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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영화 '아바타'가 주는 두 가지 교훈
“이제 당신을 봅니다.”
지난해 12월 9일 서울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영화 ‘아바타: 물의 길’ 기자 간담회에서 배우 조 샐다나(네이티리 역)는 팬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2009년에 나온 ‘아바타’ 1편에 이어 작년 12월 14일에 개봉한 2편의 홍보를 위해 영화의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제 당신을 본다(I see you)”는 말은 영화의 무대인 판도라 행성에서 살아가는 나비(Na’vi)족의 인사말이다. 우리말에서 인사는 “안녕하세요”, 영어에서는 “굿 모닝”, 중국어에서는 “니하오”이다. 이런 표현은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하기를 상대에게 소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반면 나비족은 내가 상대를 본다는 말로 인사를 한다.
나비족의 인사는 “이제 당신을 봅니다”
육신의 눈보다 영혼의 눈을 중요시
남에게 보이려면 먼저 남을 볼 줄 알아야
자연과의 공존에 대한 지혜도 인상적
나비족의 언어는 인공적으로 만든 구성 언어이다.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 1편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나비족이 사용하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남가주 대학의 폴 프라머 교수에게 의뢰하여 새로운 언어를 구성했다. 나비족 언어는 ‘보다’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하나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체아(tse’a)’,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눈으로 보는 ‘카메(kame)’이다. 나비족이 인사말로 “나는 당신을 본다”고 할 때 ‘보다’는 체아가 아니라 카메, 즉 마음의 눈으로 보다는 단어를 사용한다. 신체의 눈으로 보면 물질적 형태가 보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상대의 가치와 이념이 보인다.
인간의 근본적 소망은 남에게 내가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남이 나를 보아주기를 갈망한다. 사업가가 돈을 벌고,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고, 화가가 전시회를 여는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남에게 보이기를 바랄 뿐 남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인정을 남으로부터 바라기만 하면 인간은 인정을 놓고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패자는 승자를 인정하고, 승자는 패자를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 인정의 사회를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단계라고 불렀다.
이런 단계는 주인과 노예 모두에게 불만이므로, 인간은 상호 인정의 사회로 역사는 발전해 간다. 나와 네가 서로에게 인정받으려면 서로를 먼저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내가 너에게 보이려면, 내가 먼저 너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 인정의 기본자세는 나비족의 인사에 담겨 있다. 나비족은 “본다”는 인사를 함으로써 먼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인정을 획득한다. 우리가 ‘아바타’를 통해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내가 보이기 위해서 먼저 남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바타’ 2편의 제목은 ‘아바타: 물의 길’이다. 길(Way)은 도가 철학의 ‘도(道)’를 영어로 번역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 도는 신비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걸어가는 길, 즉 인생의 자세를 의미한다. 물의 길, 즉 ‘물의 도’는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인생의 자세이다. 물의 도에 대한 서술은 ‘아바타’ 2편에 두 번 나온다. 제이크 설리 가족은 원래 살던 숲을 떠나 물가에서 살아가는 매트카이나 부족에게 거처를 부탁한다. 그 추장의 딸 치레야는 제이크의 둘째 아들 로악에게 물의 도를 설명해 준다.
도는 어디든 있다. 매트카이나 부족은 물의 도, 아마존 주민은 숲의 도, 사막 지역 사람은 모래의 도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아바타’에서 배울 두 번째 교훈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환경의 도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의 도에 대한 서술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나온다. 제이크 설리는 거대한 배 아래에서 익사 일보 직전에 있었다. 살아가려면 숨을 참고 오랫동안 잠수해서 헤엄쳐야 한다. 제이크는 기진맥진하여 탈출을 포기했다. 로아크는 그에게 다가가 치레야에게 들었던 물의 도를 암송한다. 물로부터 인간은 태어나고 물로 돌아간다는 물의 도를 배운 후 제이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숨을 깊게 쉬고 먼 거리를 잠수하여 수영할 수 있었다.
자연의 도를 이해한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죽음의 슬픔도 극복할 수 있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술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자연이 연결한다는 점을 장자는 깨달았던 것이다.
인간이 잘 살아가려면 타인 그리고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 영화 ‘아바타’에서 우리는 공존의 두 방법을 배운다. 하나는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교훈을 나비족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내가 타인과 자연을 보는 것이다.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2023-02-0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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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건축은 문화의 표현이다
부끄러웠다. 대통령 직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지난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토교통부 장관 소속으로 하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건축에 대한 인식이 국토교통부에 한정돼 있는 정부에 대한 실망과 함께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축 관련 법령 440여 개 중 국토교통부 소관은 91개로 20.7%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국토교통부 외의 정부 부처 소관으로 전체의 79.3%를 차지한다. 그래서 건축 정책을 범부처 차원에서 조정하고 통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2008년 대통령실 소속으로 설립됐다. 이후 2009년부터 국회 보고와 정례적 대통령 보고뿐만 아니라 여러 부처로 분산된 건축 분야의 주요 정책을 조정해 왔다.
건축물의 질적 향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축의 미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더 해야 할 시기에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국토교통부 장관 소속으로 변경한다니, 정부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원래대로 대통령 소속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정리됐지만,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에는 씁쓸했다.
프랑스 건축법 제1조는 ‘건축이란 문화의 표현이다. 건축의 창조성, 품격, 주변 환경과의 조화, 자연적 경관, 도시환경, 건축 유산의 존중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국 건축법 제1조는 ‘이 법은 건축물의 대지·구조 및 설비의 기준과 건축물의 용도 등을 정하여 건축물의 안전·기능·환경·미관을 향상시킴으로써 공공복리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건축은 건축물을 신축·증축·개축·재축하거나 건축물을 이전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프랑스 건축법의 ‘공공의 이익’이나 한국 건축법의 ‘공공복리 증진’을 보면 공공에 대한 생각은 같은 것 같아도 출발점이 다르다. 프랑스 건축법과 한국 건축법의 가장 큰 차이는 건축을 짓는 행위로 보느냐, 문화의 표현으로 보느냐는 것이다. 이는 수단과 목적의 차이만큼 크다.
한국 건축법에서 ‘건축물의 대지·구조 및 설비의 기준과 건축물의 용도 등을 정하여 건축물의 안전·기능·환경·미관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모두 건축물을 만드는 수단이지 좋은 건축물을 만드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수단을 목적으로 혼동하게 되면 인간의 삶이 괴물로 되어 버린다고 철학자 니체는 말했다. 그에 비해 ‘건축이란 문화의 표현’이라고 정의한 프랑스 건축법은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 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총합체로 건축을 보고 있다.
로마 시대에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를 통합적 지식인이자 장인(기술자)으로 정의했다. 그는 건축은 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건축가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습득한 통합적 지식인이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은 예술, 과학, 인문학에 정통한 지식인이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건축가가 이 모든 것들을 해낼 수는 없지만 건축에 있어 모든 학문의 융합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랜 시간 근대를 거치며 도시와 국가를 만들어 온 유럽과 달리 한국의 근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 전쟁을 겪고 소위 조국 근대화사업을 통한 압축성장 과정을 겪었다. 서양의 문물은 세련된 것이라 받아들이며 한동안 우리 것을 경시한 점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K-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한국어는 세계 언어학습 시장에서 중국어를 제치고 7번째로 높은 수요를 보이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가전은 LG전자 제품이라 한다. 올해 1월 5일부터 8일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23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 주최국인 미국 다음으로 한국 기업의 참가가 많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제 문화와 기술 융합의 정점을 보여 줄 수 있는 K-건축이 남았다.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야 볼 수 있는 공연, 전시 등 여타 예술과는 달리 건축물은 길을 걷다가, 차를 타고 지나다가, 어느 여행지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좋은 건축물이 마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을 주민의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을 알기에 공공재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담는 건축, 불평등을 해소하는 건축,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축은 건축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문화, 기술의 융합과 더불어 국력에 걸맞은 성숙된 민주주의가 함께해야 가능하다.
