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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7월의 화가, 프리다
7월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화가가 있다. 바로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그녀의 작품과 생애가 담고 있는 타오르는 열정은 꼭 여름을 닮았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태어나고 사망한 것은 모두 한여름인 7월이었다. 올해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특히 지난달 멕시코 프리다 칼로 미술관의 알바레스 관장은 한국을 찾아 국립현대미술관 특강, 한국화랑협회 회장 면담, 윤석남 화가 작업실 방문 등을 통해 한국의 현대미술과 여성 화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프리다 칼로에 대한 화제와 찬사, 관심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피카소가 극찬한 천재, 프랑스 루브르가 최초로 작품을 구입한 중남미 예술가, 1984년 멕시코 정부가 작품 전체를 국보로 지정해 국외 반출을 법으로 금지한 화가, 2021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자화상이 412억 원에 낙찰되어 중남미 미술품 최고가 경신…. 바로 그 자화상은 올해 4월 이탈리아에서 개막한 2024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관객을 맞고 있다.
프리다 생전에는 멕시코 벽화 운동을 주도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1886~1957)가 그녀보다 훨씬 더 유명한 화가였다. 프리다는 1939년 프랑스 파리 ‘멕시코전’을 통해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엔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는데, 아마 시대를 앞선 화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940년대 그려진 프리다 작품의 가치는 1970년대 여성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새롭게 평가되기 시작했다.
독일계 사진사였던 아버지는 그녀를 특별히 아꼈고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7년간 그녀의 삶은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 6살 때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의사의 꿈을 품고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끔찍한 교통사고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의사의 꿈을 접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평생 30여 차례 수술을 하고 모르핀에 의존해 살아가야 했던 그녀의 작품에는 고통, 상처와 함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진정성이 담겨 있다. 비평가들이 그녀 작품을 ‘초현실주의’라고 평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작품은 철저하게 ‘현실’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프리다 작품의 주제는 출산, 유산, 낙태, 월경 등 당시 서구 미술계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여성만의 고유한 경험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는 이후 여성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시된 것들이다. 초기 여성주의 운동은 여성들이 그동안 표현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기고백적, 자의식적 작품들이 많은데, 프리다 작품은 이런 초기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프리다 작품은 ‘초현실주의’나 ‘페미니즘’이라는 수식어보다는 대다수가 ‘자화상’이라는 특징으로 더 잘 설명된다. 사실 자화상만을 평생의 주제로 삼고 끈질기게 그린 화가는 흔치 않다.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는 걸작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렘브란트나 고흐도 주요 작품을 그리는 도중 간간이 자화상을 그렸던 것이지, 프리다와 같이 전적으로 자화상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프리다 필생의 예술적 주제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었고 평생 자신을 그리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그녀는 인생의 고비가 올 때마다 자화상을 그려 자신을 돌아보면서 위로와 힘을 얻었던 것 같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평생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얼마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냈는가를 느낄 수 있다.
프리다는 캔버스 작품으로 여성 자아를 표현하고 남편 디에고는 대규모 벽화로 정치적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작품 양식이나 경향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멕시코 전통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예술 세계는 서로 맥이 닿아 있다. 디에고는 11살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해 20대에는 유럽 거장들의 화풍을 익혔다. 멕시코에도 수많은 벽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인기가 있어서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벽화를 주문받아 그리기도 했다.
프리다 칼로의 삶을 잘 이해시켜 줄 영화가 한 편 있다. 줄리 테이머 감독의 영화 ‘프리다’(2002년). 놀랍게도 이 영화의 기법은 프리다 작품의 특징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녀 작품들 모두는 철저히 그녀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 영화는 작품 이미지를 화면 구성에 자주 사용한다. 그림이 화면에 등장하고 그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등장인물이 움직이면서 영화가 전개된다. 또, 역으로 움직이던 인물들과 배경들이 그대로 프리다의 그림으로 변한다. 뜨거운 여름, 절망적인 상황과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빛나는 예술을 통해 삶의 고귀함을 보여준 프리다 칼로를 만나보시길 권한다.
2024-07-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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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문화도시 부산’이 먼저다
부산시는 지난 6년간 인구 증가를 위해 4조 5000억 원을 지출했다. 하지만 부산시 자체가 ‘소멸위험단계’에 들어갔다는 경보가 울렸다. 올 3월 기준으로 부산시는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3%에 달하여 전국 광역시 중 최초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올해 부산 시내 초등학생은 지난해 대비 5700여 명이나 줄었다. 1995년 39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도 30년 만에 60만 명 가까이 줄어들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부산은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중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수도권과 서해안으로 기업 이전이 일어났던 게 이유였지만, 기업이 부산을 떠나기 시작하는데도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1995년 일본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고베항에 집중되던 국제물류가 부산항으로 몰려들었지만 미래 산업 육성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세계 항만 최상위권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글로벌허브나 첨단 산업은 구호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준비와 그에 상응하는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이 있어야 부산이 살아나고, 시민이 누릴 수 있는 문화가 있어야 사람들이 부산에 살 수 있다. 그런데 부산은 지금, 아파트만 짓는다. 최근 협력업체가 100군데가 넘고 수백 명이 일하는 국내 5위의 철강회사가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의 민원으로 부산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부산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국내 100대 기업은 하나도 없고 1000대 기업도 크게 줄어 28개에 불과하다. 부산은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아파트 붐은 전국이 마찬가지겠지만 부산은 경제 규모에 비해 더 심각하다. 이 와중에 부산시가 발표한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 사업’도 결국 아파트를 짓는 일이다. 언론도 그런 현상이 가진 본질은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재개발’이란 선정적인 타이틀로 기사를 올려 사람들의 투기 심리를 부추긴다. 인구가 주는데 아파트 공급이 는다고 수요가 따라 늘어나겠는가? 근본을 제대로 생각하는 도시 전문가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로컬’이나 ‘원도심’ 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은 느낄 수 없다.
정치권은 산업은행 본점 부산 유치 건으로 팽팽한 신경전을 보인다. 산업은행 본점 이전이 부산에 가져다줄 정확한 의미나 아는지 모르겠다. 기업 하나 옮기면 사람들이 자동으로 몰려온다고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경북 경주시는 인구 증가 시책으로 한국수력원자력 본사를 이전했지만 오히려 인구가 감소했다. 직원들은 주중에 홀로 지내다가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단순히 ‘주말 가족’으로 만들고 마는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화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인류의 오랜 생각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고단하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문화적인 충족이다. 내 아이가 다닐 교육 환경도 중요하고 교통 인프라 같은 사회기반시설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적인 환경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 제대로 된 인프라가 없는 부산 영도에 갑자기 5성급 호텔을 몇 개나 짓겠다고 하다가 무산된 일이 있었다.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놀거리와 볼거리 같은 관광 인프라인데 호텔 먼저 만들고 보겠다는 계획이었으니 성공할 리가 없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북항마리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도시, 부산’을 위해 ‘커피 도시’를 이야기하지만 납득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다. 커피 산업으로 어떻게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꾀할 수 있을지, 이를 통해 부산을 어떻게 잘 사는 도시나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하다. 부산에 커피 농장이나 네슬레 같은 기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나라 커피 수입량이 2년 연속 10억 달러가 넘었다는 기사만 봤다. 쇠락하던 부산 영도가 매달 160만 명이 찾는 소위 ‘핫플’로 바뀐 까닭은 빈집을 활용한 복합문화공간 때문이었다. 사례가 있음에도 다른 데서 답을 찾을 이유가 없다. 부산을 살리기에 가장 편하고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문화도시 부산’을 만드는 것이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면, 이제는 조금 이기적으로 되어야 한다. 모든 일에서 부산 사는 사람들이나 부산 기업에 가산점을 주자.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거나 부산에 주소를 갖고 일정 기간 이상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산점을 주자. 지역 인재 양성이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먼저 주는 데서 시작한다. 다른 도시에 살면서 잠시 부산에 들렀다가 이력만 쌓고 떠날 외부인들은 부산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산에 둥지를 튼 부산 사람에게 기회를 먼저 주자.
