바라는 양혜왕에게 맹자는 공의에 바탕을 둔 긴 호흡의 ‘인의(仁義)’로 응수했다. 양혜왕의 단견을 지적하는 쪽도 많으나, 당시 상황에 비춰 보면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 언급할 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 보존이 최우선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양혜왕 입장에선 곧바로 나라에 이익이 되는 방안이 필요했고,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현실을 종식해야 하는 맹자로서는 결국 인의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맹자가 단기 이익을 백안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합당한 명분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맹자와 양혜왕의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의 좌초 위기를 보면서 문득 이 대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년 6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내년 초면 불완전하게나마 첫 출발의 꿈에 부풀었던 메가시티가 좌초 위기에 놓인 것도 결국은 내 몫으로 떨어질 ‘눈앞의 이익’이 원인이다.
지난달 19일 박완수 경남지사는 “부울경 특별연합은 비용만 들고, 실익이 없다”며 불참을 선언하면서 대신 행정통합을 대안으로 내놨다. 일주일 뒤 김두겸 울산시장도 “현재 상태로는 부울경 특별연합에서 울산이 얻을 부분은 거의 없고, 울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도 어렵다”며 역시 메가시티 불참을 선언했다. 경남과 울산 모두 지금 상태로서는 자기들에게 돌아올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지자체장이 거론한 ‘이익’이 메가시티 출범 석 달을 앞둔 현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경남은 서부경남의 소외, 울산은 부산 빨대 효과 등을 많이 우려하는 듯하지만, 여기에 대한 의론은 여전히 분분하다.
그럼에도 두 지자체장은 지금과 같은 수도권 일극 집중을 막기 위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모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이를 연결해 보면 메가시티 중단·불참의 이유로 든 이익이라는 것이 대체로 단기 이익임을 짐작하게 한다. 수도권 집중 완화를 통해 부울경이 기대할 수 있는 중장기 이익보다는 당장 지자체장으로서 존재감을 각인할 수 있는 단기 이익의 확보 여부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임기가 정해진 선출직 지자체장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리스크를 이번 메가시티 사태를 통해 확실하게 실감하는 셈이다.
경남도와 울산시가 이탈을 밝히면서 내년 초부터 특별연합 사무를 시작하려던 애초 계획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게 됐다. 부울경은 물론 전국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메가시티가 이처럼 위기에 처한 모습을 지켜보는 지역민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메가시티라는 공통 목적물이 막판 암초에 부딪힌 것도 그렇지만,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에 쌓인 불편한 감정은 상당 기간 남을 것 같다. 가장 걱정되는 대목은 부울경 상호 간의 신뢰 훼손이다. 아무리 지리·역사적으로 한 뿌리임을 강조하고 현재의 수도권 일극 체제에 대응할 만한 곳으로는 부울경밖에 없다고 자부한다고 해도, 눈앞의 작은 이익 앞에서 이런 것들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는 현실을 이번에 똑똑히 목도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예전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도 저절로 떠오른다. 신공항 입지와 신항 명칭, 물 문제 등 공통 현안을 두고 갈등이 빚어졌지만, 부울경 어디에서도 중재나 화해를 주선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겉으로는 한 뿌리임을 내세우면서도 결국 또 각자도생으로 갈라서면서 생기게 될 상호 간 신뢰 훼손은 부울경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게다가 부울경 메가시티는 순전히 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동력을 씨앗으로 추진된 사안이다. 대한민국에서 수도권에 유일하게 대응할 역량이 있는 곳이라는 자부심과 지역균형발전의 선도자가 되겠다는 대의가 합해져 시작된 만큼 부울경의 자존심과도 직결된 최대 현안이다. 그런데도 지자체장 교체라는 정치적인 변수 앞에서 위기를 맞았다. 앞으로 부울경이 지역의 대형 공통 현안을 놓고 다시 자발적인 동력을 형성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이번 메가시티 좌초 위기가 너무 안타깝고 실망스럽다.