새해, ‘왜 우리의 건축을 몰라 주냐’가 아니라 건축가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반성해 본다. 막힐 때는 원론을 다시 되짚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2023-01-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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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예술이 지닌 신비와 비밀
지난주 동생 집을 방문했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조카를 보았다. 베토벤 소나타 선율에 취해 눈을 감고 그럴듯하게 몸을 움직여 가며 능숙하게 피아노를 치는 중학생에게 감탄해 칭찬을 해 주려던 순간, 동생은 “또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치고 있다”며 조카에게 핀잔을 주었다. 악보를 보고 쳐야 하는데 자꾸 듣고 외워서 치려고만 해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동생은 조카가 1년 동안 피아노를 배워 제법 치게 되었을 때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조카는 청음 능력이 매우 뛰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억지로 악보 읽는 훈련을 하다 오히려 더 귀한 청음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물론 음악 공부에서 악보 읽는 것도 필요한 훈련이지만 조카가 가진 청음 능력은 더 귀한 능력이니 그것도 함께 발전시키면 좋겠다고 동생에게 조언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대학 동아리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뛰어난 청음 실력을 갖춘 친구를 보고서 경탄과 동시에 심각한 좌절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 밴드 동아리에서 건반 악기인 신시사이저 연주를 맡았다. 7살 때부터 10년 동안이나 피아노를 배웠던 나는 가요, 팝송, 록 음악 정도야 쉽게 연주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합주 첫날 나는 어느 곡도 연주할 수 없었다. 악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타나 베이스, 드럼을 맡은 어느 누구도 악보를 보지 않았고 돌발적인 즉흥 연주를 즐겼다. 그들은 악보가 없어서 연주할 수 없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엔 팝송이나 록 음악의 완전한 악보를 구하기가 어려워 공연 준비하는 내내 나는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 대학 응원전 행사에 우리 동아리가 반주를 맡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그간의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응원가 대부분은 잘 알려진 가요였기 때문에 미리 악보를 구해 열심히 연습한다면 피아노 실력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연습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응원가 연주는 건반 악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타를 맡은 팀원이 함께 건반 악기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의 연주를 듣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한 멜로디와 그에 맞춰 일반적 화음을 넣는 방식의 매우 초보적 연주를 했지만, 그 친구는 그 노래가 방송에서 흘러나올 때와 완벽하게 똑같은 전주, 간주, 반주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친구에게 악보를 좀 달라고 했더니, 자신은 악보를 볼 줄 모르고 그냥 들은 대로 연주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 번에 8개 건반을 함께 눌러야 나는 소리를 악보 없이 들은 것만으로 정확하게 짚어 낼 수가 있다니? 늘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훈련만 해 온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고 그 곡들을 특별히 연습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졸업 후 회사원이 되었지만 본인이 작곡하고 연주한 음반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이렇게 예술에 있어서 교육하거나 규칙화하여 설명하기 어려운 그것은 무엇일까? 모든 예술은 재능과 훈련, 영감과 기술이라는, 어찌 보면 아주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중요하게 관련된 두 측면으로부터 나온다. ‘기술’은 합리적인 규칙 등으로 설명될 수 있고 시간과 노력에 의해 숙련될 수 있는 부분이며, 다른 한편 ‘영감’은 설명이나 교육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으로서 예술적 착상이나 충동과 관련된다. 영감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 뮤즈 여신에게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를 읊조리는 상태’로부터 유래했다. 비합리적인 광기 등에 사로잡혀 보통 사람들은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듣게 되는 일종의 접신 상태를 말한다.
기술은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여 얻을 수도 있다지만, 영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많아서 사실은 답변이라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 남들이 가지지 않은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함으로써, 천부적인 재능을 통해서, 특별한 경험과 시도를 통해서, 지식과 정보들을 습득함으로써, 그리고 또한 부단한 기술적인 연마에 의해 어느 순간 특별한 영감을 얻게 되기도 한다.
예술이 지닌 신비와 비밀은 바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평생 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예술의 그러한 측면이 아닌가 한다. 더 궁금한 분들에게는 영화 ‘블랙 스완’(2011)을 권한다. 부단한 훈련과 자기 관리로 기술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평범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던 영화의 여주인공이 특별한 그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해 보시길.
2023-01-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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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우리다
2022년 11월 30일에 인공지능 개발회사 오픈AI(OpenAI)가 발표한 챗GPT(ChatGPT)가 요즘 주변의 화제였다. 이 채팅 사이트의 기반 기술은 GPT-3인데, 이 기술은 딥러닝을 통해 인간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자기 회귀 언어모델’을 의미한다. 대체로 대학에서 인문학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는 지인들이 많은 까닭에 주요 관심사는 학생들의 과제 평가 문제였다. 가장 민감한 반응들은 에세이 평가로 학점을 부과할 수밖에 없는 미국 대학의 인문학 관련 전공 교수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챗GPT로 에세이를 써서 제출하면 표절 검색기로도 잡아낼 수가 없기에 사실상 평가 체계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주장이었고,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했다는 괴담들도 상당수 떠돌았다.
AI가 대학생의 에세이 숙제까지 해결
인문학 교육의 붕괴가 우려되는 시대
결국 AI를 사용하는 인간 자체의 문제
물론 한 철학자의 농담처럼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이용해 에세이를 제출하면 교수들도 그 에세이를 인공지능에 맡겨 평가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면 고등교육 시스템도 문제없이 작동할 것이고 누구도 일할 필요 없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런 풍자는 실없는 즐거움을 주기보다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어떤 제도인지 아프게 폭로하는 것에 가깝다. 이미 대학은 탈 없이 ‘작동’하는 것만이 목적을 가진 조직으로 전락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농담은 되묻고 있는 셈이다.
관료주의의 목적은 바로 그 관료주의적인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있다. 이 정언명령은 좌우의 정치 이념을 막론하고, 특정 조직이 도달하는 지점이 왜 관료주의인지 질문하게 한다. 이 관료주의는 관료 조직이라는 특정한 시스템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교착 상태의 예시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이 보편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알고리즘의 합리성이다.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는 것은 결국 기계의 작동과 유사해진다는 뜻이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압도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사실상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전자책 단말기인 ‘아마존 킨들’의 디지털 기술은 종이책이라는 아날로그적인 상상을 필요로 한다. 기술은 관념에 머물 수 없고 언제나 사용함으로써 현실화한다. 언어를 관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한 언어일 수 없다. 도구는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고 원래의 쓰임새를 확장한다. 기술의 목적은 이 의미의 획득과 확장에 있다.