2024-07-1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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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뜬금없는 부산시립대학원대학
최근 부산시가 부산시립대학원대학 설립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고 밝혔다. 대학원대학이란 특정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원 과정만 두는 대학을 말하는데, 시가 1500억 원을 들여 직접 첨단 분야 대학원대학을 설립해 고급 인재를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첨단 기업을 부산에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시는 연구용역비 3억 원을 투입해 대학원대학의 사업 타당성 조사를 실시할 방침이라고 한다.
물론 시에서 실시하는 타당성 조사는 이 사업을 위해 투입해야 할 유·무형의 비용과 실현되었을 경우 부산에 미치는 직·간접적인 경제 효과 등을 분석하는 조사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범박하게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타당성, 즉 ‘사물의 이치에 맞는 옳은 성질’에 기초하여 부산시립대학원대학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시에서 대학원대학을 설립하려고 하는 이유와 목적이 필자가 보기에 타당하지 못하다. 현재 시의 대학원대학 설립 계획을 보면 대학원대학을 설립하려는 데에만 그 목적이 있지, 어떤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고 어떤 기업을 부산에 유치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는 “첨단산업 분야인 양자라든지, 이차 전지 이런 분야에서…” 등을 언급한 시의 담당 정책관 발언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양자면 양자고, 이차 전지면 이차 전지지 어떤 분야를 하겠다는 계획이 전혀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이다.
가령 “부산이 글로벌 금융허브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미래 금융 기술의 핵심인 블록체인과 관련된 인재를 확보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블록체인 대학원대학을 설립하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배출된 고급 인재를 부산국제금융단지 내 기관에 취업할 수 있게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이들이 지역에 정주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국내외 금융 기관이 스스로 부산을 찾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이유와 목적을 어쩌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의 계획은 무엇을 어찌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원대학을 설립해야겠으니 일단 1500억 원의 예산부터 투입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다음으로 대학원대학의 운영 방법이 타당하지 못하다. 시의 계획대로 첨단 분야의 석학을 초빙해 대학원대학을 설립·운영한다면 최고 수준의 교수 인건비, 최신 실험 장비와 재료 구입비, 연구실 운영비, 학생 장학금, 교직원 인건비와 각종 행정 비용 등에 어마어마한 운영비가 매년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대학원대학 설립을 위한 예산 계획을 살펴보면 총예산 1500억 원 중 건축비가 1400억 원으로 예산의 93%를 차지한다. 그리고 향후 운영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시의회에서 담당 정책관이 대학원대학 운영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는데, 여기에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다. 정책관은 “예산은 국비 사업을 유치하거나 기업에서 주는 연구 과제들을 수행하거나, 이런 식으로 해서 최대한 시비 투입을 줄일 예정이고…”라고 말했다. 시에서 밝힌 대학원대학 설립 목적을 달성하려면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설립 후에는 교수가 알아서 연구 과제를 따오고 알아서 운영하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시는 대학원대학 설립, 더 구체적으론 건물 설립에만 목적이 있고 운영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대학원대학 설립의 기대 효과가 미미하다. 시의 대학원대학 설립 논리는 부산에서 고급 인재를 양성하면 기업이 인재를 찾아 부산에 올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대학원대학 학생 80명이 있다고 첨단 기업이 스스로 부산에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부산에서 돈을 투자해 육성한 인재가 수도권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대학원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 후 수도권으로의 이탈을 막고 계속해서 부산에 정주하도록 할 유인이 필요하나 이에 대한 고민이나 해결 방안은 사실상 없어 보인다. 다만 담당 정책관은 “대학원대학 안에서 연구 과제를 계속 수행할 수도 있기 때문에…”라고 말해 졸업생들이 박사후과정으로 부산에 계속 머물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고학력 계약직 연구원을 양성하여 인재 유출을 막겠다는 게 시가 기대하는 이 사업의 효과라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시립대학원대학 사업은 설립 이유와 목적, 운영 방법과 기대효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에서 타당성을 찾기 어려운 무모한 정책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시는 혈세 낭비가 예상되는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기보다는 관련 예산을 지역 대학에 투자하고, 시 본연의 업무이면서 현재 잘하고 있는 지·산·학 협력에 더욱 충실해야 할 것이다.
2024-07-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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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나체와 속임수
장마 한복판이다. 장마가 끝나면 올해 중 가장 무더운 시간이 우리를 덮칠 것이다. 상반기 동안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여름철 휴가를 맞아 시원하게 씻어 낼 방도를 계획하는 사람들도 많다. 열심히 살았건 그러지 못했건 여름은 어쨌든 우리에게 낭만과 추억을 쌓게 하는 계절이다. 필자 또한 이곳 부산에 살면서 여름에 얽힌 추억이 적지 않다. 아무래도 바다로 유명한 곳이니만큼 해운대나 광안리해수욕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특히 여름밤 민락동 수변공원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앉아 술을 마시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곤 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땐 무슨 고민거리가 그리 많았던지. 지금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마치 세상을 다 짊어진 것처럼 심각했던 날들이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검푸른 여름 밤바다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 앞에서 당장 해결해야 할 일과 안개처럼 자욱하고 불분명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무시로 마음을 흔들던 시절이었다. 취기가 오르면 박인환 시인(1926~1956)의 시구절대로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목마와 숙녀’ 중) 가슴 벅찬 운명의 예감에 몸서리치거나 미친 듯 파도를 몰아치는 바람에 몸을 실어 밤하늘에 휘발되고 싶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다 늦은 밤이나 새벽녘이 되어 자리를 뜰 때쯤이면 엉덩이에 깔았던 신문지며 술병이며 먹다 남은 안주가 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곤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낭만’과 ‘청춘’이라는 허울이 풍광 좋은 도시 수변공간을 헤집고 다니지 않았나 싶다. 젊음은 아직 활짝 열리지 못한 시선으로 한 곳에만 깊이 파고드는 성향을 거느리기에, 우리가 어질러 놓은 고민의 흔적을 미처 살피지 못해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민락동 수변공원 부근에 갈 일이 있어서 그 옛날을 회상했다. 당시엔 수많은 인파가 만들어 내는 소음과 노랫소리, 그리고 더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추태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도 이들 무리 속의 하나였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속내를 들킨 듯 부끄러워졌다.
지난해 7월부터 수영구청이 민락동 수변공원 내 음주 행위를 금지한 이후로 주변 쓰레기 배출량이 크게 줄어 일대가 훨씬 청결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동안 수변공원은 사람들이 붐비는 왁자지껄한 풍경도 좋았지만, 그 반대급부로 각종 소란과 무질서한 음주 행위로 말미암은 추악한 흔적 때문에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수영구청의 과감한 결단으로 수변공원은 깨끗한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반면에 인근 상인들의 볼멘소리도 흘려들을 수는 없다. 수변공원 일대의 음주 행위가 금지되자 자연히 찾는 사람도 적어지고 횟집이 밀집한 주변의 상인들로서는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 달라진 수변공원에 관한 지상파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청결해진 수변공원에 화색이 도는 인근 주민과 청소 봉사자, 그리고 이들과 달리 구청을 원망하는 주변 상인의 인터뷰들이 내심 생각거리를 던졌다. 확인된 바로는, 구청이 결단을 내리기 전부터 상인들에게 영업이익이 발생하는 만큼 청소나 부대 비용을 구청과 상인들이 서로 협조해서 분담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자고 여러 차례 권고했다고 한다. 아울러 오래전부터 광안리 해변의 음주 금지가 수변공원 내 음주 허가와 부딪쳐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었던 터라 구청으로서도 쉽게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시미관과 중소상공인의 현실, 그리고 주민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고차방정식’을 생각하면 관할 구청의 결단과 집행은 어떤 식으로든 잡음을 남긴다는 사실을 민락동 수변공원의 경우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어쨌든 행정기관과 주변 상인 및 주민의 이해와 요청 사이에서 협의 지점을 찾은 결과가 지금처럼 쾌적해진 수변공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에서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을 떠올리게 된다. 멍청하거나 바보 같은 사람 눈에는 절대 볼 수 없다는 재단사의 말만 믿은 나머지 ‘완성된 옷’을 걸치고 거리를 행진했던 임금 말이다. 벗은 몸으로 활보하면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으스대면서 뽐내었던 어리석은 임금님의 정신문화가 불과 몇 년 전 한국 사회의 풍경이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관광객 유입과 이윤에만 눈이 멀었던 지자체와 상인들의 마인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저 동화 속 임금처럼 도시미관 같은 공동체 전체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당장의 이익에만 욕심을 부려 스스로를 꾀었던 우리 모두의 ‘속임수’가 이제는 환하게 벌거벗겨져야 할 때다.
