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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우리에게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이웃’을 생각한다. 사전에는 이웃을 ‘서로 접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집, 지역을 일컫는 말을 가리키는 사회 용어’로 정의하고 있다. 이 낱말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웃은 사랑해야 하는 존재로 우리에게 제1의 윤리적 덕목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웃은 아픈 대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혹은 밉거나 떠나보내고 싶은 거추장스러운 대상이기도 하다. 무조건 사랑해야만 하는 이웃인데도, 우리는 늘 조건을 다는 버릇이 있다. 그러니까 ‘무조건’은 ‘조건’을 전제로 한 수식어인 것이다.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종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강조되었지만 이를 말 그대로 실행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무조건적 이웃사랑을 얘기하면 우선 이런 생각들이 무조건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이다. 첫째, 저 사람이 내 이웃이 맞나 하는 생각이다. 둘째, 나는 평소에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셋째, 내게 해 준 것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웃의 경계를 따지고 들면 끝이 없다. 같은 아파트에서 이웃하면서 오랫동안 살았어도 인사 한번 나누지 않는 우리들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인데도 이해관계에 얽히게 되어 유·무형의 이익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마음의 이웃’으로 돌변한다. 사람이니까 얄팍한 감정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00년 전 유대 청년이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무조건적 이웃사랑을 지금 이 시대에도 ‘무조건적으로’ 적용해도 되는 덕목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를 안긴다. 때와 상황에 따라 보편적인 인간 윤리와 도그마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만 하는 말이 이웃사랑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건을 달지 않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을 한번 들춰 보자. 그런 말은 대개 성직자들이 자주 한다. 신자들에게 마땅히 해야만 하는 성직자 계층을 뺀다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들어 있는 셈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상대에게 받아내야 하는 것들을 다 받고 이제는 자신이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웃사랑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바야흐로 저 자신이 실천할 차례가 다가오자 이웃을 들먹이며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사랑이라는 말에 담긴 변화무쌍한 상황 논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의 독단이길 바라지만, 그 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일수록 무언가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랫동안 서먹했거나 심하게는 증오를 보였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환대’의 포즈를 취할 때가 위험한 법이다. 환대 또한 조건을 달지 않는 환영이다. 그러니 이웃사랑은 자연스럽게 환대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환대하거나 이웃사랑을 펼치는 경우는 거의 보기 드물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특정한 전제 없이 노출해 보여 주거나 가져가게끔 하는 윤리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본을 다녀온 대통령 일행이 일본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며 자찬(自讚)하는 모습을 보았다. 경색된 한·일 관계에 물꼬가 트였다는 논리다. 환대받은 일행들은 나름 자부심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한편, 많은 국민(‘대다수’는 아니겠지만)은 대통령의 방일 회담을 두고 ‘굴욕’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환대를 받았다는 논리와 굴욕을 당했다는 논리 중 어느 것이 합당한지 이 자리에서 가릴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상대편에 환대를 받은 사람이 오히려 자기가 속한 집단의 환대를 받지 못하는 모양새가 기괴할 뿐이다.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합의해야 한다는 논리와, 진정한 사죄나 합당한 후속조치는 물론 그럴 의향조차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보인 저자세는 굴욕이라는 극단적 두 양상이 부딪친다.
우리는 이렇게 해법이 묘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일본이라는 ‘이웃’이 그간 우리에게 보였던 태도와 행위를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그 나라가 과연 우리 이웃이 맞는지 생각해 본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상당히 밀접하고 가까운 나라임은 틀림없지만, 우리 집단무의식에 자리 잡은 일본은 언제든지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는 나라였다. 우리에게는 ‘대타자’(大他者·Autre)로 놓인 ‘일본’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인 개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일본이 이웃은 맞지만 지금까지 보였던 행태로 봐서 결코 환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이웃으로 돌아가자. 이웃은 여러모로 인접한 사람이나 장소지만, 그것이 번번이 내게 훼방을 놓거나 억지 논리로 가진 것을 요구할 때 진정 ‘이웃’의 처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발목을 잡고 딴지를 거는데도 정언명제처럼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야만 하는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2023-03-2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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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신운 예술단의 중국 전통 무용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은 정비(正妃)인 여후(呂后)의 아들 영(盈)을 폐하고, 총비(寵妃)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옹립하려고 했다. 여후는 척부인에게 극도의 분노를 품었다. 고조가 죽자 여후는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빼고, 귀에 불길을 넣고, 벙어리로 만드는 약을 먹이고, 척부인을 돼지우리에 살게 하고, “인간 돼지”라고 부르도록 명령했다.