그럼에도 챗GPT의 출현과 함께 목격했던 의미심장한 현상 중 하나는 이 기술이 인문학의 종언을 확실하게 선언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대학에 종사하는 인문학 전공 교수들에게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의 발달은 분명 기존의 평가 방식이나 글쓰기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환의 물결이 인문학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인문학 전공 교수들의 쓸모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물결은 지금까지 기계에 맡겨도 될 일을 교육의 주요 목표로 삼아 온 대학이라는 근대 교육기관의 시대착오성을 폭로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근대 유럽에서 시작한 오늘의 대학은 시민의 가치를 교육하는 기관으로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그 정체성이 자명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수업 시간에 에세이를 쓰는 본래의 목표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마당에 그 에세이를 인공지능이 대신 써 준다고 해서 무엇이 그렇게 대수이겠는가. 시험을 보고 점수를 매기는 행위가 학점 취득과 취업이라는 현실적 이해관계로 쉽게 환원되어 버리는 대학의 현실은 챗GPT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그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인공지능 자체보다도 자본주의가 그 인공지능을 인간에 반해서 사용하는 것을 더 우려해야 한다고 했던 미국의 SF 작가 테드 창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반농담 삼아 나는 챗GPT에게 인공지능의 발달이 대학 인문학 교육의 붕괴를 가져올지 물어보았다. 당연히 이 기계는 자신은 단순히 언어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 대답했다. 이 대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없는 것은 바로 부정적인 대답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사정에 비춰 보면,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문학이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는 챗GPT의 알고리즘에서 도출할 수가 없다. 만일 머신 러닝 모델의 알고리즘에 반하는 ‘특이점’이 출현한다면 그 낯선 요소는 오류로 처리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아지려면 이 낯선 오류를 새로움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지만, 지금 넘쳐나는 인간 군상만으로도 힘든 이 세계에서 굳이 기계까지 왜 그래야 하는지 근본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챗GPT를 둘러싼 현상은 인공지능보다도 오히려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2023-01-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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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아파트 이름 순화의 필요성과 방향
최근 아파트 이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아파트가 있는 지역과 특징, 건설사와 브랜드, ‘펫네임(pet name)’이라 부르는 개별 단지의 별칭까지 쓰다 보니, 이름이 10글자를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명의 평균 글자 수는 1990년대 4.2자에서 2019년 9.84자로 길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전국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무려 25글자에 달했다.
게다가 이 긴 이름을 한국어,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을 조합하여 만들다 보니, 아파트 이름의 의미를 짐작조차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luce)’와 집을 뜻하는 독일어 ‘하임(heim)’을 조합해 ‘루체하임’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와 같은 국적 불명의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점점 길고 복잡한 외래어 명칭 난무
최근 한 지자체, 개선 토론회 개최
쉬운 우리말 사용 땐 혜택 등 고려
적합한 명칭 추천도 검토해 볼만
‘우리 집인데 주소를 못 외운다’라거나 ‘서류 주소의 기입란이 모자라 아파트 이름을 다 쓸 수 없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닌 것이다. 또 서울시민 100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0% 이상이 아파트 이름이 어렵고 비슷해 집을 찾는 데 헷갈린 경험이 있고, 외국어 이름이 어렵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서울시가 지나치게 길고 어려운 아파트 이름 대신 알기 쉽고 간단한 이름을 쓰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지난달 29일 ‘알기 쉽고 부르기 쉬운 공동주택 명칭 관련 토론회’를 시작으로 2~3회 더 토론회를 열어 의견을 청취한 뒤 아파트 작명 지침과 중장기 정책을 마련한다고 한다.
부산도 서울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특히 ‘센텀시티’, ‘에코델타시티’와 같이 지역명이 외국어로 되어 있어 아파트 이름 전체가 외국어로만 작명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따라서 부산도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 논의를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파트 이름을 짓는 데까지 지자체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도 있다. 민간 기업에서 상품성을 고려해 이름을 짓는 것까지 지자체가 관여하는 것은 불필요한 규제를 만드는 일이며, 외국어 남용이 문제라면 아파트 이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해당된다.
그럼에도 지자체에서 아파트 단지 작명에 관여해야 하는 이유는 아파트 단지 명칭이 ‘공공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명칭은 그것이 곧 지명으로 사용된다. 가령 버스정류장 등이 아파트 단지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 이름이 지명으로 사용되면 공공성을 획득하므로 지자체는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을 마련할 근거가 있다.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 마련이 외래어, 외국어를 아파트 명칭에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어만 사용하고 다른 외래어, 외국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파트 단지 이름의 글자 수를 제한하는 규제도 바람직하지 않다. 몇 글자 이상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 이름이 12글자 이상이 되면 안 된다는 규제를 만들었을 때, 12글자가 기준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11글자는 허용되고 12글자는 안 되는데 11글자와 12글자의 차이는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은 ‘규제’의 측면에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규제라는 채찍보다 당근에 해당하는 ‘보상’의 관점에서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울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건축, 재개발 과정에서 쉬운 우리말 이름을 지을 경우 다양한 혜택을 주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지자체에서 아파트 건설 지역과 관련된 옛 지명, 방언, 문화 등에 대해 조사하고 정리해 적합한 명칭을 추천하거나 상표권 등록 절차에 대한 행정 지원을 해 주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항간에 아파트 이름을 길고, 어렵게 짓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아들 집을 찾아오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집을 찾기 어려우면 시누이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다. 아파트 이름을 외국어로 길고 복잡하게 짓는 이유는 그래야 아파트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가격 상승이라는 욕망에 취해 지금처럼 외국어를 남용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말은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23-01-0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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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잊지 않아 모름지기 돌아오는 일
한파가 절정이던 주말 저녁 부산역 부근에 마련한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분이지만 ‘페친’으로 10여 년 동안 서로 교류했던 지인이 문학상을 받는 자리인지라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행사 막바지 무렵 그는 다소 흥분되지만 경쾌한 목소리로 깔끔하게 수상 소감을 마쳤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처럼, 어제도 만나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친구처럼, 자연스러운 만남에 수다도 즐거웠다. 그는 시인의 꿈을 남몰래 키웠으나 그리 내색은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다만 조용히 준비하면서도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을 써 왔던 시인이었다. 그리하여 모 잡지의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학의 품으로 들어왔다.
직장이나 성향, 혹은 성격이 달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합류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존재한다. 이를 사후(事後)에 근거한 환원주의의 해석이라 비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서로 아무런 연고도 없이 자신만의 소신과 생활환경만으로 각자 삶을 영위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동아리를 이루거나 지향점을 나누는 장(場)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인 중요도나 영향의 정도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어떤 것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끌어올리거나 공동의 비전을 다양한 방법으로 키우게 된다.
시인이 된 지인은 ‘시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 이미 문학의 장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국민이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기존 문학사회의 대문을 열고 들어온 셈이다. 새로운 구성원에게 보내는 박수는, 단지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늘어난 데서 생겨나는 반가움의 표시라기보다는, 오히려 낯선 이를 맞이하면서 차차 동화되어 갈 자신들의 또 다른 얼굴을 다시금 본 데서 생기는 기쁨의 표시에 가깝다. 다시 말해 타자의 진입으로 타자의 속성이 자신들의 동아리에 융합되는 순간부터 동일화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화는 구성원들의 유형화된 모방심리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처럼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를 욕망하기는 하지만, 실은 자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성향과 습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다. 지근거리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대개 가깝거나 비슷한 동료 혹은 직업군에 속한 존재들이지만, 저마다 지향하는 목표나 가치가 엇비슷하기에 늘 모방심리가 던지는 낚시 바늘에서 안전하지 않다. 욕망은 모방을 낳고, 모방은 경쟁을 불러온다.
정치는 사람들의 욕망과 모방과 경쟁 심리를 가장 극적으로 재현하는 장이다. 그곳에는 대표자들의 ‘환담’이 훈훈한 뉴스거리로 송출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정적’을 향한 사형 언도를 지시하는 발화가 난자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에게는 모든 언쟁이나 정치적 실천이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여건에 따라 시시때때로 카멜레온처럼 의미를 달리하는 ‘국민’이나 ‘국민 정서’는 사실 허깨비 놀음이 가져다주는 허상이라는 사실은 정치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토록 ‘국민’을 입에 올리면서도 아직도 누구 하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일부’ 국민의 눈초리에 벗어날까 봐 사정 당국은 수사를 빌미로 꼬리를 자르거나 압수수색을 하는 등 요란을 떨고 있다.