2024-07-0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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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여름휴가와 독서
여름휴가의 일반적 의미는 휴식, 탐험, 그리고 일상생활의 혹독함으로부터의 탈출일 것이다. 이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기는 독서에 빠져들 수 있는 이상적 기회이다. 여름휴가 독서는 단순한 오락적 경험을 넘어서서 인간적 성장을 촉진하고 시야를 넓히며 영혼을 자극한다.
여름휴가 독서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현실과 다른 세계로 우리를 빠져나갈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책은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험과 장소로 통하는 포털이 된다. 특히 소설은 독자를 환상적인 세계, 역사적 전통 또는 이국적인 장소로 안내하여 정신적 휴양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탈출은 독자에게 활력을 되찾게 하여 여름휴가의 육체적 휴식을 보완하는 일종의 정신적 휴식을 제공한다.
책과의 만남이 주는 즐거움은 무한대
인류의 지혜, 공감과 연대 등 귀한 경험
휴식 안에서 자신을 여물게 하는 시간
예를 들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절대 반지(One Ring)’를 둘러싼 인간의 유혹과 선의지(善意志)를 탐험한다. 절대 반지는 가장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데, 이것을 소유하면 남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으니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도 비슷한 개념이 나온다. 목동 기게스는 들판에서 반지 하나를 주웠는데, 반지의 장식 부분을 돌리면 기게스는 자신의 신체가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다. 이 마법의 반지는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막강한 역량을 비유한다. 당신이 이 반지를 획득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기게스는 왕궁으로 쳐들어가 여왕을 유혹하고, 그녀의 도움으로 왕을 살해한 후 자신이 왕이 되었다. 반면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는 절대 반지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반지를 파괴하려는 모험적 여정을 친구와 함께 떠난다.
단순한 탈출을 넘어, 여름휴가 동안의 독서는 개인의 성장과 지적 발달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위인들의 전기, 자기 개발, 철학적 텍스트를 포함한 논픽션 도서는 삶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통찰력과 새로운 관점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김우중의 자서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세계 경영’이라는 거대한 포부의 기업가 정신을 서술한다. 그는 1967년 31세 나이에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 뒤 30년 만에 41개 계열사와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자산 총액 76조 원의 재계 2위 기업을 만들었다.
에픽테토스의 〈어록 담화집(Discourses of Epictetus)〉 같은 철학적 저술은 시대를 초월한 인생의 지혜와 지침을 제공한다. 그의 중심 사상은 통제의 이분법이다.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통제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인생을 잘 살아가려면 먼저 이 둘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사고와 행동, 감정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나의 신체나 나에 대한 타인의 태도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는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고, 통제 불가능한 영역은 관심을 두지 말라고 권유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충고와 반대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그냥 방치한다. 그러나 에픽테토스는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나의 의견이다’라고 지적한다.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서 어떤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있다고 고자질한다면, 보통 사람은 마구 분노하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반응하라고 권고한다. ‘그가 나를 제대로 알았다면 그것 말고도 비난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독서는 또한 공감과 이해를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과 크게 다른 삶과 문화를 경험하여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는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삶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제공하여 독자들이 등장인물의 투쟁과 승리에 공감하도록 돕는다.
독서는 또한 연결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적 활동이 될 수 있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북 클럽은 독자들이 서로의 생각과 통찰력을 공유하며 공동체 의식을 키울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친구 및 가족과 더불어 책에 대해 토론하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뿐 아니라 인간관계가 깊어지는 이점이 있다. 이런 방식의 대화는 독서라는 고독한 활동에 사회적 차원을 더해준다.
여름휴가 독서는 많은 즐거움과 혜택을 제공한다. 소설에서 흥미진진한 상상 속으로 뛰어들거나, 논픽션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해 토론하는 등 여름 독서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독서는 여름휴가를 단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형성하는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2024-06-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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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 핵심은 해양이다
광안대교, 부산항대교, 영도다리를 통해 출퇴근한다. 해운대에서 원도심 자갈치시장까지 부산의 가장 화려한 건물과 오래된 공간을 잇는 세 개의 다리를 매일 오가며 부산의 역사가 여기, 바다 위에 흐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부산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중심에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수도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란처를 제공했고, 전쟁 후에는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며 대한민국 위기 극복의 중심에 있었다.
부산이 가진 다양성과 혼종성은 바다와 같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포용과 억척스러움으로 삶의 밑바닥을 딛고 일어설 용기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전국 7대 광역시에 사는 20~39세 청년들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부산이 꼽혔다고 한다. 문제는 일자리다. 살고 싶어도 청년이 떠날 수밖에 없는 도시, 그게 지금의 부산이다.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도시, 부산’을 만들기 위해 부산시는 글로벌 허브도시 만들기에 돌입했다. 수도권은 뉴욕, 런던, 도쿄 등 글로벌 도시와의 경쟁에 집중하고, 부울경은 상하이, 오사카, 싱가포르, 로테르담 등 항만·물류·해양관광 특화도시와 경쟁해야 한다.
부산이 가진 강점, 해양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동북아시아의 교통 요충지로서 부산은 세계 7위의 컨테이너 항만을 보유하고 있고 해양 산업의 풍부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해운업, 조선업, 수산업, 항만, 물류 등 다양한 해양 관련 산업이 집약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얻은 경험과 노하우는 부산을 글로벌 해양수도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특히 최근 조선업의 부활과 함께 해양 금융, 해양 관광, 해양 과학기술 분야로의 확장이 필요하다. 부산은 해양 학문 연구와 산업기술 혁신을 위한 핵심 시설과 인력을 보유하고 있어 해양 산업의 혁신과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한국해양대학교를 비롯한 부산의 여러 대학과 연구소가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가덕신공항도 중요하다. 가덕신공항은 로지스틱스 인프라를 제공하며 국제적인 비즈니스 활동과 컨벤션 행사에 필수적인 입지를 제공할 수 있다. 항만, 철도, 공항을 연결하고, 해양 기업과 해양 관광 산업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글로벌 허브도시로서 부산의 비전은 단순히 경제적 성장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한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략이 필요하다.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은 전 세계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며, 그들의 이야기가 녹아드는 공간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산이 해양수도로서의 기능을 넘어 인류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품는 글로벌 도시로 발전한다는 뜻이다.
부산시는 글로벌 허브도시 업무의 연관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정부시장·경제부시장 체제에서 행정부시장·미래혁신부시장 체제로 조직을 개편한다. 현재 부산시는 다양한 해양 관련 부서를 운영하고 있지만, 보다 통합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부족하다.