척부인은 ‘교수절요지무(翹袖折腰之舞)’을 잘 추었다고 한다. 교수는 소매를 치켜올린다는 뜻이니 소매를 공중에 뿌리는 동작일 것이고, 절요는 허리를 꺾는다는 뜻이니 몸을 뒤집는 ‘번신(翻身)’ 사위일 것이다. 번신 동작은 한 번만 할 수는 없고 저절로 연속해서 수행하게 되니 이 춤은 선회하면서 소매를 뿌리는 동작이 된다.
유방을 매혹한 척부인의 교수절요지무가 어떤 춤인지 필자는 늘 궁금했다. 중국 무용사에는 소매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한나라 이후에도 선회하는 춤은 자주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호선무는 당나라 때 연회에서 빈번하게 공연되었는데, 선회하는 동작을 주로 하기 때문에 그런 명칭으로 불렸다. 회오리바람처럼 빨리 회전하는 무용은 당시에 매우 유행하였다. 북송의 수도 변량에는 와자(瓦子)라고 불리는 번화가가 많이 있었다. 와자에는 구란(勾欄)또는 유붕(遊棚)이라고 불리는 울타리를 친 장소가 있었는데, 여기서 매우 다양한 기예가 공연되었다. 그중 무용을 ‘무선(舞旋)’이라고 불렀다. 선회의 동작이 당시의 무용 동작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교라고 생각하여 무용 공연을 총칭해 무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척부인의 교수절요지무를 필자는 드디어 무대에서 보았다. 신운(神韻) 예술단은 이 춤을 ‘번신’이란 명칭으로 복원하였던 것이다. 번신은 아름다운 색깔의 긴 소매를 양팔에 매달고 공중으로 날리며 빠른 속도로 선회하는 동작인데, 마치 형형색색의 커다란 바퀴들이 무대를 가득 굴러가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단체는 2006년 중국의 해외 동포들이 미국 뉴욕에서 창단했는데, 올해 2월 2일부터 5일까지 소향 씨어터에서 공연했다. 필자는 2020년 내한 공연도 창원 3·15센터에서 관람했다.
신운 예술단의 이념은 전통 무용의 창조적 계승이다. 창조적 계승은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라서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계승은 전통의 유지인데 창조는 파괴여서, 창조적 계승 개념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신운 예술단은 이 모순적 과제를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다. 중국 전통 무용은 기교와 서사라는 두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다. 기교란 무용의 동작이며, 서사란 동작의 연결을 통하여 구성하는 메시지이다. 신운은 중국 전통 무용의 기교는 수용하지만, 서사는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통을 복원한다.
무술과 무용은 중국 전통에서 동일한 문화적 영역에서 유래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춤과 무술에는 비슷한 동작이 많다. 신운의 공연에는 무술 같은 동작이 자주 나온다. 소당(掃堂)은 무술에서 상대의 발을 차서 쓰러뜨리는 동작이며, 비각(飛脚)은 점프하여 공중에서 양발을 번갈아 차는 동작이다. 전정(前挺)은 공중으로 높이 솟아 한 바퀴 돌고 착지하는 동작인데, 이것은 무술뿐 아니라 체조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쌍비연(雙飛燕)은 점프하여 공중에서 두 다리를 일자로 뻗는 동작으로 매우 씩씩하다. 쌍비연이라는 동작의 명칭은 예전부터 있었다.
중국가극무극원은 1964년에 설립된 중국의 국립무용단이다. 이 단체도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다. 신운 예술단은 전통의 기교를 수용하고 서사는 변화시키는 데 반해 중국가극무극원은 기교는 바꾸고 서사는 전통에서 끌어온다. 중국가극무극원의 2012년 작품 ‘공자(孔子)’는 이상세계를 건설하려는 공자의 역사적 활동을 소재로 삼고 있으나, 기교는 전통 무용 동작을 별로 활용하지 않고 연기나 서양의 현대 무용 동작을 많이 활용한다. 신운 예술단과 중국가극무극원은 각자의 방식대로 전통을 창조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전통 무용계는 전통의 계승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무용가들은 국가나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작품을 전통성은 따지지도 않고 순서를 외우는 데만 집중하며, 일부 무용가들은 전통 무용은 팔만 들어도 춤이라는 나태한 자만에 빠져 전문적 기교를 보여 주지 않는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의 문제는 고향 상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고향 상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정체성 상실이다. 이 문제는 전통을 복원하여 자아를 전통 속에서 바라보면 극복할 수 있다. 전통 무용의 창조적 계승은 고향을 찾는 작업이다.