‘정치권’이라는 사회에서 자행되는 몰상식적이면서 반국민적인 정서는 문단이라고 해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문단 정치’란 말이 오래전부터 회자되는지 생각해 봐도 될 것이다. 창작은 뒷전이고 감투를 둘러싼 이전투구와 돌려먹기식의 수상자 선정, 그리고 작품집 발간을 미끼로 금전을 요구하는 등의 행태가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간이기에 눈앞의 이익이 저 멀리 펼쳐져 있는 두루뭉술한 문학적 비전보다 분명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외관과 모양새에만 정신이 쏠리다 보면 애초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가기 십상이다. 경쟁이 가져다준 욕망의 일그러진 흉터요 생채기다.
바야흐로 새해를 장식할 문단 새내기들의 얼굴이 곧 신문이나 그 밖의 매체를 장식하게 된다. 모름지기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스스로 헤아려 잘 모르는 부분을 어떤 의미로 확정하거나 단정 짓는 등 자기 확신에 빠져들어 함부로 실천에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민심(民心)은 위정자들이 곧잘 이용하는 국민으로, 문심(文心)은 ‘문단 정치꾼’들이 자신들의 행태를 변호하는 얄팍한 문단 활동이나 수상 이력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모름을 지켜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2-12-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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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엘리자베스 비숍과 상실의 시학
북극에서 내려온 한파 때문에 두꺼운 코트를 입어도 찬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든다. 곳곳에 장식해 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따스하다. 추운 날에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생각한다. 가난한 산모가 해산할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의 지혜가 놀랍다. 겨울에 따스한 희망을 전해 주는 아기 예수는 신비롭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는 스스로 겨울을 선택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부유하든 가난하든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없는데, 숭고한 모정을 포기하는 일이 종종 있다. 외롭게 아이를 출산하는 미혼모를 떠올린다. 최근에 아기를 낳은 가정에 실질적인 경제 지원을 하는 정부 정책이 나와 반가웠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청춘의 삶이 팍팍한 현실이다. 정상 가정과 미혼모에게도 사회적 혜택이 똑같이 지원되기를 바란다.
잇단 연말 한파에 몸도 마음도 꽁꽁
상실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우주의 빛이라는
존재의 깨달음으로 승화될 수도 있어
한 해의 끝이 아쉬워 연말에는 모임이 많다. 무사히 한 해를 잘 보냈는지 염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을 떠날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을 갑작스럽게 잃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현대의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자본의 위력을 비판하면서도 삶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자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그 누구도 이러한 자본의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소유욕을 추구하되 절제하는 미덕이 필요한 시대이다.
소유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서 미국의 시인인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1911~1979)은 오히려 ‘상실의 시학’을 전개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슬픔이 그녀의 시인 ‘한 가지 기술(One Art)’에 녹아 있다. 생후 8개월 만에 건축가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그 영향으로 어머니마저 정신 질환을 앓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이후로 비숍은 외가와 친가의 조부모 집으로 옮겨 다니며 양육된다. 주체가 형성되는 유아기에 애착 경험이 부족한 비숍은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알코올에 의존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심리적 안정을 일시적으로 찾았던 것은 브라질에서 건축가 로타 소아레스를 만난 시기였다. 그들의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원래 제목은 ‘달에 도달하기(Reaching for the Moon)’였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영화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브라질에서 로타와 15년 동안 지내는 동안 비숍은 브라질 시인들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타와의 사랑도 성격 차이와 갈등으로 끝나고 사업에 실패한 로타는 자살을 한다. 정신 형성에 있어 기본적인 틀이 되는 부모의 사랑이 결핍되고 연인마저 상실한 그녀가 그 참혹한 고독을 극복하는 데 시 창작은 일부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기술’에서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으로 떠난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소중히 간직했던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나는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보라! 내가 사랑하는/세 채의 집 중 마지막 것이,/아니 마지막에서 두 번째 것도 사라졌다./잃는 기술을 숙달하기가 어렵지 않다.//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두 개의 도시를 잃었다. 그리고 더 크게는,/내가 소유했던 어떤 영역, 두 개의 강과 하나의 대륙을 잃었다./나는 그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그것이 재앙은 아니었다.’
이 구절에서 보듯 비숍은 상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자존감을 강화시킨다. 인생에서 상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단아한 시 형식으로 토로한다. 이 시는 반복적인 리듬과 적절한 시적 모티브를 활용하여 죽음 혹은 이별로 고통받는 독자를 위로한다.
그리고 나는 비숍이 로타의 머리를 감겨 주면서 쓴 시가 참 인상적이었다. ‘샴푸’라는 시에서 연인의 머리에 난 흰 머리카락을 별똥별로 인지하는 그녀의 따스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영화에서 로타가 비숍의 작업실을 만들어 주는 장면은 감동이었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는 비숍을 배려하는 로타의 마음과 그것을 시로 승화시킨 그들은 미국 문학사와 브라질 건축사에서 한 획을 긋는다. 예술도 소중하지만 인생의 순간도 숭고한 것임을 비숍은 시에서 재치 있게 전달한다.
살아생전에는 작품 발표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비숍은 오히려 사후에 ‘엘리자베스 비숍 현상’이라 일컬을 정도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 추운 겨울에 연인의 몸을 안아 주거나 다정하게 씻어 주는 추억을 나누면 좋을 것이다. 언젠가 사라지는 존재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소중한 우주의 빛이다.
2022-12-2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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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랜드마크
연말이다. 그것도 코로나19에 저당 잡혔던 일상이 3여 년 만에 풀린 연말이다. 매년 이맘때면 광복로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와 형형색색의 조명이 더해져 온통 ‘빛’ 천국이다. 거리에 선 사람들 모습마저 덩달아 빛이 된다. 올해는 아직 빛을 밝히지 못했다.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 축제’를 주관하던 단체의 횡령 문제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대표 랜드마크로 활용하기 위해 쏟는 투자와 노력을 보니 늦어지는 광복로 크리스마스트리 축제가 안타깝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 트리,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 근처의 트리는 물론 말레이시아나 홍콩까지 가지 않더라도 제주도에서도 미디어 파사드와 크리스마스트리에 점등을 시작해 크리스마스 명소로서 랜드마크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원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연말 명소가 횡령으로 얼룩져 사업비가 줄고 개막이 늦어진다 하니 경쟁력을 쌓기는 힘들어도 무너지는 건 금방이다.
파리 에펠탑, 뉴욕 자유의 여신상, 인도 타지마할,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등 직접 가보지 않아도 도시나 나라를 들으면 떠오르는 랜드마크는 관광객을 모으고 경제적 효과로 이어지기에 세계 각국은 물론 지자체에서도 랜드마크를 만들자고 한다. 심지어는 규모가 큰 고층 아파트를 랜드마크라 칭하면서 지역 내 최고층 랜드마크 단지를 분양하겠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아무렇게나 쓰이고 있는 랜드마크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랜드마크는 ‘어떤 지역을 대표하거나 구별하게 하는 표지’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본래의 의미는 탐험가나 여행자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특정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든 표식인데 지금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건물, 조형물, 문화재, 지형 등과 같이 어떤 곳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의미를 가진다.
미국 도시 계획가이자 이론가인 케빈 린치는 도시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로 통로(Path), 가장자리(Edge), 결절점(Node), 지구(District), 지표물(Landmark) 등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이들 요소가 잘 갖추어져야 인상적인 도시, 길을 찾기 쉬운 도시, 즉 선명한 도시가 된다 했다.
여기서 지표물(Landmark)은 말 그대로 랜드마크다. 단순히 높고 크다고 해서 다 랜드마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가 점점 더 높은 건물을 만들고 거기서 살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그곳은 공공이 향유할 수 있는 대표성보다는 개인의 소유욕을 부추긴다. 개방적이기보다는 폐쇄적이다.
랜드마크는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별한 장소에서 개인의 경험과 집단의 기억이 공유되어 도시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은 단시일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랜드마크는 공공의 장소, 공유의 역할을 톡톡히 할 때 그 의미가 발현된다.