부산의 해양 전략을 총괄하며, 해양 산업, 해양 관광, 해양 과학기술, 수산업 등의 분야를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조율할 수 있는 해양 관련 정책실이 필요하다. 국제 해운 기업 유치, 해양 금융 중심지 조성, 해양 신산업 발굴 등 다양한 정책을 통해 부산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해양 허브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와의 협력, 민간 기업과의 파트너십, 국제 해양 기구와의 네트워크 구축 등을 통합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부산 경제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해양 산업과 수산업의 융합을 통해 더욱 풍부한 경제적 성과를 이루고 다양한 관광 자원 발굴 등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해양·수산 과학기술의 연구와 개발을 촉진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부산은 대학과 연구 기관들을 중심으로 해양 과학기술 분야의 선도적인 연구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미래 지향적인 해양 산업을 육성할 수 있다. 해양 환경 보호, 해양 자원 탐사, 해양 에너지 활용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해양 건축도 빠질 수 없다. 그동안 바다를 매립해 땅을 넓혔다면 이제는 기후위기에 대비한 혁신적인 해양 건축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한다. 해양수도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시에 해양의 비전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 관리될 때 전문성을 가질 수 있다. 부산의 미래는 바다에 달려 있다. 청년이 모이는 도시,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의 핵심은 역시, 해양이다.
2024-06-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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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정상회의를 빛낸 도자 예술
지난달 26일과 27일 양일간 우리나라에서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 일정이 진행되었다. 이는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서 개최된 이래 근 5년 만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11월 개최된 이래 거의 9년 만에 열린 3국 간 정상회의였다. 정상회의 전날인 26일 저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공식 만찬 부대행사로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의 동아시아 문화도시 도자교류전 ‘금바다(金海), 아시아를 두드리다’가 순회 전시로 초청되었다. 한국 중국 일본 각 3명씩 총 9명 도예가의 작품들이 3국 정상들이 착석한 주빈 연단 앞에 전시되었다.
전시 작품들은 한중일 문화교류 행사인 ‘동아시아 문화도시’에 2024년 김해시가 선정됨에 따라 작년과 올해 두 달씩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세라믹창작센터에서 한중일 도예가들이 함께 모여 자국의 도예 역사·문화·기술·재료 등에 관한 교류와 토론 등을 통해 서로 영감을 나누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한국 작가의 작품 속에 중국의 재료가 사용되고, 일본 작가의 작품 속에 한국적인 기법이 혼용되며, 중국 작가의 작품에 일본의 모티프가 담기기도 했다. 2년에 걸친 워크숍과 전시에 참여한 3국 작가들은 총 14명으로,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되었거나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가입된 도시의 출신이다. 세 나라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동아시아 미의식은 ‘평온’ ‘조화’ ‘동(動)과 정(靜)’이라는 세 주제로 나뉘어 전시장에 펼쳐졌다.
한중일 세 나라는 모두 도자 전통의 오랜 역사를 이어 왔다. 중국은 한나라 회도(灰陶)로부터 치자면 2000년, 4세기 월주요(越州窯) 초기 청자부터는 1600년이 된다. 우리나라도 원삼국시대 도기부터 헤아리면 2000년, 고려청자로부터는 1000년의 도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자기를 생산하면서 동양도자사에 합류했지만, 그 이전 조몬 토기 문화가 있었고 가야 도기를 이어받은 스에키 토기부터 말하자면 1500년 도기의 역사가 있다.
세 나라는 음양오행, 노장 사상, 유가와 불교 등으로부터 비롯된 공통의 철학으로부터 각국 특유의 미의식을 가꾸어 왔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저술하여 우리 미술을 최초로 학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한국 미술사학의 선구자인 고유섭(1905~1944)은 한국미의 특질을 간소미와 소박미, 다시 말해 자연성, 자연스러움의 미학이라고 보았다.
한국 민속예술의 우수성을 상찬하고 조선 도자기를 수집했으며, 1924년 경복궁 내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던 일본의 민예·공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한중일 동양 3국 도자기의 민족적 특징을 선·색·형태라는 조형의 3요소로 설명했다.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으며, 한국은 선이 아름답다. 중국 도자기의 형태미는 완벽함을 보여주고, 일본 도자기의 색채미는 깔끔함을 추구하며, 한국 도자기의 선은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한다.
세 나라의 미의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그 근저에는 지속적이고 공통적인 흐름과 방향이 존재한다. 이번 전시는 그 흐름을 ‘도(道)’와 ‘심경(心境)’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명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삶과 행위는 대자연에 귀속되므로, 항상 자연에 순종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를 중시한다. 또 예술 창작은 마음의 문제로, 동양의 미의식은 심경 즉 정신의 예술과 관련된다. 따라서 동양의 미적 사상은 물질과 기술 만능의 가치관이 초래한 인간성 파괴와 상실, 경제개발에서 파생된 자연 훼손에 직면하여 인간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번 워크숍과 전시는 세 나라가 오랫동안 함께 발전시켜 온 도자 예술을 매개로 동양의 예술철학과 미의식을 탐색하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또한 그 작품들이 한중일 정상들이 함께 모여 다시 우호와 협력을 모색하는 정상회의의 공식 만찬장에 초청되는 영광과 행운을 얻었다. 정치구조와 경제체제에 있어서는 크게 다른 세 나라지만, 도자 예술만큼은 3국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예술 작품들은 그 자리를 더욱 친근하고 뜻깊은 순간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은 개관 이래 해외 유수의 도자 관련 기관·대학·미술관·레지던시 등과 협력하며 지속적으로 국제교류 워크숍과 전시를 추진해 왔다. 특히 동아시아 기관들과는 더욱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정례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는데, 이번 정상회담 순회 전시는 그간의 오랜 국제 협력의 성과가 빛을 발하는 감동적인 행사였다. 만찬장에서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와 11월 3일까지 계속되는 동아시아 도자교류전에서 한중일 공통의 아름다움을 만나보시기 바란다.
2024-06-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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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문화 강국을 위한 디테일
일반적인 극장(공연장) 예절은 휴대 전화기를 끄는 것,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 그리고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것과 적절한 시점에 손뼉을 치는 것 등이다. 또한 여기에는 같이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포함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공연장도 변했고, 공연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과거의 공연들은 국가 행사를 위한 것이나 사적으로 소소히 모여 즐기는 것, 일반인들의 거리 공연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종교에 따라 교회나 사찰도 그 중심이 되기도 했다. 산업화 이전 서양에서 음악을 즐기기 위한 전용 장소는 궁궐이나 귀족들의 성이었고, 산업화 이후는 현대식 극장과 개별적인 살롱 등이었다.
현대적 공연예술 산업의 기초를 만든 것은 1732년 설립된 영국 코벤트 가든 왕립극장(로열 오페라 하우스)이다. 여기서 최초로 입장료를 받았다. 당시의 극장은 실내조명을 객석까지 밝게 유지했다. 게다가 공연 도중에도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잡담 등으로 어수선했다. 지금처럼 엄숙주의를 표방하는 장소가 된 것은 니체가 “모든 예술을 하나의 미적 종합체로 만든 위대한 예술의 창시자”라 찬양한 바그너 때문이었다. 1876년 개관한 독일 바그너 극장(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관객이 무대에 집중하도록 공연장의 조명을 모두 끄고 무대만 비추도록 하였다. 오케스트라 또한 무대 아래에 숨겨 관객이 무대 위의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관객들이 어둠 속에서 화장실조차 갈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공연장 예절은 서로 배려하는 마음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 없어
외출할 때 준비물 챙기듯 편하게
클래식 공연장은 소리가 잘 울리도록 설계되어 작은 소리는 물론 미세한 진동까지 전달된다. 더구나 연주자들은 일반인보다 귀가 발달해 무대에서 객석의 사소한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객석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나 사탕 까먹는 소리가 들린다면 관객과 연주자 모두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다. 긴 악보를 외운 채 연주하는 경우나 미세하고 여린 소리를 내는 연주에서 소음이 들리면 연주자는 음악을 놓칠 수도 있고 제대로 감정을 실을 수도 없다. 크고 작은 소리로 비었던 공간을 채워가는 연주를 오롯이 듣는 방법은 고요함이다.