2023-03-1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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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엔데믹 시대의 도시건축
마스크 실내 착용 의무가 해제됐다. 그리고 얼마 뒤, 코로나19 확진자 수 안내 문자가 중단됐다. 한동안 안전 관련 안내 문자가 잠잠하다 했더니 “계속되는 건조한 날씨로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 ‘경계’ 단계 발령, 농촌 지역 소각 행위 금지, 불씨 관리에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가 며칠째 계속 온다. 산불 뉴스를 보면서 봄이구나 생각했다. 경칩도 되기 전이었다. 해마다 봄철이면 집중되는 산불은 올해도 지난 5일까지 전국적으로 194건이 발생했다.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기후와 토지 이용 변화로 산불이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강도도 세질 것”이라고 한다. 산불은 사람들의 실수나 쓰레기 소각 등 행위의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가뭄, 고온, 강풍 등 이상기후를 동반한 기후변화에 있다. 지구가열화에 따른 열이 가뭄, 화재, 대기질, 수질, 인프라, 농업, 인간과 동물의 건강에 대한 위험을 증폭시키고 있다. 기후위기는 산불만 아니라 팬데믹도 데려왔다.
도시계획 역사는 곧 팬데믹 대처 역사
소득 따라 삶의 공간 차별되지 말아야
공동체의 중요성 고민하는 건축 필요
팬데믹은 인류 발전에 따른 자연의 역습이다.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고 코로나19 확진자 수 안내 문자가 중단됐다고 해서 팬데믹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엔데믹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얼핏 들으면 엔데믹은 팬데믹이 끝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실 그런 뜻이 아니다. 엔데믹은 어떤 감염병이 특정한 지역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원래는 풍토병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으나 코로나19 등장 이후 감염병의 주기적 유행이라는 새로운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 엔데믹 시대에는 팬데믹이 더 자주,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팬데믹의 사회적 거리 두기는 도시와 건축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동안 우리의 건축 상황은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부끄럽게도 건축을 건설로 보는 사회적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아파트와 빌딩으로 대표되는 도시 건축물은 대부분 용적률 싸움이다. 좁은 땅에 얼마나 높이 지어 가치를 창출하느냐 하는 경제논리는 효율성을 앞세우고 획일적이고 비슷비슷한 건축물을 양산했다. 밀집된 도시는 계속되는 신도시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는 팬데믹 상황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기존 도시공간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 인류는 감염병을 겪을 때마다 확산을 막기 위해 도시의 재구조화를 모색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는 장티푸스 유행으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도시계획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다무스는 당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격자형 가로망 체계를 고안해 인구 밀집을 분산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유럽 최대의 재앙이었던 흑사병의 경험은 본격적으로 이상 도시에 대한 논의에 불을 붙였고, 1580년대 영국 왕 엘리자베스 1세는 흑사병 확산을 막기 위해 각 성문으로부터 약 5km 이내에 건물 신축을 금지하는 칙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1830년대 초에 발생한 콜레라는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이 감염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했다. 이는 영국 의회가 세계 최초로 공중보건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파리 역시 콜레라의 영향으로 1853년 도시를 재구축했다. 파리 개조 계획에 착수한 것이다.
이렇듯 건축과 도시계획 역사는 팬데믹 상황에 대처하면서 발전해 왔다. 그렇다면 코로나19를 겪으며 엔데믹을 맞이한 지금 우리의 건축과 도시계획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엔데믹 시대는 위기와 재난이 일상이 되어 있는 ‘불안한 시대’이다.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기후변화는 폭우, 태풍, 산불, 지진, 해수면 상승 등 갈수록 심각해지며 위기 상황까지 와 있다. 공중보건, 의료, 도시환경 개선, 친환경 건축과 재난의 대비를 넘어 ‘복원’의 능력까지 갖춘 ‘리질리언스’ 개념을 도입한 미래도시를 계획한다 해도, 문제는 위기와 재난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인간과 기술의 접목이 소득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달라지지는 않도록, 공간이 계급을 가르는 매개체로서 작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이 넘은 거리 두기는 ‘불안한 시대’를 함께하는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고 생업까지도 희생하며 이겨 온 팬데믹이다. 친환경, 생태, 불평등 해소, 커뮤니티 회복을 중심에 두던 건축에 대한 생각이 기술 중심으로 편리만 추구하는 건축에 묻힐까 걱정이다. 엔데믹 시대는 항상 팬데믹을 내포하고 있다.