‘부산 빨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수도권 빨대’는 갈수록 온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는데, 부울경은 언제까지 와각지쟁(蝸角之爭)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2022-10-0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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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은행, 그들만의 리그
먹고사는 게 힘들 때 넋두리처럼 나오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힘든 적이 없었다”는 서민의 한숨이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로 표현되는 요즘 경제 상황은 정말로 일상의 의식주 생활마저 극도로 움츠러들게 한다. 살아남으려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또 졸라매야 하는 지경이다.
그런데 모두가 추운 허허벌판에 서 있는 듯한 이 와중에도 햇볕 잘 드는 따뜻한 곳은 있는 것 같다. 바로 요즘 은행권이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국내 은행들은 금리 상승으로 최고의 호시절을 누리고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이 지난 2년 반 동안 임원들에게 지급한 성과급만 10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2020년 5월을 기점으로 고금리 기조로 전환되면서 갈수록 최고 수익을 경신 중이다. 이런 흐름이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라고 하니, 서민들이 은행권의 성과급 잔치 소식을 듣는 일 역시 당장은 피할 길이 없지 싶다.
많은 성과급을 받는 은행원들이야 “계속 이대로”를 외치고 싶겠지만, 금리 인상 소식이 들릴 때마다 맥이 탁 풀리는 서민으로서는 하루하루 삶이 가시방석이다. 무엇보다 은행권의 성과급 잔치가 손쉬운 이자 장사로 인한 것임을 모르지 않는 상황에선 더 가슴이 아리다. 남다른 경영 수완을 발휘해 이룬 성과가 아니라 남의 돈을 이용해 성과급 잔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금과 대출 금리의 차이인 이른바 ‘예대금리 마진’과 가산 금리를 통한 ‘땅 짚고 헤엄치기 영업’이 은행 성과급 잔치의 기반이다.
성과급 잔치가 국민으로부터 은행권의 노력으로 인정돼 온전히 축하받지 못하는 이유다. 게다가 은행권은 고금리로 인해 서민들이 힘든 처지임을 알면서도 대출금리 인하 요구에 대해선 매우 인색하다. 손쉬운 이자 장사로 엄청난 성과급 잔치를 벌이면서도, 내부 통제 시스템은 엉성해 툭하면 직원 횡령 사건이 터지는 곳이 지금 은행권이다. 이러니 의심과 비판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한다.
오는 22일부터 시행되는 은행의 예대금리차 공시 제도는 이런 은행권의 경직성에 대한 정부의 강제적인 대응이다. 금리 인상기를 맞아 대출 금리는 발 빠르게 올리면서도 예·적금 금리 인상에는 미온적이라는 들끓은 여론을 감안해 금융위원회가 마련한 방안이다. 지금까지 3개월 단위로 공시되던 은행의 예대금리차가 이달부터는 1개월로 당겨져 비교 공시된다. 매달 은행 간 금리 순위가 매겨지는 만큼 금리 경쟁을 유도하면서 소비자들의 알 권리와 선택 권리도 보장하겠다는 취지다.
제도가 시행되는 만큼 정부는 철저한 관리를 통해 금융 소비자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 제도 시행을 앞두고 2%포인트를 넘었던 예대금리차는 조금씩 감소세를 보인다는 분석도 있지만, 확실한 정착까지 금융당국의 적극적인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예대금리차를 낮추기 위해 은행들이 중·저신용자들의 대출 가려 받기에 나설 수도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어쨌든 지금 국민 정서를 고려하면 은행의 예대금리차를 줄이는 데 금융 당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시점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정치권의 움직임도 다르지 않다. 올해 전반기 국회가 종료된 이후 현재까지 대출금리와 관련된 은행법 개정안 발의 건수는 총 7건으로, 이 중 4건이 은행권의 성과급 잔치가 여론을 들썩이게 한 지난달 집중적으로 발의됐다. 대체로 금리 인상기 속 대출금리의 적절성을 금융 소비자들이 판단해 선택할 수 있도록 대출금리의 산정 구조를 공개하라는 내용이다.