복장은 편하게 입어도 좋지만, 챙이 큰 모자나 지나치게 반짝이거나 바스락거리는 소재는 피하는 것이 좋다. 공연 당일은 기차를 타러 가는 것처럼 공연 시작 전에 도착하자. 만약 늦게 도착했다면 굳이 제자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자. 공연 중에는 안내를 받아 입장했더라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빈 좌석에 앉았다가 중간 휴식시간 때 제자리를 찾아가는 배려심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공연장 에티켓에 관해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공연장에서 관객의 기본적 예절은 우리가 외출할 때 준비물을 챙기듯 차근차근 살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객석에서 손뼉을 치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대개 악장 사이의 박수는 연주의 진행과 작품의 통일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해 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연주의 경우는 지휘자가 지휘봉을 내려놓고 객석을 돌아볼 때 손뼉 치면 된다. 다른 경우는 연주자가 악기에서 손을 내리고 객석을 향할 때 친다. 공연 시작 전 프로그램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도 저도 모르겠다면 꾹 참았다가 연주자가 일어나 객석을 향해 인사할 때 손뼉을 치면 된다. 가끔 마지막 음이 연주되자마자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터져 나오는 ‘안다박수’는 관객과 연주자 모두에게 민폐가 된다. 마지막 음표(쉼표)가 공연장에 울리는 마법 같은 순간을 위해 여유를 갖자.
공연이 감동적이었다면 박수와 함께 환호를 보내도 좋다. 좀 더 외향적인 관객이라면 브라보(남성 연주자), 브라바(여성 연주자), 브라비(전체)를 외쳐도 좋다. 또 커튼콜을 제외하고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리지 말자. 연주자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일이다. 비염이 심하거나 기관지가 약하다면 마스크 착용을 권한다. 기침이 날 때를 대비해 작은 생수 한 병과 종이로 낱개씩 포장된 사탕을 준비하면 좋다. 사탕을 까거나 물을 마시는 시간은 악장과 악장 사이 또는 빠르고 큰 다이내믹을 연주할 때가 적절하다. 물론 기침이 너무 심해지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된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리듬과 화음이 영혼의 내부에 침투해 영혼을 꽉 붙들어 매고 우아함을 주입해 제대로 교육받은 우아한 영혼으로 만든다’고 했으며, 〈논어〉는 ‘시로 감흥을 일으키고, 예로 질서를 세우며, 악으로 인격을 완성한다’고 했다. 음악을 인격 완성의 도구로 본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음악을 즐기는 데는 분명 예절이 필요하다. 공연장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소한 일들이 우리가 문화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됨은 물론이다.
2024-06-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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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대학 축제 단상
5월 한 달 동안 전국 대학가 이곳저곳에서 축제가 열렸다. 부산 지역에서도 각 대학이 축제를 개최했는데 학생들에게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이유는 예년과 달리 뉴진스, 지코와 같은 정상급 인기 가수들을 섭외하여 공연했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 축제는 유명 연예인의 섭외 여부에 따라 축제의 흥행과 성패가 결정된다. 그뿐만 아니라 연예인 섭외를 두고 학교 간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섭외 결과로 학교의 서열이 정해지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들은 ‘유명 연예인 모시기’에 열성을 다한다. 부산대의 대동제 제안요청서 연예인 섭외 부문에는 ‘국내 정상급 가수 3팀, 최정상급 가수 3팀 이상’이라는 항목이 명시돼 있고, 부경대 용역제안서에도 ‘총 6팀 중 국내 정상급 4팀 이상 포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또 이들 유명 연예인을 섭외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사용한다. 부산대의 경우 학생 활동 지원 예산이 4억 7000만 원인데, 축제에 이 예산의 약 60%인 3억 원가량을 쓴다고 한다. 부경대의 경우 축제 예산이 약 2억 원인데 연예인 초청에 축제 예산의 60% 이상을 사용했다고 한다. 즉 20분 남짓한 가수 한 팀의 공연에 수천만 원을 지출하는 셈이다. 물론 이 돈은 직·간접적으로 학생들이 낸 등록금에서 나온다. 1000원의 아침밥을 먹기 위해 오픈런하는 학생들의 돈으로 연예인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은 아닌지, 일회성 행사에 많은 예산을 쓰기보다 학습 시설 개선이나 학생 복지에 예산을 쓰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 연예인 섭외에 사용하는 예산의 규모, 합당성도 문제이지만 유명 연예인 섭외에 의존하는 축제 방식도 문제가 있다. 심지어 올해 3월 한 대학에서는 예산 감소로 유명 연예인을 섭외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축제 자체를 취소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대학 축제의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연예인 중심의 대학 축제가 안고 있는 진짜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생이 주체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순히 축제의 소비자에 머무르고 있다는 데 본질적 문제가 있다.
비단 공연만이 문제가 아니다. 축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학생들은 콘텐츠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에 머문다. 예를 들어 요즘 대학 축제에 가 보면 푸드트럭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이 푸드트럭은 학생들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 업체가 운영하는 것이다. 또 인기 있는 부스는 어떠한가. 다양한 이벤트를 걸고 운영하는 외부 기업 부스에 학생들이 몰린다.
대학 축제에서 학생들이 주체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순한 소비자로 머문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신호이다. 왜냐하면 가장 창의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할 대학의 주체가 수동적, 종속적 역할밖에 못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학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이지 못하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따라서 연예인 중심의 소비지향적 대학 축제를 시대적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대학 축제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살리고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학’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타의 축제와 다른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게임, 가요제, 주점 운영, 연예인 초청 공연 등과 같은 획일적 프로그램은 다른 축제에서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므로 대학 축제에 어울린다고 할 수 없다.
대학의 정체성을 살린 대학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과 콘텐츠 중심으로 축제가 기획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부스를 마련해 주는 수준에서 벗어나 아이디어 공모, 프로그램 기획과 진행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 충분한 재정·행정적 지원을 해 준다면 대학생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프로그램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간 결속력도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대학 구성원 간 화합에서 나아가 지역사회와 하나 되는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대학과 지역사회는 운명을 같이하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대학은 지역사회 주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하고 지역사회는 대학 축제의 성공적 운영을 위한 배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현재의 대학 축제는 축제가 열리는 장소가 대학일 뿐 진정한 의미의 대학 축제라고 부를 수 없다. 유명 연예인 초청 공연과 불꽃놀이에 의존하는 대학 축제는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등록금을 하늘에 터트리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치열한 자기반성과 자정 노력을 통해 대학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축제로 나가야 할 것이다.
2024-05-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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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지역 문학’이 서야 할 자리
지난 14일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공식 초상화가 버킹엄궁에서 공개되었다. 왕비와 화가, 왕실 식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찰스 3세가 직접 장막을 걷어내자, 실물보다 큰 캔버스(268×198cm)에 그린 초상화가 드러났다. 왕이 입은 붉은 웨일스 근위대 제복이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배경에 녹아 사라지듯 했고, 주름진 얼굴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었다. 여기에 한 마리의 나비가 어깨에 내려앉을 듯이 그려져 있었다. 이 초상화에 대한 세간의 평을 차치하면, 근대에 접어들어 위엄이 사라지고 힘을 잃은 현실과 함께 전근대와 달리 권위나 지위를 드러내기보다 인간적인 개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모된 초상화의 흐름을 확인하게 된다.