2023-03-0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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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아름다운 것이 강한 것이다
3·1절을 기념하는 상징물은 태극기이다. 일제의 눈을 피해 만들고 소중하게 품속에 감추었다가 만세운동 당시 꺼내 흔들었던 그 태극기가 3월엔 거리마다 펄럭인다. 내겐 3·1절이면 꼭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한반도 전체가 무궁화로 뒤덮인 자수 지도이다. 이 자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화려한 아름다움과 처연한 슬픔, 비장하고 강인한 힘과 같은 모순된 기운 속에서 가슴 저리는 감동을 느꼈다. 작품을 보며 나는 혼잣말로 “아름다운 것이 강한 것이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여학생들이 자주독립의 염원을 담아 수를 놓아 만든 한반도 무궁화 자수 작품으로, 만든 사람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작품들이 여럿 남아 있다. 작품마다 꽃의 표현 방식이나 색깔 등은 다양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동일하며, ‘무궁화 삼천리금수강산’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기도 하다.
만세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은 많은 곳에서 여성 주도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 외에도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 참여를 독려하고 군자금을 모아 의병 활동에 가담했던 윤희순, 교사 재직 중 학생들과 함께 비밀 여성독립운동 단체 ‘송죽회’를 결성했던 김경희, 일본에서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들어와 배포하고 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활동했던 김마리아, 신채호의 아내로서 3·1운동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간호사 독립운동 단체 ‘간우회’를 만든 박자혜, 만주 무장항일 조직에서 활동하며 일제 총독 처단을 시도한 남자현, 조선의용군 항일 투쟁 최전선에서 여자 부대를 지휘했던 ‘조선의 잔 다르크’ 김명시 여장군,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로 전투력을 길러 광복군 비행대 작전을 세운 광복군 권기옥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들은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또 여성 독립운동의 더 큰 부분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역사의 뒤편에서 더 많이 이루어졌다. 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독립운동에 나섰을 때 그들의 어머니, 아내, 딸들은 함께 군자금을 모으고 연락책과 밀사 역할을 했으며 남성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입히는 생존을 위한 뒷바라지를 하면서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안살림도 도맡았다. 한반도 전체에 무궁화가 가득한 자수 작품은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은 모든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생각나게 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무궁화를 중요한 상징으로 도입하게 되었을까? ‘무궁화’는 조선시대 이후 이름이고 그전에는 ‘목근(木槿)’ ‘근화(槿花)’ ‘순(舜)’ 등으로 불렸다. 중국 고서에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로 지칭한 내용이 나오는데, 당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최치원도 신라를 ‘근화향’(槿花之鄕·무궁화의 나라)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후 여러 문서에 신라와 고려를 근화향이라고 불렀던 것이 발견된다. 조선시대 장원급제자 머리에 무궁화를 꽂았고 혼례 때 입는 활옷에 무궁화를 수놓았다.
이런 상징성은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892년 5냥짜리 은화에 무궁화꽃과 가지가 새겨졌고 1900년 문관 대례복에도 무궁화가 금빛으로 장식되었다. 1902년 제정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표지에는 중심부 태극을 무궁화가 둘러싸고 있다. 국가적 상징으로 사용되던 무궁화는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의 상징이자 통합의 구심점으로 발전하는데, 그 계기는 ‘애국가’의 원형으로 보이는 ‘무궁화가’의 등장이었다.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 주최 조선 개국기원절에 배재학당 학생들이 처음 부른 후 경축 행사 때마다 선창된 ‘무궁화가’ 후렴구인 ‘무궁화아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젼하셰’는 현재 애국가 가사와 같다.
무궁화는 새벽에 꽃이 피고 오후에 졌다가 해가 지면 떨어지지만, 다음 날 다른 가지에서 새 꽃이 피어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 불린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무궁화를 조국 독립의 표상이자 민족의 희망으로 내세웠다.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문화계몽 운동을 이끌며 전국적인 무궁화 보급에 앞장섰던 남궁억과,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근화여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계몽을 주도했던 차미리사는 배화학당에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찾아 온 학생들에게 민족 독립의 의지와 삶의 희망을 불어넣는 구국 교육에 헌신했다. 이들이 무궁화 자수본을 고안하고 여학생들이 수를 놓아 삼천리금수강산 13개 각도마다 무궁화 한 송이씩 피어 있는 정성스러운 자수 작품들이 완성되었다. 이는 한반도의 자주독립을 알리고 설득하기 위한 홍보 선전용으로 국내와 해외에 널리 퍼졌다. 눈부시게 빛나는 무궁화가 한반도 전역에 활짝 핀 자수 지도는 아직도 우리의 심장과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2023-03-0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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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챗GPT와 AI 문해력 교육
최근 챗GPT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챗GPT는 미국의 인공지능 스타트업 오픈AI가 출시한 인공지능 챗봇이다. 챗GPT는 거대 언어 모델(LLM)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기존의 챗봇과 달리 사용자가 자유로운 형식으로 질문할 수 있으며, 진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정확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또 미국 미네소타대 로스쿨과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의 졸업 시험, 의사면허 시험까지 통과할 만큼 성능이 뛰어나다고 한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챗GPT의 등장을 인터넷의 발명만큼이나 중대한 사건이라고 평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챗GPT가 뛰어난 대답을 내놓을수록, 진짜 사람이 쓴 글과 차이가 없을수록, 교육계 특히 대학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학생들이 과제나 시험에 챗GPT를 사용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법규나 지침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당장 내달 신학기 개학을 앞두고 학교 또는 교수 개인 차원에서 대책을 분주히 마련하고 있다.