건축물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여러 건축물이 모이면 공공적 환경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윤리성’을 내포한다. 공공의 개념이 건축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건 18세기 유럽에서였다. 공공건축은 18세기 이후 시민계급으로 대표되는 대중과 그들을 중심으로 한 공론장이 형성되면서 등장한 건축 개념이다. 당시 왕정 건축아카데미와 궁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폐쇄적인 논의 방식을 공공건축과 공공 공간규범에 대한 논쟁으로 공론화시켰다. 전문가와 지식인, 대중이 미적 규정에 대한 토론을 활발히 전개해 공공건축 양식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건축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다.
부산시가 도시 브랜드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홍보와 부산의 도시 브랜드 제고를 위해서라고 한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랜드마크를 짓고 만들겠다고 한다. 지난 4일 ‘부산항 북항 1단계 재개발사업지 내 해양문화지구 랜드마크 부지 개발 민간사업자 공모 사전참가신청’에 국내외 시행사 10개 업체가 신청을 완료했다고 한다. BPA는 ‘공공성은 살리면서 부산의 상징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는 사업자를 선정할 방침이라 한다. 부산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유엔묘지, 용두산타워, 민주공원의 충혼탑 등과 더불어 시민과 방문객이 역사적 기억을 함께할 수 있는 랜드마크가 들어섰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압축 근대화 과정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도시와 건축을 지배한 논리는 경제적 기능주의였다. 그러다 보니 도시화 과정에서 난개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 같은 북항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 변명거리는 별로 없다. 우리가 북항재개발 랜드마크 부지에 주목하는 이유다.
2022-12-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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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유튜브와 백남준
올해는 백남준 작가 탄생 90주년이 되는 해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백남준 작가와 관련된 행사들이 열리기도 했다. ‘백남준’이라는 이름은 미술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그 명성에 비해 백남준 작가가 미술사에 남긴 중요한 발자취의 의미는 의외로 잘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고 하는, 백남준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만 너무 강조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 인기 있는 유튜브 채널들은 구독자 참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실시간 대화를 주고받고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며 프로그램 방향을 정하는 등 서로 활발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백남준 작가가 떠오른다. 백남준은 1960~70년대 아주 일찍부터 인간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민주적 도구로서 전자 매스미디어의 가능성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나 대략 2000년 정도까지도 사람들은 TV나 매스미디어에 대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TV는 보는 사람의 사고를 마비시키는 ‘바보상자’라는 비난, 그리고 매스미디어가 장차 인간을 지배하고 감시하는 도구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비난과 우려는 무엇보다 정보 전달의 편향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TV와 같은 전자 매체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관객들은 거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전달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관객 참여 유도하는 ‘비디오 아트’ 창시
요즘의 쌍방향 소통 ‘인터랙티브’ 예견
작가 탄생 90주년… 선구적 안목에 놀라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이라는 전시에서 비디오 아트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첫 시작부터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전시에서 백남준은 방송국의 일방향적인 정보 전달 방식을 뒤집고 관객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되는 상호작용적 예술(interactive art)로서 비디오 아트를 선보였다. 설치된 11대의 TV들은 모두 당시 서독에 하나밖에 없었던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똑같은 프로그램을 송출하고 있었지만, 백남준이 TV 내부의 회로들을 전부 다른 방식으로 조작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각각의 TV에 나타나는 영상은 모두 달랐다. 이러한 백남준의 작업은 방송국의 일방적인 송출에 개입해 그 흐름을 저지하고 공격함으로써 단일한 정보를 다양한 결과물로 변형시킨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전시에는 연결된 마이크를 통해 관람자가 소리를 전달하면 그 크기와 고저에 반응하면서 변형되는 화면 이미지를 보여 주는 TV들도 등장했다. 최근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아트’의 원조이다. 여기서 백남준은 TV가 악기처럼 작동하도록 만들었고 관객이 직접 그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유도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백남준은 자석이나 마이크 등을 활용한 관람자 참여 TV를 만들었다. 그는 1971년에는 “지난 10년간 나의 TV 작업은 관객의 참여를 위한 노력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백남준이 작품에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관객을 끌어들이게 된 것은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행위 음악’에서부터였다. 사실 백남준은 일본과 독일에서 미술사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의 예술 활동은 음악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956년 쇤베르크의 아방가르드 음악을 배우기 위해 독일에 갔으며, 독일에서 2년 정도 음악을 공부한 후 1958년 쾰른에 있는 서독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며 전자음악 설비를 접하면서 예술과 기계의 접목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한편, 백남준의 예술 활동은 저항예술 혹은 전위예술에서 출발했다. 특히 그는 독일에서 함께 활동했던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샬럿 무어만을 비롯한 플럭서스(fluxus) 그룹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다. 플럭서스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1960~70년대의 전위적 예술운동이다. 이는 기존의 전통과 제도를 부정하는 반문화, 반예술적 성격을 가지고, 예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광범위한 분야의 예술들이 융합되는 혁명적 운동이었다. 이후 포스트모던 미술로 이어지면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백남준도 플락서스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행위 음악’이라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 공연은 즉흥적이고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해프닝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큰 특징이었는데, 이러한 우연적 해프닝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관객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비롯한 전자 매체의 기술적 발전을 바탕으로 관객의 적극적 참여가 더욱 중요해졌고 미디어의 쌍방향 소통도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백남준 작가가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보게 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거봐. 내 말이 맞았지?”
2022-12-0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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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철학과 현실
독일 철학자 헤겔의 강의를 받아 적은 육필 원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이미 소셜미디어에서 회람되고 있던 내용이지만, 영국의 〈가디언〉이 특집 기사로 작성하면서 세간에 확실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자료를 발견한 이는 〈헤겔: 자유의 철학자〉라는 전기를 집필한 클라우스 피에베그 교수다. 그는 독일 예나에 있는 프리드리히실러 대학에서 독일 고전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헤겔 전문가’다.
이 원고는 하이델베르크에서 헤겔의 강의를 들었던 초기 수강생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카로베가 작성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고 한다. 첫 부임을 한 신임 교수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면서 노트를 작성했을 카로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라이벌 셸링의 인기에 다소 배가 아팠을 헤겔은 곧 셸링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면서 곤고한 삶의 처지를 벗어나게 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2년을 머문 후에 베를린으로 옮긴 헤겔은 쇼펜하우어에게 치욕을 안기는 인기 교수로 탈바꿈한다. 자신의 강의에 학생들이 오지 않고 헤겔의 강의에 몰려간 것을 쇼펜하우어는 평생 잊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번에 발견된 원고는 헤겔이 최초로 대학 제도의 일원으로 진입해서 풀어놓은 생각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정신현상학〉을 집필할 무렵에 헤겔의 삶은 거의 바닥을 쳤다. 전쟁으로 궁핍해진 경제 사정은 별다른 수입도 없던 당시의 헤겔 같은 젊은 학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백마를 타고 예나로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지켜보면서 개인의 처지를 넘어서서 작동하는 ‘시대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웬만한 광기가 아니라면, 이런 정신상태에 놓이긴 어려울 것이다. 철학이 “미친 합리성”이라는 이야기는 예부터 있었지만, 헤겔처럼 그 말의 의미를 현생으로 보여 준 경우는 없지 않을까 싶다.