‘찬란했던’ 대영제국이 유럽에 속한 나라 중 그나마 국제적인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국가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근대 민족주의 국가의 탄생과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냉전 이후 다원화된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제국주의는 영향력을 잃어갔다. 한때 세계의 ‘중심’을 자처했던 영국에서 찰스 3세의 초상화 공개 이벤트가 진행된 것은 왕실의 전통 계승과 함께 상징적이나마 국왕 일가를 대우하는 영국 왕실의 오랜 관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모든 것을 권위와 중심적 사고로 빨아들이면서 다양한 속성과 개성을 단일한 색채로 획일화했던 지난날의 ‘폭력적인 삶의 양식’은 지금 발붙이기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옛 권위와 힘을 빌려 행사하려거나 지난날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빠지기도 한다. 지역 분권주의와 민선 지방자치가 시행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자연스럽게 문학판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산에서 발행하는 시 전문잡지 〈신생〉(도서출판 전망)이 올해 가을호 발간을 기점으로 통권 100호를 맞는다. 부산에서 변변한 시 전문잡지가 거의 없던 때에 창간하여 100호를 내기까지에는 부단한 갱신과 내부 편집진의 노고가 배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생명과 생태 담론을 꾸준히 기획·조명하면서 우리 시대 생태 시의 깊이와 외연을 확장해 왔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는 잡지다. 얼마 전에는 〈신생〉 발간 100호 기념 간담회가 중구 중앙동에 있는 신생연구소에서 열려 의미 있는 논의가 오고 갔다. 그리고 25일에는 기념 심포지엄도 예정되어 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수도권에 문인과 출판사가 집중되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메이저급 출판사와 잡지에 작품이 실려 괜히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야 글 쓰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이념 논쟁이 퇴색해지고 대중문화가 범람하면서 기존의 중앙 집중적인 문학판의 지형이 달라졌다. ‘지역 문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널리 사용되면서 이제는 지역에 기반을 둔 문인과 출판사 및 잡지가 자생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가 조성된 시점도 꽤 흘렀다. 질 높은 콘텐츠와 예산이 부족해서 너도나도 ‘서울 바라기’만 하고 있는 중에도 지역에서 꾸준히 의미 있는 담론과 작품 발굴에 매진해 온 〈신생〉의 100호 발간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 부산에는 〈신생〉 말고도 〈시와 사상〉과 〈사이펀〉 등 몇몇 시 전문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확대되고 다양해진 지역 시인들의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아울러 이전처럼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말고도 여러 지역을 그리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서도 이동하면서 자신의 글쓰기 공간의 확장이 더욱 수월해졌다. 한편으로는 요즘에도 ‘지역’이란 수식어가 의미 있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굳이 지역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제국을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호령하던 시대, 영국 남서부 지역을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써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토머스 하디를 기억할 것이다. 빅토리아 체제의 도덕 관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테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에게 지역이라는 장소는 창작을 방해하는 굴레가 아니라, 오히려 권위와 엄숙함으로 대변되는 ‘중심’을 발가벗기는 무대였다.
찰스 3세의 초상화에서 보듯 불타오르는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얼굴에서 오랜 권위가 주었던 체제와 관념이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 문학은 날로 갱신하고 쇄신하면서 기존의 통념과 관습을 의심하고 반성하는 절호의 마당이요 공간이다. 이런 인식에서 지역 문학이 새롭게 우뚝 서게 될 날을 손꼽아 본다.
2024-05-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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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불교에서 욕망은 과연 나쁜 것인가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암송되는 불경이다. 사찰에서 독송하는 심경(心經)은 한어인데, 여타의 불경처럼 원래는 범어로 적혀 있었다. 심경은 범어로부터 한어로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유명한 3가지 번역본 중 하나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이 649년 옮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암송하는 심경은 현장의 번역본으로, 문장이 아름다우며 간결하다. 그러나 중요한 단어를 빠뜨리고 엉뚱한 문장을 추가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크게 오해하게 했다.
현장 번역의 심경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은 해방의 최고 지혜를 깊이 탐구하면서, 오온(五蘊) 즉 만물이 공허하다는 점을 보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 여기에는 원문에 있는 단어 ‘본성’이 누락되었으며, 원문에 없는 구절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가 추가되었다. 범어 원문은 ‘오온의 본성이 공허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장은 그냥 ‘오온이 공허하다’고 번역했다. 오온은 다섯 개의 덩어리라는 의미이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망라하므로 만물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공허의 원어는 수냐(sunya)인데, 수냐는 ‘결여하는, 없는, 비어 있는’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여기에 여성 명사형 접미어 '타'를 붙여 수냐타(sunyata)를 만들면, 그것은 ‘결여, 제로, 공허’를 의미하는 추상명사가 된다. 보통 수냐타를 공(空)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말이 다소 모호하기 때문에 필자는 공허라고 번역한다.
〈반야심경〉 원본 번역 과정에서 오독
인간의 삶에 욕망과 고통은 불가피
제거하지 말고 에너지로서 수용해야
만물이 공허하다는 것과 만물의 본성이 공허하다는 두 문장은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만물이 공허하다는 문장은 모든 것이 헛되고 쓸데없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많은 불교도들은 돈·명성·권력 등 이 세상의 존재를 무의미하다고 보고 그 욕망을 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심경에서 붓다는 세속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만물의 본성이 공허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본성의 원문은 스바-바바(sva-bhava)이다. ‘스바’는 자기, ‘바바’는 존재라는 뜻이어서, 스바-바바는 독립성이나 본성을 의미한다. 붓다 당시 인도 사상은 만물이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암소의 본성은 우유 생산이다. 반면 붓다는 모든 존재에 본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본성은 비어 있다고 본다. 만물의 본성은 사실상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라 타자가 덧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암소의 젖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문화에서 암소의 본성은 우유 생산이지만, 그렇지 않은 문화는 그것을 다르게 여길 것이다. 비트코인은 본성이 한 개가 1억 원의 가치인지 아니면 1만 개가 피자 두 판의 가치인지, 그것은 대중의 마음에 따라 결정된다. 비트코인 자체는 내재적 본성이 없는 것이다.
현장이 번역에서 추가한 위의 문장은 심경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심경은 고통의 제거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현장이 그 문장을 넣은 이유는 고통에 관한 붓다의 초기 사상이 심경에서 완전히 바뀌었는데 현장이 이 점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붓다의 첫 강연을 기록한 〈전법륜경(轉法輪經)〉에 고통의 원인과 해방에 관한 4개의 위대한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가 나온다. 이 당시 붓다는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라고 보고, 욕망을 제거하여 고통을 없애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갈망한다. 사업에서 성공하고, 선거에서 당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에서 욕망은 자주 좌절하기 때문에 고통이 일어난다. 만약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갈망하지 않았다면 실패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없애려고 욕망을 제거하면 안 된다. 욕망은 삶에 목표와 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으면 인간은 죽어버리고, 욕망이 적으면 인간은 발전하지 못한다. 욕망을 제거하여 고통을 없애는 방식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길을 붓다는 모색해야만 했다.
심경에서 붓다는 본성의 공허 사상을 통하여 고통을 수용하는 자세로 전환한다. 승패는 타자에 달려있다. 승자가 있기 때문에 패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 부유하기 때문에 누구는 가난한 것이다. 누가 패자인지 가난한지 그 성격은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 패배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패자는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심경의 마지막에 붓다는 사성제를 명확하게 부정한다.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 제거의 가능성, 고통 제거의 방법에 대한 이론은 타당성이 없다.’ 붓다는 욕망을 제거하여 고통을 없애는 초기의 해법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이런 변화의 기저에 욕망에 대한 평가의 변화가 놓여 있다. 욕망은 삶의 에너지이므로 제거해서는 안 된다. 욕망이 있는 한 고통은 불가피하니, 고통의 강은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은 죽는 그날까지 고통의 강물에서 헤엄쳐야 한다.
2024-05-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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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부산, 청년의 꿈 키우는 도시로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충이 되어 있더라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레고르 잠자처럼 벌레가 된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이 바뀐 느낌이었다. 지난 3일 부산공업고등학교(이하 부산공고) 개교 100주년 행사를 마치고 난 다음 날이었다. 하루 종일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산공고 창립 100주년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방송과 언론에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전교생 장학금 100만 원’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주위 반응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며 부산공고 출신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갑자기 기울어진 가정 형편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건축과가 있는 학교를 선택해 부산공고에 진학했지만, 늘 가슴 한구석에는 왠지 달리기도 전에 출발선에서 뒤처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고 싶었던 건축 공부를 하며 도면을 그리고 건축 재료 실습과 목공 실습을 하면서도 늘 미래가 불안했다.