많은 대학과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학생들의 챗GPT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챗GPT 사용이 ‘AIgiarism(AI+plagiarism(표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챗GPT를 활용해 작성한 텍스트는 ‘타인이 작성한 텍스트를 자기가 한 것처럼 속이는 행위’라는 전통적 의미의 표절 정의에서 ‘타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표절이 아니라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언어학자 놈 촘스키 MIT 명예교수가 말한 것처럼 챗GPT 자체가 천문학적 규모로 구성된 언어 데이터의 문자열, 규칙성에 기반해 문장을 만드는 ‘첨단기술 표절 시스템’임을 감안하면 챗GPT를 활용해 만든 텍스트는 대필이나 표절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생성 AI의 구조적 한계인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환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학습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할루시네이션은 AI가 데이터의 오류까지 학습해 잘못된 답변을 내놓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챗GPT의 경우 2021년까지 생산된 데이터만을 학습했기 때문에 한국의 대통령이 누구인지 물어봤을 때 ‘문재인’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챗GPT의 대답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으며, 대답의 출처를 제시하지 않아 오류가 있는지조차 알아채기 어렵다. 따라서 학생들이 챗GPT의 대답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 학습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대학과 교수들은 챗GPT 사용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학교 통신망에서 챗GPT 접속을 차단하거나, ‘GPT 제로’, ‘디텍트 GPT’, ‘클래시파이어’ 등의 프로그램을 활용해 챗GPT로 작성한 텍스트를 판별하고 ‘0점 처리’를 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런 대책은 매우 임시방편적이며 챗GPT 방지 효과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학교 통신망에서 챗GPT 접속을 차단하면 VPN(가상 사설망)을 통해 우회 접속할 수도 있고, 학교 밖에서 과제를 할 경우 챗GPT 사용을 막을 방법이 전무하다. 또 챗GPT가 생성한 텍스트를 조금만 수정한다면 챗GPT 텍스트 판별 프로그램에 잡히지 않아 챗GPT 규제 방안은 무용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자동차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자동차는 ‘살인 기계’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면허, 도로, 신호 체계 등을 고안한 이후 지금은 유용한 교통과 운송 도구가 됐다. 챗GPT 역시 마찬가지다. 일정 부분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규제하고 금지한다면 거대한 혁신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대학은 과거의 기준을 잣대로 챗GPT를 금지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생들이 챗GPT를 발전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교육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 ‘AI 리터러시(literacy(문해력))’ 교육 과정을 마련해 운영할 필요가 있다. AI 리터러시 교육과정에는 챗GPT를 포함한 생성 AI 기술에 대한 이해, AI 저작물과 윤리 문제, 비판적 사고에 기반한 AI 저작물 검토, AI 기술이 가져올 풍선·나비 효과에 대한 예측과 대응 방안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대학은 이러한 수업을 통해 학생과 교수, 인문학자와 공학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집단지성을 발휘해 기술 혁신의 활용과 발전 방향을 도출하고 사회에 제시해야 한다. 나아가 기술 혁신이 가져올 변화에 대비해 미래 교육 시스템으로의 전환도 빠르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대학에 요구하는 역할이자, 대학이 챗GPT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다.