발견된 원고는 지금 피에베그를 비롯한 국제적인 헤겔 전문가들 손을 거쳐서 정리 중이라고 한다. 이번 원고가 초기 헤겔의 사상 발전을 보여 줄 중요한 증거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헤겔은 자신의 생각을 대부분 강의로 풀어냈고, 그래서 중요한 강의록들은 이미 출간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번 자료는 분명 지금도 계속 출간되고 있는 새로운 헤겔 전기 작가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이다. 물론 이 원고에서 무엇인가 기존의 헤겔 해석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자료를 검토한 피에베그 교수의 전언을 참고하더라도, 주요 내용은 미학에 대한 것으로서, 기존에 이미 논의했던 초창기 헤겔 사상의 윤곽을 재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발견은 분명 헤겔에 대한 여러 해석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향의 방향은 불명료하고 난해한 헤겔의 주장을 명확하게 만드는 쪽이 아닌, 더 불명확하고 난해하게 만드는 쪽일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어떤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면 과거의 궁금증이 해소될 것처럼 쉽게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증거의 발견은 사실상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만약 그 믿음에 반하는 증거가 나온다면, 사실이 명쾌해진다기보다 오히려 더 복잡해질 것이다.
과학이 사실관계를 규명해서 팩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철학은 그 관계를 추론해서 진리를 유추하는 것이다. 진리는 팩트와 다르고, 때론 팩트와 충돌한다. 헤겔 강의에 대한 원고는 이른바 팩트이겠지만, 이 팩트가 헤겔이 말하는 진리와 다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비판하면서 이야기했던 문제가 이것이다. 과학적인 팩트로 진리는 온전히 설명 불가능하다. 인류사를 관통하면서 철학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이 이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적인 팩트가 진리를 설명하는 작업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충돌하는 과학적 팩트들을 종합하는 역할이 철학의 몫이다. 과학과 기술을 거부하는 철학운동이 없진 않았지만, 오늘날 철학의 역할은 과학적인 토대 위에 사유를 정립하는 작업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과학의 시대에 왜 헤겔과 같은 철학을 읽어야 할까.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왜 지금 헤겔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글에서 헤겔 철학은 낯설고 예견할 수 없는 조우를 통해서 사회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갈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갈등의 가능성이 바로 자유의 성립 조건일 것이다. 마침 새로 발견된 원고에서도 헤겔은 자유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설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센 국민이면서도 적국의 나폴레옹을 ‘시대정신’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학문적 자유가 바로 근대적 의미의 정치적 자유임을 헤겔은 그의 철학 작업을 통해 몸소 보여 줬다. 자유라는 말이 넘쳐나는 한국에서 새삼 그의 책을 다시 읽어 봐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2022-12-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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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빈곤 포르노’를 둘러싼 ‘정치 포르노’
최근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현지 어린이집을 방문해 찍은 사진을 두고 정치권이 시끄럽다.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김 여사의 사진을 보고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라고 비판하자,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그 표현 자체가 인격 모욕적이고 반여성적이라고 반발하며 장 위원을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나아가 대통령실에서는 장 위원이 사진을 촬영할 때 조명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조명을 사용해 사진을 촬영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경찰에 형사 고발했다.
정치 공방의 핵심인 빈곤 포르노란, 타인의 빈곤 혹은 취약한 상태를 사진이나 영상물 등을 통해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이를 활용하여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뒤 기부금 혹은 사회적 존경심 등을 얻으려는 행위를 말한다. 용어의 개념과 정의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이 용어에 사용된 포르노란 단어가 품은 폭발성 때문인지 여당, 야당 그리고 대통령실까지 모두 논란에 불을 지피며 정치 공방을 벌이고 있다.
논란의 발단인 장경태 최고위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당시 영상을 보면, 김 여사에게 안긴 소년은 14살로 매우 크고 혼자 앉아 이야기하는 것에 불편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사진을 찍는 시점에 안겨 있어야 했는가, 또 사진 구도가 김 여사에게 맞춰졌으며, 비공개 일정임에도 대통령실이 이 사진을 촬영해 언론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사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어 장 위원의 주장처럼 빈곤 포르노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이 옳다고 잘못된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빈곤 포르노라는 자극적 소재를 강조하고 싶은 나머지, 객관성과 전문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을 외신의 분석인 것처럼 혹은 그렇게 오독하도록 유도해 조명을 동원한 사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잘못이다. 물론 장 위원의 말대로 불을 켜고 도둑질했든, 불을 끄고 도둑질했든 빈곤 포르노를 찍은 것은 사실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허위 근거를 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으로 여당의 대응을 살펴보자. 장 위원이 김 여사의 사진에 대해 빈곤 포르노라고 비판하자, 주호영 원내대표는 ‘표현 자체가 인격 모욕적이고 반여성적’이라고 하였으며, 김병욱 의원은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으려는 못된 의도’, 조은희 의원은 ‘유사 성희롱’, 김정재 의원은 ‘아프리카 봉사 활동을 한 오드리 헵번, 정우성은 포르노 배우냐’라며 반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김영식 의원은 ‘그래도 대한민국의 국모’라는 구시대적 발언을 하였으며, 윤상현 의원은 ‘역대 영부인 중에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냐’라는 성차별적 외모 평가까지 동원했다.
여당 의원들이 쏟아 낸 발언들은 논점과는 관계없이 포르노라는 단어의 선정성만을 트집 잡는, 수준 낮은 말싸움밖에 안 된다. 이러한 발언이 나오게 된 이유는 빈곤 포르노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으로 추측되는데, 정말 몰랐다면 무지성적 발언이고, 알고도 이런 발언을 했다면 반지성적 발언이다. 맥락을 삭제하고 포르노라는 단어에만 집착해 발끈한다면 논의는 소모적이고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뿐이다.
한편 대통령실은 더불어민주당 장경태 최고위원을 형사 고발하였다. 그 이유는 장 위원의 ‘조명을 동원한 콘셉트 사진’이라는 발언에서 사진을 찍을 때 조명을 동원하지 않았는데 조명을 동원하였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국익과 국민 권익이 침해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핵심은 콘셉트 사진 촬영이므로 조명은 부수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를 빌미로 야당 국회의원을 고발하는 것은 다른 의도를 가졌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또한 형사 고발 이유로 국익을 거론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최근 대통령실은 MBC의 보도를 문제 삼아 국익을 해친다며 MBC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한 바 있다. 대통령과 관련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국익을 침해한다며 언론, 야당 정치인 할 것 없이 모두 배제하고 또 고발한다면 누가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야당과 여당, 대통령실이 문제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각자의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벌이는 작금의 공방은 가히 ‘정치 포르노’라고 할 만하다. 권위와 겁박, 이기적인 진영 논리, 비난과 선동, 혐오에 기반한 저급한 말싸움이 만들어 낸 정치 포르노를 보고 있자니 낯이 뜨겁다. 포르노라는 세 글자 뒤에 가려진 빈곤 문제와 아동 복지, 국익을 위한 외교 활동의 방향 등 본질적 문제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를 우리 정치권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2022-11-2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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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낙엽도 보기 전에 가을이 간다
지인과 어쩌다 한 번씩 들르곤 하는 주점이 있다. 사장인 아주머니를 도와주는 젊은 여성분이 ‘핼러윈’ 이야기를 꺼내기에, 이 서양 축제를 우리 젊은이들이 요새 부쩍 즐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답의 요지는 이랬다. 명절만 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서 온갖 질문을 하는 통에 여기에 질려 버린 젊은이들이 결국 핼러윈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닌 게 아니라 한국 사람의 ‘가족애’는 유난하여, 일 년에 두어 번 얼굴을 보는 자리에서 그간 쌓였던(?) 궁금증들을 풀려는 듯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부분들까지 집요하게 묻고, 따지고, 한 수 가르치는 말씀들이 넘쳐난다. 그 명절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고, 늘 그랬듯 책임의 소재를 두고 여태껏 공방 중이다.
‘이태원’ 보면서 앞선 여러 참사들 떠올라
겉모습 유사해도 의미나 방향은 각각 달라
지난날의 과오 되풀이하지 않는 게 중요
낙엽도 제대로 안 보고 가을을 보낼 수야…
그러는 사이 집으로 날아온 책 봉투들이 가을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슬픔은 언제나 기억을 안고 뒹구는 법이다. 그것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자리에 남은 흔적들이 걸어온 시간의 추념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니까 희생된 젊은이들은 어제 길에서 마주쳤던 사람이었고, 또한 다가올 날에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픔의 노리개가 되어 흐느끼거나, 분노하거나,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것이다.