은행권에서는 이를 두고 영업 비밀을 공개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반발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은행의 경우 진입이 규제되는 면허(免許)산업인 만큼 일반 기업과 달리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을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은행이 민간 기업이긴 해도, 사용하는 금융시스템은 공공재임을 지적한 것이다. 지난 외환위기 때 은행 파산을 막기 위해 수십조 원의 혈세가 공적 자금으로 투입된 배경이기도 하다. 민간 은행이 벌이는 이자 장사라도 공공성을 벗어나 이뤄질 수는 없다는 의미다. 정부의 최근 방침에 대체로 여론의 힘이 실리고 있는 것도 국민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권이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요구로 더 여론과 멀어지는 듯한 모습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이후 소비자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단축 근무 시간의 정상화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임금은 오히려 더 올려 달라고 하는 은행권에 대해 국민이 어떤 생각을 할지 헤아려야 한다. 은행은 이제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국민의 공공재라는 인식을 해야 할 때다.
2022-08-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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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가덕신공항은 종속변수? 독립변수?
2030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를 위한 민관의 움직임이 한층 체계화하면서 더불어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의 당위성도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하루가 멀다고 관련 뉴스가 쏟아질 만큼 지역을 넘어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모두 부산에 현장을 두고 있지만, 그 파급 효과는 나라 전체에 미치는 대형 국가 프로젝트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과제이기도 한 두 현안은 그 성공 여부가 서로 긴밀히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따로 떼어 놓아도 충분히 별개의 대형 사안이지만, 엑스포 이슈가 급해지면서 한 묶음으로 취급되는 양상이다. 최근엔 엑스포 유치를 위한 전제로 신공항 현안이 활용되는 기류도 보인다.
리야드와 엑스포 경쟁 치열 불구
신공항 개항 시기, 여전히 불투명
조기 개항 확정으로 변수 없애야
허약한 신공항 위상 강화도 필요
건설 과정 불확실성 대두에 대비
흔들림 없는 ‘상수’로 위치 굳혀야
개최지의 항공 접근성은 부산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간 양강 경쟁으로 흐르는 엑스포 유치 활동에 벌써 그 위력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말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70차 파리 총회 이후 판세 분석 결과, 리야드의 강세는 킹칼리드 국제공항의 존재가 중요한 요인으로 알려졌다.
이에 비해 가덕신공항은 아쉽게도 아직 엑스포 부산 유치에 ‘든든한 상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특별법인 가덕도신공항법이 지난해 9월 시행됐고, 정부 재정사업평가위원회를 통해 공항 건설의 예비타당성조사도 면제됐다. 그럼에도 신공항 개항 시기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2030년 엑스포를 위해선 2029년까지 신공항 완공은 기본 중 기본인데,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부산 여론과는 다른 잣대를 갖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지역의 2029년 개항 열망과 달리 정부의 계획은 2030년대 중반 개항이다. 지난 4월 발표된 국토부의 사전타당성 용역 결과에서 제시된 개항 시기는 월드엑스포 이후인 2035년이다. 이 때문인지 지난달 말 공개된 정부의 엑스포 최종 유치계획서에도 ‘2030년 이전 가덕신공항 완공’ 내용은 빠져 지역 여론이 발칵 뒤집어졌다. 현재 국토부와 부산시가 이 문제를 놓고 계속 협의 중이라고 하는데, 명쾌하고 확실한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유치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지역으로선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다.
이 문제는 엑스포 개최지가 결정되는 내년 말 이전에 꼭 결론을 내야 한다. 신공항 조기 개항이 이처럼 계속 변수로 남는다면 엑스포는 기대할 수 없다. 국토부가 정말 다른 생각이 없다면 당장 엑스포 유치에 맞춰 신공항 조기 개항 방안 마련에 착수해야 한다. 그래야 BIE 회원국을 설득하는 데도 힘이 실린다.