2023-0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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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새것의 탈을 쓴 낡은 것
나리타 유스케라는 예일대 소속의 한 일본인 경제학자가 최근 한 인터넷 방송에서 “급속한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노인들의 집단 자살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실을 보도한 〈뉴욕 타임스〉에 자신의 의견이 맥락 없이 인용 당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다른 보도들에 따르면 이전에도 그는 비슷한 주장들을 계속해 왔다고 한다. 그는 경제학자이긴 하지만 전공 분야보다는 소셜 미디어에서 과감한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대부분은 나리타 교수의 주장을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게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19세기에 출현한 이래로 끊임없이 위기의 해결책으로 등장했던 이른바 ‘사회진화론’의 흔적을 나리타 교수의 논리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금기 도전 자체를 파격의 자세로 간주
정치인 개인의 인기가 곧 정치력으로 연결
극단적인 형식주의만 난무하는 시대
진정한 전복은 없고 옛 변형만 반복 ‘씁쓸’
경제의 쟁점을 인구 조절의 문제로 봤던 맬서스가 바로 그 시초일 것이다. 맬서스의 생각은 스펜서로 이어져서 ‘대안은 없다’는 사회진화론의 정언명령을 정립한다. 이 사회진화론이 다름 아닌 우생학의 토대이고, 오늘날 자각 없이 내뱉는 이른바 정책 결정자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발언에서 자주 모습을 보인다.
우생학이라고 하면 나치를 떠올리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역사상 특정 정치세력의 특정 이데올로기로 이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은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생학 자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도 원천 봉쇄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당신의 사고가 우생학적인 것이라고 하면 그럼 ‘내가 나치란 말인가’라는 식으로 범주 오류의 문답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우생학은 나치뿐만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많은 발전론자들이 공유했던 사상이었고, 아시아의 엘리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리타 교수의 경우만 보더라도,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노인 집단의 소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뿌리 깊은 우생학의 유산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발언들을 개인의 도덕성 결핍으로 규탄하는 것은 절반만 옳은 판단이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의 도덕률을 우습게 여기고 거기에 도전하는 것을 파격적인 태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기존 진보 가치의 도착성을 보여 준다. 체 게바라의 패션이 1980년대 람보의 패션이 되듯이, 이런 가치 전도는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금기에 도전하는 행위 자체를 전복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극단적 형식주의가 오늘날 도착적인 가치 전도의 대중화를 조장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파격의 형식만 끊임없이 복제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영합주의가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극단화하고 있다. 이로써 정작 정치가 관장해야 할 영역이 희미해져 버렸다는 것은 한국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명백하다. 정치인 개인의 인기를 곧 정치력으로 치환해 버리는 이런 발상은 세대 격차나 계급 불평등의 문제를 사적 이익의 문제로 덮어 버리는 우를 범하게 한다.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단체를 일러 ‘공익의 발목을 잡는 반사회 단체’로 묘사하면서 헌법이 보장한 시민권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들이 이런 사례에 속할 것이다. 맥락을 놓고 보면 이런 행동은 고령화 문제의 책임을 엉뚱하게 노인 집단에 돌리는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국가의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모든 민족 구성원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합의는 나치즘의 발원에서 보듯,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으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민족의 구성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평등의 이념은 그 민족의 단일성을 내부에서 해체한다.
헌법이라는 것은 방황하는 평등의 이념을 고정시킨 사회적 합의이다. 따라서 특정 경제학자나 지방자치단체장이 자기 호불호에 맞춰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를 포함시킬 수 없는 일이다. 상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이런 합의를 파괴하는 행동을 영웅시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 들어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상당 부분 세계적 차원에서 대안을 이야기하던 세력들이 약화된 오늘날의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파격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그렇게 파격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나리타 교수의 발언만 놓고 보더라도 집단 자살을 권한 대상인 노인 집단에 비해서 그 자신이 훨씬 새로운 세대에 속한다고 믿는 듯하지만, 그의 논리는 19세기적인 사회진화론의 반복일 뿐이다. 낡은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낡은 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처럼 귀환하는 비루한 현실이 이 시대의 불모성을 보여 주는 사태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2023-02-1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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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무엇이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가
요새 부쩍 트로트 음악이 인기다. 최근 들어 경연 프로그램들이 여러 방송 채널을 점령하고 있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젊은 가수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아마추어들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한국 대중문화의 한 줄기를 차지하는 모습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많은 국민들을 빠져들게 하는 트로트 열풍은 한동안 수그러들 낌새가 보이지 않을 듯하다.
이를 ‘한국 문화의 복고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잠시 고민에 잠길 수도 있겠다. 종편 프로그램에서 1980~90년대를 배경으로 당시 젊은이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다. 또한 주류 회사에서 복고풍 상표를 붙여 시중에 유통해 판매고를 올리기도 한다. 여기에다 대중음악을 비롯해서 각종 광고나 상표 및 로고까지도 옛 추억을 상기하는 방향으로 기획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대체로 세상이 흉흉할 때 복고 열풍이 인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라거나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하는 식의 토로를 우리는 익히 들어 보았다. 이런 말을 내뱉는 심정이나 마음은, 현실이야 어떻든 그것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아무리 이 나라가 발전하고 잘살게 되었더라도 마음은 ‘옛’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사회 분위기에 관계없이 이미 흘러간, 그래서 더 이상 되찾을 수 없는 시간대와 환경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복고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을 담아 주로 중년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프로그램이 있다. 저마다의 다양한 사정으로 가족을 등지고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기에 나온다. 이들을 가리키는 ‘자연인’은 이제 세간에 익히 잘 알려진 호칭이 되었다. 물론 여느 방송과 마찬가지로 해당 콘셉트와 기획에 맞춰 연출되고 편집된 프로그램이다. 진행을 맡는 개그맨의 익살과 재치가 ‘자연인’의 사연과 어우러져 쏠쏠한 재미를 주는 때문인지, 시청률이 웬만한 지상파 방송의 인기 드라마 못지않다.