학력·학벌 우선시 하는 세태
지역 불균형·인재 유출 초래
기술·열정이 평가 기준 돼야
고교 시절 배웠던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구조 원리나 실습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면서 유용했다. 실습 시간에 익힌 경험은 대학에서 처음 건축을 접한 동기들보다 훨씬 폭넓은 지식으로 연결됐다. 건축사 시험은 단번에 합격했고 지역의 건축사사무소에 취업해 어느덧 대표가 되었다. 그래도 늘 공고 출신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부산공고는 최상위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음에도 그랬다. 2% 부족한 느낌, 결핍된 뭔가가 필자를 규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필자 혼자만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대학교수가 되어도, 굴지의 회사 대표가 되어도, 정치인이 되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공고 출신이라는 사실이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있어서 공고의 역할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서사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경제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공업 또는 기술과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과 노력으로 일궈낸 그들의 기술력은 존중받기보다는 학력과 학벌 차별에 밀려 편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대학 진학과 명문대 입학에 지나친 가치를 두어왔다. 이미 한국사회는, 라캉의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은 지 오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매기고 적성과 무관한 진로를 선택하도록 압박받는 현실은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인재 유출의 악순환을 낳고 있다.
부산공고 개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위의 지점이었다. 지금이라고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 오히려 과거의 명문고라는 인식보다는 시대가 변하면서 더 많은 이유로 움츠러든 후배들의 미래를 응원하고 부산공고 출신임이 자랑스러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후배들이 4만 동문을 믿고 기죽지 말고 당당히 학교를 다녔으면 한다는 의미로 전교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정한식(51회) 선배의 말은 모든 동문들의 마음이었다. 이런 사실을 각 방송과 언론에서 크게 다뤄주어 뜻하지 않게 많은 축하와 격려를 받게 됐다. 부산공고 개교 100주년 기념, 전교생 장학금 100만 원은 후배들에게 보내는 선배들의 애정 어린 박수갈채이자 내일의 희망을 향한 따뜻한 바람이었다.
며칠 전, 부산의 미래를 이끌 청년을 지원하기 위한 청년 플랫폼 (사)청년문화진흥협회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기간 청년 지원 활동을 펼쳐온 부산 대표 기업과 기관, 대학, 언론이 참여해 새로운 청년문화를 싹 틔우고 청년 네트워크를 촘촘히 엮어 청년들이 몰려드는 부산을 만들어 보자는 의기가 모아진 것이라 한다. 부산에 청년 유입보다 더 중요한 건 부산에서 자란 청년이 성장해 부산의 발전에 힘을 보태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학력과 학벌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직업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모든 청년들이 자신의 기술과 열정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한 개인의 내재된 가능성을 북돋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여는 원동력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부산은 학력과 학벌과 무관하게 청년이 꿈꿀 수 있는 도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도시의 미래는 그 품에서 자란 인재들의 손에 달려 있다.
2024-05-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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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봄, 꽃, 두드러기
한 달 전부터 이마 양쪽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맞다. 꽃가루, 알레르기, 두드러기. 봄이면 매년 반복되는 일임에도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게 된다. 눈을 뿌려놓은 듯 환상적인 벚꽃길, 그리고 개나리·진달래에 이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철쭉·이팝나무 꽃길, 그 덕분에 아무런 이유 없이 한 달 내내 출근길이 행복해진다. 꽃 피는 이 봄이 마치 올해의 시작인 듯, 1월 1일에도 무덤덤했던 마음이 한 해의 희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뭐라도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두드러기 올라온 곳이 가려워 긁다가 이내 피가 맺힌다.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내 어머니는 집에 항상 화초를 키우고 멋진 꽃꽂이를 해 두고, 특별한 때에는 늘 꽃다발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장미, 튤립, 백합, 그런 꽃들이 내겐 조금 징그럽게 보였다. 다들 꽃이 아름답다고 좋아하는데 내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대학생 시절, 이런 내 이야기를 들은 원예학과 친구는 꽃이 식물의 생식기니까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과하게 화려한 색깔과 형태가 내겐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이렇게 꽃은 모순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미와 순수’ 혹은 ‘죽음과 허무’ 등 상징
꽃의 양면성은 예술 작품 소재 되기도
삶과 죽음 등 다층적 의미 사색할 기회
미술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가 바로 꽃이다. 그려진 꽃은 현실의 꽃과 달리 알레르기, 공포심을 유발할 일도 없으니 내게 안전하다고 해야 할까.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꽃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고 흥미롭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기독교 종교화에서 꽃은 성서와 연관하여 각각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리스와 백합은 마리아와 함께 자주 그려지는데, 백합은 순수를 상징하고 아이리스는 예수의 수난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뜻한다. 데이지꽃은 어린 예수의 순수함, 민들레는 그리스도의 고난, 아네모네는 슬픔과 죽음을 상징한다. 한국화에서도 꽃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극락세계와 다산을 상징하는 연꽃, 장수를 상징하는 국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 등과 같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서양 고전 회화에서 오랫동안 어떤 상징적 의미를 담은 부수적 소재로 등장해 오던 꽃이 작품의 본격적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네덜란드 정물화에서였다. ‘성상 금지’의 원칙에 따라 종교화를 선호하지 않는 신교도였던 네덜란드인들은 정물화를 선호했고, 정물들에 종교적 상징들을 담았다. 그런데 네덜란드 정물화에 반짝이는 은식기, 유리잔, 음식, 해골 등과 함께 등장하는 꽃은 인생무상(Vanitas) 즉,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경고를 담고 있다. 화려한 꽃, 반짝이는 값비싼 식기들은 언젠가 사라질 존재들로서 인생의 덧없음, 시간의 무상함, 피할 수 없는 죽음 등을 상징한다.
거대하게 확대된 백합이나 칸나꽃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꽃 그림을 그린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도 있다. 그녀의 꽃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중요한 특징이 강조되면서 형태가 단순화된 추상의 특징,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꽃은 생명의 신비와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많은 평론가들은 여성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페미니즘 예술을 주도했던 오키프의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오키프가 회화로 거대한 꽃을 표현했다면, 한국의 최정화(1961~) 작가는 플라스틱 소재의 거대한 꽃 조각을 야외에 설치하여 주변을 이색적인 풍경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지속적으로 꽃을 작업의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그의 꽃은 생과 사의 순환과 그것의 어김없는 이치를 인간이 거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죽음과 인생무상 등의 의미를 담은 꽃 작품을 선보인 것은 바로 앤디 워홀(1928∼1987)이다. 워홀의 ‘꽃(Flowers)’은 사진 잡지 〈모던 포토그래피〉에 실린 히비스커스꽃 사진을 편집해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것이다. 대량 인쇄가 가능한 판화 기술로 제작한 워홀의 꽃은 밝고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 안에는 어떤 존재든 언젠가 시들고 죽는다는 무상함의 정서가 담겨 있다. 1964년 첫선을 보인 꽃 시리즈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워홀의 주요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4년 후 워홀이 총에 맞고 난 뒤에는 이전 같은 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작품에는 점차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등장했다.
지금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 방문하면 워홀의 꽃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흘러가는 만개(滿開)의 계절, 아름다움과 인생무상, 생과 사의 양면적인 의미를 미술 작품을 통해 사색해 보시기를 권한다.
2024-05-0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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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예술로 밥 먹고 살 수 있는 도시
일주일 전, 〈부산일보〉 1면에 ‘과자 한 개, 두부 한 모 사기도 겁난다’는 기사가 실렸다. 시장 물가를 몸으로 체감한 지는 이미 오래다. 부산을 대표하는 서민 메뉴 돼지국밥도 평균 1만 원 시대에 돌입했다. 주 5일 근무하는 직장인의 점심값이 한 달에 20만 원이 넘는 셈이 된다. 생필품 가격도 장난이 아니다. 바야흐로 ‘초고물가’ 시대다. 소비자의 구매 의욕은 줄어들었고 외식은 언감생심이다. 곳곳에 빈 점포가 넘쳐난다. 일자리와 인구의 감소는 도시의 평균 연령만 높이고 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저소득층이 저소득층을 괴롭히는 ‘같은 계급끼리의 자해’가 생길 수도 있다. 프란츠 파농이 말한 ‘수평 폭력’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
1929년 10월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미국 수출에 의존하던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치명타를 입었다. 당시 대미 수출에 의존하던 독일은 600만 명이나 되는 실업자가 발생했다. 독일인들은 그 해결사로 히틀러를 선택했다. 그는 “내가 집권하면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독일 경제를 살려내겠다!”고 외쳤다. 덕분에 1928년 의회 의석이 12석이었던 나치당은 1930년 104석으로 늘어나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이런 히틀러의 선동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만들었다.