이쯤에서 신공항에 관한 또 하나의 단상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가덕신공항은 월드엑스포 유치의 종속 변수일까. 종속 변수라면 엑스포 유치 여부에 따라 신공항의 운명도 결정적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꿈에서라도 이런 상황은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실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비까지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여건에서 대놓고 얘기할 것까지는 없더라도 그렇다고 아예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기에는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 지금부터 여러 가능성에 대처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고려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
신공항 필요성이 제기되고, 특별법 제정과 예타 면제라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부울경 지역민의 좌절과 노력은 형언하기 어렵다. 정치적으로도 진보·보수 정권을 거치는 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덕신공항의 위상은 허약한 게 사실이다. 아직 이를 마뜩잖게 생각하는 수도권주의자와 국토부 마피아의 견제와 어깃장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엑스포 유치에 핵심 선결 요건으로 등장한 신공항의 조기 개항에 여전히 딴지를 거는 듯한 모습을 보면 어떤 때는 섬뜩한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아마 신공항에 대해 언제라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일이 생기면 좋은 먹잇감을 만난 듯 덤벼들지 모를 일이다. 6·1 지방선거 이후 속도전에 나선 듯한 대구·경북의 통합신공항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부산엑스포 유치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인 것은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에 가덕신공항 조기 개항은 반드시 함께 진행돼야 할 필요충분조건이다. 지금 단계에선 두 프로젝트는 한 몸과 같다.
이런 점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신공항 조기 개항을 위한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불의의 가능성 또한 별도의 영역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덕신공항 건설은 어느 한 사안만을 목표로 해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시간적인 영향력은 부울경 100년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가덕신공항의 조기 개항은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 자체로 ‘상수’의 위상을 확보해야 한다. 당장 2030엑스포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그 이후를 위해서도 그렇다.
2022-07-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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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롯데를 한 번 더 믿어 본다?
큰 관심을 끌었던 롯데백화점 광복점의 영업 중단은 하루 만에 끝났다. 지방선거 다음 날인 2일 바로 영업을 재개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속에 남은 찜찜함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영업 정지 하루 전날인 5월 31일까지도 칼자루를 쥔 부산시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했다. 내심 언제, 어떤 매듭으로 끝날지 궁금했지만, 이렇게 하루 만에 일이 술술 풀릴지는 사실 몰랐다. 올해 초부터 경고음을 보내기 시작한 시의 태도가 임시사용 승인 기한이 다가올수록 더 강경하고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업 중단일이자 지방선거일인 1일 오후부터 백화점 임시사용 승인 연장 소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다음 날 시의 공식 발표로 확인됐다. 영업 중단 하루 만에 시와 롯데 사이에 모종의 이야기가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복점 영업 중단으로 3000여 명의 직원과 주변 상권의 타격이 매우 우려됐는데, 그런 걱정이 사라진 것은 잘된 일이다.
광복점 영업 중단 하루 만에 재개
부산시, 롯데타워 진정성 확인 해명
하지만 ‘롯데의 약속’ 의구심 여전
시의 갑작스런 태도 변경도 의아
자금 계획 제시 등 실행 방안 관건
더는 시민 기대 저버리지 않아야
그러나 이와 별개로 핵심인 롯데타워 문제가 어떻게 단 하루 만에 묘수를 찾을 수 있었는지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20년이 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어 줄곧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게 롯데타워 건립 문제다. 광복점 영업 중단 하루 만에 롯데가 시의 완강한 태도를 확 바꿀 만한 계획을 내놨다면, 시는 훨씬 전에 이 같은 강수를 뒀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시민의 지적에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다.
부산시는 지방선거에서 박형준 시장이 압승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롯데와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롯데가 진정성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롯데가 롯데타워의 준공 시점을 예정보다 1년 앞당긴 2025년 말까지 하고, 타워 건립 과정과 완공 후엔 지역업체를 최우선 배려하며,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에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광복점 임시사용 기한을 9월 말까지 한정해 롯데에 대한 견제 장치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고 밝혔다.