최첨단 시대에 우리의 눈과 귀를 옛날로 돌리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흥미를 끄집어내 마치 전염병처럼 번지게 하는 ‘복고 열풍’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런 현상이 비단 최근에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사람들은 늘 과거의 기억과 추억을 현실 속으로 소환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이 언젠가는 지난날 그때의 시간과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세대 차이의 간격과 감성의 주기는 기성세대들이 겪은 것보다 훨씬 짧다. 수명은 늘어나는데, 그 긴 시간대의 세대 인식의 편차는 나날이 다양해지고 변동 폭 또한 복잡해진다. 젊은 세대들이 유행처럼 쓰는 말이 곧바로 사전에 등재되는 시대다. 기성세대가 지금까지 별생각 없이 드러낸 말투와 몸짓은 하루아침에 ‘꼰대’라는 이름의 화살을 맞곤 한다. 옛 시간과 풍경과 문화에 열광하는 현상과, 세대 간 좁힐 수 없는 문화의 간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첨예해진다. 두 가지 상충된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문화는 ‘죽음’을 잡아먹으면서 몸짓을 키우는 괴물들이 무대에서 펼치는 광란극이거나, 비참하게 끝난 연극을 응시하며 말없이 무대를 청소하는 이들이 만드는 드라마다. 옛것의 향수에 빠져 열광하면서도 제 옆의 이웃들이 겪는 처참함과 비극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게 바로 우리들이다. 복고든 무엇이든 자신의 재미와 환락을 위해서라면 곤경에 빠진 타인의 처지마저도 ‘식탐’의 대상으로 삼는 괴물 같은 모습이 바로 우리 문화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더욱 큰 문제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찾는 자리에서조차 자본 문화에 중독된 마음이 이미 들어앉아 있다는 점이다. 자본에 길든 마음과 습성은 의식한다고 해서 쉽사리 떨쳐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더 이상의 전망이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눈길을 과거로 돌린다. ‘늘 그래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지난날의 영광을 단지 풍속이나 대중문화의 달콤한 추억 속에서만 찾는 사회는 불안과 절망이 가득 차 이미 더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버린 뒤다. 그러니 비참함은 언제나 우리 몫일 수밖에 없다. 세대 간 차이 속에서도 과거로만 눈길을 돌리는 우리 사회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어느 누구도 결코 이런 문화를 바라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우리에게 보란 듯이 미끼처럼 던져 버렸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미끼를 덥석 물어 버렸다.
2023-02-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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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영화 '아바타'가 주는 두 가지 교훈
“이제 당신을 봅니다.”
지난해 12월 9일 서울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영화 ‘아바타: 물의 길’ 기자 간담회에서 배우 조 샐다나(네이티리 역)는 팬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2009년에 나온 ‘아바타’ 1편에 이어 작년 12월 14일에 개봉한 2편의 홍보를 위해 영화의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제 당신을 본다(I see you)”는 말은 영화의 무대인 판도라 행성에서 살아가는 나비(Na’vi)족의 인사말이다. 우리말에서 인사는 “안녕하세요”, 영어에서는 “굿 모닝”, 중국어에서는 “니하오”이다. 이런 표현은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하기를 상대에게 소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반면 나비족은 내가 상대를 본다는 말로 인사를 한다.
나비족의 인사는 “이제 당신을 봅니다”
육신의 눈보다 영혼의 눈을 중요시
남에게 보이려면 먼저 남을 볼 줄 알아야
자연과의 공존에 대한 지혜도 인상적
나비족의 언어는 인공적으로 만든 구성 언어이다.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 1편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나비족이 사용하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남가주 대학의 폴 프라머 교수에게 의뢰하여 새로운 언어를 구성했다. 나비족 언어는 ‘보다’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하나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체아(tse’a)’,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눈으로 보는 ‘카메(kame)’이다. 나비족이 인사말로 “나는 당신을 본다”고 할 때 ‘보다’는 체아가 아니라 카메, 즉 마음의 눈으로 보다는 단어를 사용한다. 신체의 눈으로 보면 물질적 형태가 보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상대의 가치와 이념이 보인다.