2024년 현재 부산은 노인 인구가 약 22%나 되는 초고령화 도시다. 지난 3월 기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에 따르면, 부산의 인구수는 328만 7292명이다. 전월 대비 2109명이 감소했다. 평균 연령은 46.8세이고, 도시의 절반이 50세 이상 중장년층이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총인구는 계속 감소하는 반면 노인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 2035년에는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면 인구 3분의 1이 노인이라는 말이 된다. 더욱이 지역 대학을 졸업하고도 양질의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매년 50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부산을 떠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지난달 부산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5년간 일자리·주거·문화 등의 분야에 약 2조 원을 투자해 “젊고 희망 있는 활기찬 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구체적이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열매만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지만 당장에 해결책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자리 문제는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자리 정책이란 일과성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 정책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사람들이 와서 살게 된다. 제조업이 떠난 부산의 다음 먹을거리는 항만과 공항을 바탕으로 한 물류 산업과 문화 산업이라야 한다. 문화 산업 가운데 공공극장의 제작극장화는 많지 않은 비용으로 일자리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책이 될 수 있다. 문화의 창작(제작)-유통(매개)-소비(향유)가 집약되어 선진국과 같은 문화 산업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시는 연간 약 18조 원에 가까운 예산을 사용한다. 인구가 약 330만 명이나 되는 도시가 공공극장을 일자리 늘리고 사람 모으는 도구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고작 32만 명이 사는 독일 도시 만하임은 1년 예산 2조 원 중 약 640억 원을 투자하여 예술가 250명을 포함해 700명의 공공 일자리를 유지한다. 하물며 독일 중소도시 인구의 10배가 넘고 예산이 8배가 넘는 부산에서 전문화된 조직과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공연장 가동률이 30%밖에 되지 않고, 장소나 임대하는 대관 사업이 공공극장의 주 업무로 전락해서야 되겠는가? 대한민국의 공연 예술가들은 공연만으로 먹고 살 수는 없는가?
대한민국에는 127개의 지역문화재단과 267개의 문예회관이 있다. 공공극장은 공연을 예술적 상품만이 아닌 문화적 공공재로 보고 예술 공연을 제작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부산시는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오페라하우스 개관 준비를 위해 39세 이하 시즌 단원을 공모한다. 해마다 같은 일의 연속이다. 도시가 공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이 부산에서 집을 구하고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공공 일자리를 예술과 문화에서 먼저 시작하자.
부산은 원래 역동적인 도시였다. 지금은 부산 물고기가 고향 물을 떠나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다른 도시보다 부산이 먼저 문화적인 역동성을 보이자. 중앙정부가 못하면 지방정부부터 먼저 시작하자. 미래를 보는 일은 바로 눈앞의 열매만을 노리면 안 된다. 분야별 전문가의 의견을 모으고, 멀리 보고 긴 호흡으로 설계하자. 그래야 세계 각지에서 예술 인재가 모이는 도시, 살고 싶은 도시가 될 것이다.
2024-04-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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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선거 후 폐현수막
선거가 끝나기를 학수고대했다. 아파트 진출입로에 선거홍보 현수막이 수없이 많이 걸려 있어서 운전할 때 지나가는 보행자와 마주 오는 자동차가 잘 안 보였기 때문이다. 선거날 아침 투표를 하고 나오며 ‘이제 내일이면 현수막이 사라지려나’ 기대했건만 어느새 당선감사 인사와 결과승복 현수막이 선거홍보 현수막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현수막을 바라보다 문득 이 많은 선거 현수막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선거 현수막의 처리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선거철에 폐현수막이 어느 정도 발생되는지를 알아보았다. 환경부에 따르면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 260만 장, 1557톤에 달하는 현수막이 수거되었고, 2018~2022년 5년간 선거철에 발생한 폐현수막은 1만 3985톤에 이른다. 특히 올해는 정당 현수막 관리를 강화하는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됨에 따라 폐현수막이 더욱 급증할 것이라고 한다.
해마다 수천 톤, 처리 땐 환경 오염
재활용도 어려워 해결책 마련 시급
입법 통해 선거홍보 현수막 규제하길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이처럼 많은 폐현수막이 발생하고 있는데 폐현수막은 과연 어떻게 처리되고 있을까. 환경부에 따르면 2022년 대선 기간 발생한 폐현수막 가운데 50.5%는 소각, 24.9%는 매립, 24.6%는 재활용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현수막을 소각하거나 매립할 때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된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에 따르면 현수막 1장을 처리할 때 온실가스 6.28kg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는 25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1년 동안 흡수하는 탄소량과 같다. 만약 이번 총선에서 발생한 폐현수막이 지난 지방선거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선거 후 소각 과정에서 약 8164톤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게 된다. 매립 역시 환경을 오염시킨다. 현수막은 대체로 플라스틱 합성수지로 제작되는데 이러한 성분은 매립을 해도 분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폐현수막 재활용을 늘리기 위해 폐현수막 재활용 지원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행정안전부는 지자체에서 수거한 현수막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총 15억 원의 사업비를 지급할 계획이며, 환경부는 폐현수막 새활용(upcycling) 기업과 폐현수막으로 제작 가능한 물품 목록, 생산 일정 등을 안내하여 지자체와 기업 간 연계를 도울 예정이다. 이를 통해 환경오염을 줄이고, 사회적 약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폐현수막 재활용의 취지는 좋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곧 환경오염을 줄이는 올바른 해법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일단 재활용 가능한 현수막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 현수막의 경우 후보자 얼굴 및 비방용 문구 등이 인쇄되어 재활용이 쉽지 않다. 그리고 거리에 오랜 시간 걸려 있어 오염이 되거나 훼손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재활용 가능한 현수막을 찾기가 힘들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재활용 가능한 폐현수막을 선별하여 재활용한다고 하더라도 현수막 원단 및 잉크가 화학제품이므로 생활용품으로 재활용할 경우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 또 재활용품의 디자인과 질이 좋지 않아 장바구니와 같은 폐현수막 재활용 제품을 무료로 제공해도 사람들이 가져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다소 거칠게 비유하자면 폐현수막 재활용은 하나의 쓰레기를 또 다른 모양의 쓰레기로 가공하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폐현수막 재활용은 이른바 ‘플라스틱 좀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재활용을 면죄부 삼아 더 많은 현수막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눈앞의 문제에 대한 근시안적 대책 마련이 아니라 문제의 발생 원인을 살펴 근본적 방지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먼저 환경오염이 문제이므로 환경오염을 발생시키지 않는 친환경 현수막을 사용한다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옥수수 전분이나 사탕수수에서 실을 뽑아 만든 식물성 원단으로 현수막을 제작하면, 매립 후 6개월이면 생분해가 되어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방법은 선거홍보에서 현수막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도시미관을 해치고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현수막 대신 영구적 사용이 가능한 디지털 현수막을 도입하거나 독일과 같이 선거부스를 활용하여 홍보하면 어떨까.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선거문화 풍토에서 각 정당이 자율적으로 이러한 방안을 실행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당 스스로 입법을 통해 선거홍보 현수막 규제 방안을 만들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여야 모두 총선에서 탄소중립에 한목소리를 낸 만큼 22대 국회의 기후환경 분야 1호 법안으로 선거홍보 현수막 금지법이 발의되길 소망해 본다.
2024-04-18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