롯데와 부산시의 밀고당기기에서 언뜻 시가 판정승한 모양새다. 시는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는 시민을 의식해서인지, 임시사용 연장 조건으로 롯데 측의 진전된 롯데타워 건립 의사를 확인했다는 점을 힘줘 강조하고 있다. 롯데도 타워 건립의 진정성을 보여 주기 위해 그룹 차원의 지원을 약속하며 적극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도 사업 추진 의지를 내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를 온전히 믿기에는 그동안 롯데타워 건립에 쌓인 불신이 너무나 깊다. 당장 시민들 사이에선 20여 년 전의 약속도 백년하청인데, 이번 협약도 별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많다. 일부에선 롯데와 협약 체결일이 바로 지방선거 다음 날임을 지적하면서 롯데의 진정성이 왜 하필이면 그때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시민들은 롯데는 물론 시에 대해서도 무언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가 광복점의 임시사용 승인 기한을 4개월로 한정한 것도 이를 의식한 것이겠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롯데타워에 대한 시의 행정을 미덥지 않아 한다.
열쇠를 쥐고 있는 쪽은 역시 롯데다. 광복점 영업 중단이라는 불을 끄기 위해 롯데가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얘기는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렇다고 이게 롯데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것이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실질적으로 2025년 롯데타워 완공을 위해 롯데가 어떤 조처를 하느냐가 핵심이다. 올 하반기 건축심의 접수, 내년 상반기 건축허가 신청과 같은 행정 절차 이행도 중요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그룹 내부적으로 투자 재원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봐야 한다. 최소한 수조 원의 막대한 사업비가 투입돼야 할 텐데, 아무리 재벌이라고 해도 초기부터 치밀한 준비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룹 차원에서 롯데타워 건립에 얼마의 자금을 투입할지, 그 조달 방법은 무엇인지, 여기에 참여할 계열사는 어떻게 구성할지부터 윤곽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이에 대해 그룹 내부적으로 공유된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중요한 자금 계획이 현재 이런 지경이라면, 광복점 사건 이전엔 롯데타워 건립은 내부적으로 아예 제쳐 놓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롯데의 진정성은 바로 이 부분부터 시민들에게 증명돼야 할 듯싶다.
롯데가 정말 이전과 다른 다짐을 했다면, 이참에 부산 정서에 맞게 화끈하고 시원하게 롯데타워 문제를 마무리해 보길 바란다. 어느 기업보다 더 부산과 얽힌 인연이 많은 롯데다. 부산에서 행한 사업 규모로 보나, 지나간 세월로 보나 이제 부산시민으로부터 ‘우리 롯데’라는 말을 들을 때도 됐다. 시민들 사이에 롯데를 비방하는 말보다 칭찬하는 말이 많아지는 날을 보고 싶다.
2022-06-0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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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일상이 된 합의 파기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부가 어제 출범했다. 역대 어느 때보다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이었지만, 국민의 여망을 안고 대장정을 시작한 새 정부의 앞날이 밝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라도 같을 것이다. 국민의 기대 속에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수행할 새 정부 인사들의 의욕도 충만해 있으리라 생각한다.
새 정부 출범에 발맞춰 국정의 또 다른 축인 국회의 여건도 우호적이라면 금상첨화이겠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처지가 바뀐 더불어민주당과 여당이 된 국민의힘 사이의 협치 실종으로 인한 갈등은 새 정부의 조기 안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난해 국회 법사위원장 교대 약속
최근 민주당 “재검토”, 번복 밝혀
극심한 논란 부른 검수완박 중재안
국민의힘 역시 합의 뒤집은 전례
정치 신뢰성 스스로 해치는 행위
새 정부 출범, 전환 계기 삼아야
인사청문회 이후 당장 제기되는 현안은 오는 7월부터 시작되는 21대 국회 후반기 법제사법위원장 선출 문제다. 21대 개원 때부터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 치열한 힘겨루기의 대상이었던 법사위원장이 다시 양당 갈등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모양새다. 발단은 민주당의 합의 파기 움직임이다.