또 그러는 사이 가을이 지나간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상추객(賞秋客)’들이 지나가는 가을을 붙잡으려 풍경을 올리고 ‘참사’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동참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통째로 자신에게 들여놓을 수 없다. 잠깐 지나가는 우울이거나, 어쩌면 또다시 맞이할 비극의 전조일 수 있다고 느끼면서도, 나날이 영위해야만 하는 생활공간에 포섭된 채로 살아가는 게 사람이다. 이런 말이 어쩌면 ‘소극적 숙명론자’의 현실도피로 비칠 수도 있겠다. ‘모 아니면 도’ 식의 논법만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눈이 분명하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인과론적 결정주의와 그런 ‘과학적인 세계 분석’에 따른 역사의 진보와 쇠퇴만이 존재한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분법적 사고가 강하게 자리 잡는다.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책임의 소재와 범위는 앞으로 뚜렷하게 밝혀지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드러난 국민 정서와 감정의 평행선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도 세월호 참사와 똑같을 수가 있는지 말이다. 참사가 일어나고, 참사에 대한 책임 공방이 벌어지고, 참사를 계기로 분열된 진영의 속내가 선거에까지 이어지면서 정권이 뒤바뀌는 일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속에서 증오와 분노는 추풍낙엽처럼 날리거나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쌓이면서 단단하게 뭉쳐지곤 했던 일들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이를 두고 역사의 반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똑같아 보이지만 실은 겉모습만 그럴 뿐 거기에 담긴 의미와 방향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속단하는 일만큼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지름길도 없다.
허수경 시인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를 썼다.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붉은 고추가 익는다/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아랫도리 서로 묶으며/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시는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에, 슬픔을 거름처럼 여겨야 하는 당위성을 이 시에서 찾으면 곤란해진다. ‘슬픔의 거름화’ 이전에 켜켜이 누적된 눈물들이 피워 올릴 수밖에 없는 앞날의 싹들이 지금의 우리들이다. 그래서 언제라도 과오를 저지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를 살게 했던 진실의 자리마저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실은 정서나 감정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지 색칠할 수 있는 종이 같은 게 결코 아니다. 진실은 거부하거나 용인할 수 있는 어떤 ‘사실’이 아니라 언제든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움직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전제요 초석이다.
일이 터지면 그 일이 터지게 된 배경을 살피거나 원인을 파헤쳐서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석을 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책임질 영역이 뚜렷이 가려지게 되고 대책 방안이나 방지책이 기존의 매뉴얼에 보태지기도 한다. 가을을 보려는 사람이 정작 보는 것은 계절 자체가 아니라 계절이 흩뿌린 흔적인 단풍과 낙엽이다. 참사 이후, 참사를 인식하는 담당 기관장들의 마음은 마치 낙엽만 감상하면서 가을을 애도하는 자의 마음과 같다. 낙엽이야말로 가을이 저지른 대참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낙엽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자들이 가을을 들먹일 자격이 충분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22-11-1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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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오드리 로드와 유령의 울음소리
흰 국화가 길거리에서 슬프게 울고 있다. 사거리에 걸린 플래카드의 흰 국화를 보면 우울해진다. 꽃 같은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의 비극은 오래도록 우리를 아프게 할 것이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서울에 있던 아이를 만나러 갈 때면 지인들과 이태원 앤티크 거리를 방문하곤 했다. 처음 이태원에 갔을 때는 낮이었는데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스친다.
뉴스에서 들었던 이국적인 분위기를 상상했지만 의외로 초라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앤티크 그릇을 수집하는 지인들과 가게도 둘러보고 방송인 홍석천 씨가 하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한 번은 저녁에 이태원에서 와인을 마셨는데 낮 풍경과 달리 분위기가 정겨웠다. 그 당시에도 해밀톤호텔 뒤쪽의 골목이 넓지는 않았다. 술집 내부가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핼러윈 축제는 다양한 가면과 분장 통해
또 다른 자아를 경험하는 공간이자 기회
우리 모두가 희생자를 위해 대신 울어 주고
겹겹의 오해와 편견 걷어 내는 계기 됐으면
핼러윈 축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아일랜드의 켈트족 문화에서 유래했다. 11월 1일이 모든 성인의 날인데 그 앞날인 10월 31일에 온갖 유령들이 출현한다는 이교도적 문화가 접목된 것이다. 유령에게 안 잡혀가려고 마녀와 괴물 등의 분장을 하고 이집 저집으로 돌아다니는 풍습이다. 아이들은 사탕을 얻으러 다니고, 사람들은 유령 가면이나 여러 복장을 하고 즐긴다. 우리의 탈춤처럼 가면을 쓰고 일상의 억압이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망의 표출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까닭은 이태원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게이 카페와 앤티크 가게도 있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사실 추석이나 설 명절에서 우리는 해방의 느낌을 누리지 않는다. 의무와 책임감에 다소 부담을 느끼는 것과 달리 핼러윈 축제는 그냥 즐길 수 있는 가벼움이 있다. 그들은 가면과 분장을 통해 전혀 다른 자아 혹은 아바타로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의 흑인 여성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1943~1992)는 서인도 제도의 그레나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한 후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다. 백인 동성애자 남성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고, 이혼 뒤에는 백인 여성과 새로운 가정을 꾸려 아이를 키우며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혼성 가족은 가부장제를 벗어난 공동체의 ‘돌봄’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는 시인, 교수, 이론가, 활동가로서 전 세계 디아스포라 흑인 여성의 삶을 시 속에 투영한다. 자신의 유방암 투병기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우리 모두가 차별과 배제를 당할 수 있는 ‘흑인 어머니’의 입장임을 상기시킨다. 겹겹으로 쌓인 고난 속에서 ‘이성’보다는 ‘감정’을 느끼는 여성의 힘을 중요시한다. 미국 시단에 흑인 여성시인이 없었던 암흑기에 온몸으로 투쟁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로서 퀴어 이론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녀의 시집 〈블랙 유니콘〉에 실린 ‘후유증(Sequelae)’에는 아일랜드 민화에 나오는 ‘밴시(bansee)’가 모티브로 등장한다. 밴시는 구슬픈 울음소리로 가족 중의 누군가 곧 죽게 될 것임을 알려 주는 존재이다. 시적 화자는 밴시처럼 유령에 맞서 비명을 지른다. ‘나의 오래된 유령을 덧씌운/형상과 나는 싸운다/너는 흑인이며 여성이 아니라고 혐오하지/백인이면서 내가 아니라고 혐오하지.’ 이 구절에서 보듯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의 고뇌를 토로한다. 후반부에서 ‘내 손은 불이 붙어 비명을 지르는 칼을 움켜쥐었다/물고기로 가장한 거만한 여자가/걸인처럼/우리가 함께 나누어 쓰는 심장 속으로/칼을 더 깊이 더 깊이 내리꽂는다’라고 아주 강렬하게 호소한다. 우주선이 착륙하는 최첨단의 미국에서 차별과 억압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그녀는 유령의 목소리를 통해 표출한다.