개원 이후 1년 3개월 만인 지난해 8월에야 상임위원장 진영을 온전히 꾸린 양당은 최대 쟁점이 된 법사위원장을 전반기엔 여당인 민주당이, 후반기엔 야당인 국민의힘이 맡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올해 대선을 통해 민주당이 야당으로 바뀌면서 이를 번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최근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후반기 원 구성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해 기존 합의 파기 방침을 밝혔다.
야당이 된 민주당 입장에서는 정권도 내준 마당에 국회 운영의 실권을 쥐고 있는 법사위원장을 여당인 국민의힘에 넘길 수는 없다고 계산한 듯하다.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으로 통칭하는 검찰개혁 후속 입법을 비롯해 새 정부 견제를 위해서라도 법안의 마지막 관문인 법사위원회를 틀어쥐겠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이유야 어떻든 우리나라 정당이 공식적인 합의나 약속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똑똑히 알 수 있다. 공식 석상에서 서명하고, 언론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리며 철석같이 이행을 공언했더라도 당리당략에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태도를 확 바꾼다. 정치권의 합의는 이행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라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세간의 우스갯소리가 참말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런 합의 파기가 민주당만의 일도 아니다.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은 검수완박 법안을 둘러싼 갈등 국면에서 국민의힘도 국회의장 중재로 민주당과 맺은 합의안을 손바닥 뒤집듯 파기했다. 책임 공방을 놓고 벌어진 여야의 극한 대립은 새 정부의 국정 쇄신 방향은 물론 다가온 지방선거 이슈마저 모두 파묻히게 했다. 국가적 에너지 낭비다. 여기서 다시 검수완박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를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이룬 합의를 나중에 아무렇지 않은 듯 뒤집는 일이 일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숨길 수가 없다. 정치적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예전에 했던 합의를 쉽게 파기한다면 앞으로 그 누구와 맺은 합의나 약속도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정당 간 또는 정치인 간 합의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파기되어선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사회적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위 단계인 정치의 장에서 맺은 합의나 약속은 보통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니, 정치적인 합의나 약속에 대한 신뢰가 허약한 것도 당연하다.
우리 국민들이 여전히 정치인의 합의나 약속에 대해서는 가장 밑바닥의 신뢰성을 보이는 것도 모두 이런 기억에 연유한다. 최근의 일만 보더라도 정치권의 행태는 국민 불신을 자초하는 요인이지만, 정치권이 진지하게 반성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여러 이유가 제기될 수 있겠으나, 우리 정치의 극심한 독과점 현상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 지적이 많다. 소수 정당에 의한 정치 독과점이 극심하다 보니, 선거를 통한 민의의 견제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고한 진영 정치화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선거제도 개편 등 대안이 제기돼도 굳건한 정치 독과점 장벽 앞에서 막히기 일쑤다. 정치의 장에서 합의 파기를 유발하는 요인이 상존하는 구조인 셈이다.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해도 우리 정치가 발전하려면 이를 넘어서야 한다. 정치 상황의 변화무쌍함을 합의나 약속 파기의 구실로 둘러대서도 안 된다. 이는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새 정부는 국가균형발전을 포함해 110개 국정과제를 약속했다. 정치권의 합의 파기 악습이 새 정부의 국정 수행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런 모습은 이미 국회만으로 충분하다.
2022-05-10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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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0일 대통령 집무실의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을 공식 발표한 뒤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반 국민은 물론 정치권도 여야로 갈려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더욱이 문재인 대통령이 윤 당선인의 집무실 이전을 위한 예비비 사용 협조 요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뒤로는 신구 정권 간 힘겨루기 양상마저 띠고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 집무실이 옮겨지는 건 이제 시간문제가 됐다. 당선인의 의지가 워낙 강고한 데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자체에 대해서는 국민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사는 곳에 따라 사고 체계 영향 받아
윤 당선인, 대통령실 이전 이유 제시
‘서울 집무실’ 고정관념도 바꿔야
대통령의 공간은 전 국토가 대상
부산, 광주 등 지역에도 확보 필요
소통 실현은 전 국민이 체감해야
그런데 대통령 집무실 위치에 대해서는 국가 전체의 틀에서 한 번 생각해 볼 때가 됐다. 윤 당선인이 새 집무실을 서울 용산으로 공식 발표하면서 주변 개발 계획 등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는 모양이지만, 서울 바깥의 다른 지역에선 이는 강 건너 불구경에 불과할 뿐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된다는 팩트만 보면 결국 서울 안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위치만 바뀌는 것이다. 무심코 말하는 비수도권, 즉 수도권 바깥 지역에서 볼 때는 지금의 청와대나 새 집무실이 있게 될 용산이나 모두 서울 안으로, 오십보백보다.
당선인이 기존 청와대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수차례나 밝힌 이상 이번 기회에 시야를 좀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나 꼭 서울에서만 대통령이 집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뀔 때가 됐다. 국민과 평소 소통하면서 국민 속에 있겠다는 당선인의 의지 표현이 반드시 서울 시민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 터이다. 집무실 이전 방침에는 공감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속전속결식으로 시간에 쫓기듯 해야만 하는 일인가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선인의 소통 실현은 한 동네가 아니라 전 국민이 대상이어야 한다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집무실 위치가 아니라 소통 실현의 국민 체감이 관건이다. 수도권에만 그치는 소통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만약 당선인이 자신의 강렬한 소통 의지를 집무실 이전을 통해 표현하고 싶다면 먼저 수도권이라는 생각의 틀부터 깨뜨려 보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윤 당선인이 세종 집무실 설치를 거듭 확인하고,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국무회의도 세종에서 열겠다고 밝힌 점은 고무적이다.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이참에 세종 집무실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기류가 많다. 새 대통령이 국민과 실무자들에게 다가가려는 취지를 살리고자 한다면 세종 분원이 앞으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어렵게만 여겨지는 대통령 집무실 이전도 한 번 시도해 보고 나면 다른 곳의 활용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종 집무실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선거 운동 당시 당선되면 세종 집무실을 조속히 설치해 세종시에서 대통령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다 더 추가한다면 새 대통령은 부산, 광주 등 서울과 세종 외에 전국 다른 지역에도 어느 정도 규칙성 있게 머물면서 지역민과의 소통에도 힘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경호나 보안 등 까다로운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미 예전의 권위적인 틀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한 이상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실무적으로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싶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미 윤 당선인이 스스로 명확하게 제시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당선인이 지난 20일 집무실 용산 이전을 직접 발표하면서 언급한 명제다. 어떤 공간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의식 구조나 사고 체계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행동도 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지금 청와대의 구중궁궐과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 의식에 빠져 국민과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한 것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선인이 생각하는 새로운 공간은 당연히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과의 소통이 목적이라면 대한민국 전체가 그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윤 당선인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선거 운동 때 다소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았던 국가균형발전에 대한 의지 과시나 서울의 정치독점 시대 종결 등 다른 국가적 난제 해결에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대통령의 의식 자체야 개인 차원의 영역이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온 나라에 미친다. 당선인의 언급처럼 그런 의식이 공간에 의해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면 그 공간은 이제 지역이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 대선을 통해 표출된 시대와 국민의 요구가 그렇다. 그게 바로 당선인이 대한민국을 바꾸는 관건이다.