로드는, 대신 울어 주는 곡비(哭婢) 혹은 밴시처럼 고통에 처한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한다. 그녀는 산문집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우리 여성들에게 시는 사치가 아니다. 시는 우리가 존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생명 줄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시가 가진 고유한 빛이 여성의 생존과 변화를 촉구해 행동으로 이어지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도 로드처럼 이태원 참사에 희생된 분들을 위해 울고 있는 슬픈 유령들이다. 2014년 그 참혹한 세월호 사건을 겪은 이후에도,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기초 수영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설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지만 교육 행정이나 안전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의 정치 문화에 ‘돌봄’이라는 개념이 일상의 작은 영역에 더 깊이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2022-11-1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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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도시의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는 공간과 시간에 관계없이 여러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한다. 일하면서 쉬고 쉬면서 일하는 시대의 최대 산업은 ‘관광’이 될 것이라고 무인양품의 아트디렉터로 유명한 하라 켄야 일본디자인센터 대표는 도시와 공간포럼 2022 ‘뉴노멀과 엔데믹, 도시 공간의 미래’ 기조강연에서 발표했다.
첨단 디지털 장비만 있다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필요한 정보를 찾고 소통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전 세계를 둘러볼 수도 있고 세계를 누비면서 일을 할 수도 있다. 203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이동할 것이라는 하라 켄야는 “글로벌화가 진행될수록 로컬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똑같은 도시가 아니라 특별한 경험을 주는 곳에서 머물기를 원한다. 토지의 장점을 재해석하는 것, 지역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고 콘텐츠와 사람, 부동산 등 필요한 자원을 모으고 연결해 로컬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 떠나는 농어촌에는 떠나고 남는 빈집이 있습니다.’ (주)다자요의 남성준 대표가 빈집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다. 다자요는 제주에서 시작한 빈집을 활용한 유일한 합법 숙박 모델이다. 여기서 합법이 중요한 이유는 원래 펜션 등 숙박업을 하려면 주인이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빈집이라는 이유로 불법이 되기 때문이다. 법을 바꾸고 특례 범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유휴 공간에 새로운 가치를 더한다’는 다자요만의 빈집프로젝트가 통했기 때문이다.
빈집의 주인은 개발이 되어 가치가 오르기를 막연히 기다리며 다른 곳에 살면서 당장의 투자는 부담스러워한다. 아니면 살다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도 고향의 집을 팔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남 대표는 빈집 주인을 찾아 10년 이상 장기 무상임대를 이끌어 냈다. 대신, 집 주인에게 집을 잘 관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자요는 빈집을 셀럽(전문가)들의 취향이 담긴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룸을 꾸민 제품들은 대기업부터 지역의 작은 업체들 제품으로 숙박을 통해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룸이 쇼케이스로 변모해 홍보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다자요에서 머물다 간 이들은 그곳에서 사용했던 제품들을 바로 구매할 수 있다. 공간 매출의 1.5%는 마을에 기부한다. 비대면 보안 시스템, 에너지 절감을 위한 IoT 시스템, AI 인식을 통한 사물감지 시스템 등 빈집이 로컬, 과학기술과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지금은 남 대표가 빈집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무상으로 임대해 주겠다며 빈집 주인들이 찾아 온다. 다자요처럼 숙박업이 아니더라도 도시의 많은 빈집을 살고 싶은 집,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검증됐다.
빈집은 쇠퇴하는 지방 도시의 단면이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은 빈집이 빈집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인구 감소 문제와 산업구조의 문제, 더불어 정주 여건 개선 등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올해 8월 16일 정부가 발표한 ‘국민 주거안정 실현방안’은 무주택 서민 등 내 집 마련과 주거 성향 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우수 입지에 양질의 주택을 충분히 공급해 주택 시장의 근본적 안정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민간 정비사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와 향후 5년간 270만 호의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과도한 규제 등으로 양질의 주택이 공급되지 못했던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라는데, 그동안 부동산 시장의 문제는 투기 과열로 인한 집값 상승에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부동산 시장이 주춤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자재값 상승과 은행 금리 인상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빈집 정책을 재정비하는 게 우선이다.
메타버스 안에서 점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현실 세계와 가상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자신의 라이프나 미래가 가상공간에서 더 활발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나아가 가상공간을 현실에서 직접 경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다.
도시는 도시계획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더해져 만들어진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진 특수성에 공간적 상상력을 더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로컬의 가치가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시의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2022-11-0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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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미술작품 해석에 옳고 그름이 있을까
“아,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 이해하기 너무 어려워요.”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긴 하지만, 작가가 그런 생각으로 작품을 만든 것 같지는 않아요.”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의도를 꼭 알아야 할까요?” “내 방식대로 작품을 느껴보고 싶은데, 미술사나 미술에 대해 공부를 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건가요?” “작품 해석에도 틀린 것과 맞는 것이 있나요?” 대학 강의 때 학생들은 물론 미술에 관심을 갖고 특강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미술관에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서 숱하게 듣는 질문들이다. 미술작품 감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롤랑 바르트 “어떻게 보느냐는 관람자의 몫”
누구나 자유로운 시선으로 감상하고 즐기는 것
다양성·상상력을 생명으로 하는 예술의 매력
미술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방법과 태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아름다운 색채, 유려한 형태 등 작품의 외적 요소들을 순수하게 내 방식대로 보고 즐기는 것이다. 이때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체로 미술작품의 외관 곧 형식이다. 예술작품에서 형식이란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매체(media)이다. 그것은 물감, 캔버스, 대리석, 나무, 청동, 흙과 같은 작품의 재료뿐 아니라 작품에 나타난 색채, 명암, 형태, 구성, 구도, 질감 등과 그것들의 조화, 긴장, 역동성 등과 같은 요소들을 포괄한다. 작품에서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은 관람자가 작품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쾌감과 불쾌감, 즐거움과 슬픔 등을 포함해 어떤 식으로든 미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작품을 즐기는 태도는 예술에 대한 경험주의적인 관점으로, 철학자 칸트의 입장과 겹친다. 칸트는 심오한 철학 체계를 세웠지만 예술에 대한 입장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관점이라면 작가의 생각과 의도를 몰라도, 미술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다. 이러한 순수한 감상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사실 그것이 예술 감상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다른 한편, 예술작품을 좀 더 심오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이 있는데 이는 예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점으로 헤겔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의 입장이다. 이는 예술이 우리에게 진리와 같은 좀 더 고차원적인 것을 알려 준다고 전제하고, 주로 작품의 내용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작품이 담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순수한 감상을 계속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여러 가지 호기심들이 생겨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왜 화가들은 각각 다른 다양한 양식으로 그림을 그릴까. 현실을 사실적으로 모방한 그림은 이해할 수 있지만, 대상을 개성적으로 변형시키거나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그린 그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한 작품의 내용도 궁금해진다.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림에 그려진 사람은 누구이고 장소는 어디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그림의 내용은 작가의 경험과 관련된 것일까 등등. 그림을 보면서 떠오르는 이러한 호기심과 궁금증에 답을 찾고 싶다면 이때가 미술에 대해 공부해보면 좋은 시기이다.
미술작품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법론들은 작가가 작품을 만든 의도, 생각, 이유 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때 작품 해석의 근거는 작가다. 이 관점에서라면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면 맞는 해석이고, 그렇지 않으면 틀린 해석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그러나 1960~70년대 이후 후기구조주의 사상이 대두되면서 예술작품의 의미는 고정된 불변의 것이 아닌 시간, 공간, 환경 등 그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예술작품에 대한 다양성 해석의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1968)이라는 에세이는 그 강력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이 탄생하고 나면 거기에 더 이상 작가가 어떤 권위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 즉 작품이 만들어져 세상에 나오고 나면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예술작품 해석에 큰 영향을 준 이 글과 함께 작품 해석의 주도권은 더 이상 저자(작가)에게 있지 않고 독자(관람자)에게로 넘어오게 되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아 세상에 내놓은 이후에는 아이를 부모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세상에 나온 작품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대로만 해석될 수는 없게 되었으며, 이제 어떠한 해석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라면 어떤 작품 해석이 맞고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관람자들은 작품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이해하고 자신의 논리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 오히려 이것이 차이와 다양성, 상상력과 독창성을 생명으로 하는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이다.
2022-10-27 [1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