2022-03-2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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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의 플러그인] 퇴임 대통령의 귀향이 성공하려면
거리 곳곳에 제20대 대통령 후보들의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선거 운동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후보들의 유세 경쟁도 열기를 더하고 있다. 싫거나 좋거나 간에 내달 9일이면 새 대통령이 결정된다. 그때부터 그는 국내외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귀하신 몸’이 된다. 새 대통령의 선출은 조만간 퇴임 대통령이 한 명 더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행 헌법 체제 이후 지금까지 퇴임 대통령은 모두 6명인데, 오는 5월엔 문재인 대통령도 곧 이 대열에 들어선다. 안팎의 축하 속에 취임하는 새 대통령과 달리 물러나는 대통령은 대체로 차분하게 새로 살 곳으로 떠난다. 퇴임 대통령에 대해 보통 대중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퇴임 이후 살 지역과 ‘사저’로 불리는 집이다. 둘 중에선 집이 더 관심거리였다. 여태껏 서울에만 국한된 거주지보다는 살 집이 더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오는 5월 9일 문 대통령 퇴임 귀향
박 전 대통령도 최근 대구 정착 결정
수도권 일극주의 속 시사점 매우 커
우리 사회·국민에 좋은 본보기 기대
권위 탈피 지역사회에 녹아 들어야
사생활 존중하는 시민의식도 필수
이런 대중의 생각에 균열을 낸 계기가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귀향이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선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퇴임 대통령의 귀향은 국민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로 퇴임 대통령의 ‘탈(脫)서울’은 특히 수도권 일극주의에 질린 지방으로선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물론 퇴임 대통령 한두 명이 지방에 산다고 해서 현재의 공고한 수도권 일극주의가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고향이나 평소 살고 싶었던 지방에서 소소한 일상으로 여생을 보낸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춰볼 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이 퇴임 뒤 경남 양산으로 다시 돌아오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최근 고향인 대구로 귀향을 선택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현직 대통령과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머물지 않고, 지방에서 지역사회 봉사나 연구 활동 등 새로운 영역을 확보한다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와 국민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퇴임 대통령이 단지 육체인 몸만 지방에 있는 게 아니라 예전의 권위를 버리고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지역사회에 녹아 든다면 현직 때의 정치적인 공과와는 별개로 새로운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사례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다. 현직 때의 권위는 내던져 버리고 시골 고향에서 헌신적인 봉사 활동으로 전 세계에 퇴임 대통령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부분의 대통령이 퇴임 뒤 서울을 벗어나려 하지 않은 것도 아마 현직 때의 권위를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냈는데, 어떻게 수도인 서울과 현격한 생활 차이가 나는 지방에서 살 수 있느냐고 여길 수 있다. 또 서울에 있으면 수시로 재임 중 자신이 임명했던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의 인사를 받는 등 폼 나는 전직의 예우를 누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지방에서 외로운 노년을 자초할 것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의 권위로 자신을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가 아니다. 빠르게 탈권위주의로 변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을 누구라도 비켜 갈 수 없는 때가 요즘이다. 문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지방 귀향이 이런 흐름을 앞당기는 마중물이 됐으면 좋겠다.
퇴임 대통령의 성공적인 귀향을 위해서는 주변의 노력도 꼭 더해져야 한다. 주민들과 어울려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퇴임 대통령을 ‘보통의 개인’으로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선거 때나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퇴임 대통령을 찾아가거나, 당파의 존재감이나 세 과시를 위해 떼로 몰려가 언론 매체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개인적인 방문이야 할 수 있겠으나, 최대한 조용히 진행하는 게 좋을 듯하다.
보통 사람의 퇴임 대통령을 보는 일은 결국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일반 국민으로선 퇴임 대통령이 어느 동네, 어떤 집에서 사는지 궁금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지나친 관심은 도리어 퇴임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꼭 보고 싶다면 여러 명이 몰려가 부산을 떨기보다 조촐하게 주변을 감상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퇴임 대통령의 집을 굳이 사저라고 일컫는 것도 이젠 재고해 볼 때다. 시대에 맞지 않고 주민에게 거리감만 느끼게 할 뿐이다. 집의 규모도 앞으로는 좀 서민친화적이었으면 좋겠다. 경호 문제를 고려한다고 해도 지나치게 넓은 대지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집은 서민에게는 사실 철옹성이나 다름없다. 소탈하고 친밀한 퇴임 대통령이 되는 데 철옹성 같은 집은 오히려 방해물이다.
2022-02-22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