인간의 근본적 소망은 남에게 내가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남이 나를 보아주기를 갈망한다. 사업가가 돈을 벌고,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고, 화가가 전시회를 여는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남에게 보이기를 바랄 뿐 남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인정을 남으로부터 바라기만 하면 인간은 인정을 놓고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패자는 승자를 인정하고, 승자는 패자를 인정하지 않는 일방적 인정의 사회를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단계라고 불렀다.
이런 단계는 주인과 노예 모두에게 불만이므로, 인간은 상호 인정의 사회로 역사는 발전해 간다. 나와 네가 서로에게 인정받으려면 서로를 먼저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내가 너에게 보이려면, 내가 먼저 너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 인정의 기본자세는 나비족의 인사에 담겨 있다. 나비족은 “본다”는 인사를 함으로써 먼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인정을 획득한다. 우리가 ‘아바타’를 통해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내가 보이기 위해서 먼저 남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바타’ 2편의 제목은 ‘아바타: 물의 길’이다. 길(Way)은 도가 철학의 ‘도(道)’를 영어로 번역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 도는 신비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걸어가는 길, 즉 인생의 자세를 의미한다. 물의 길, 즉 ‘물의 도’는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인생의 자세이다. 물의 도에 대한 서술은 ‘아바타’ 2편에 두 번 나온다. 제이크 설리 가족은 원래 살던 숲을 떠나 물가에서 살아가는 매트카이나 부족에게 거처를 부탁한다. 그 추장의 딸 치레야는 제이크의 둘째 아들 로악에게 물의 도를 설명해 준다.
도는 어디든 있다. 매트카이나 부족은 물의 도, 아마존 주민은 숲의 도, 사막 지역 사람은 모래의 도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아바타’에서 배울 두 번째 교훈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환경의 도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의 도에 대한 서술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나온다. 제이크 설리는 거대한 배 아래에서 익사 일보 직전에 있었다. 살아가려면 숨을 참고 오랫동안 잠수해서 헤엄쳐야 한다. 제이크는 기진맥진하여 탈출을 포기했다. 로아크는 그에게 다가가 치레야에게 들었던 물의 도를 암송한다. 물로부터 인간은 태어나고 물로 돌아간다는 물의 도를 배운 후 제이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숨을 깊게 쉬고 먼 거리를 잠수하여 수영할 수 있었다.
자연의 도를 이해한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죽음의 슬픔도 극복할 수 있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술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자연이 연결한다는 점을 장자는 깨달았던 것이다.
인간이 잘 살아가려면 타인 그리고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 영화 ‘아바타’에서 우리는 공존의 두 방법을 배운다. 하나는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교훈을 나비족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내가 타인과 자연을 보는 것이다.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2023-02-0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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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건축은 문화의 표현이다
부끄러웠다. 대통령 직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지난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토교통부 장관 소속으로 하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건축에 대한 인식이 국토교통부에 한정돼 있는 정부에 대한 실망과 함께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축 관련 법령 440여 개 중 국토교통부 소관은 91개로 20.7%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국토교통부 외의 정부 부처 소관으로 전체의 79.3%를 차지한다. 그래서 건축 정책을 범부처 차원에서 조정하고 통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2008년 대통령실 소속으로 설립됐다. 이후 2009년부터 국회 보고와 정례적 대통령 보고뿐만 아니라 여러 부처로 분산된 건축 분야의 주요 정책을 조정해 왔다.
건축물의 질적 향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축의 미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더 해야 할 시기에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국토교통부 장관 소속으로 변경한다니, 정부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원래대로 대통령 소속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정리됐지만,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에는 씁쓸했다.
프랑스 건축법 제1조는 ‘건축이란 문화의 표현이다. 건축의 창조성, 품격, 주변 환경과의 조화, 자연적 경관, 도시환경, 건축 유산의 존중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국 건축법 제1조는 ‘이 법은 건축물의 대지·구조 및 설비의 기준과 건축물의 용도 등을 정하여 건축물의 안전·기능·환경·미관을 향상시킴으로써 공공복리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건축은 건축물을 신축·증축·개축·재축하거나 건축물을 이전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프랑스 건축법의 ‘공공의 이익’이나 한국 건축법의 ‘공공복리 증진’을 보면 공공에 대한 생각은 같은 것 같아도 출발점이 다르다. 프랑스 건축법과 한국 건축법의 가장 큰 차이는 건축을 짓는 행위로 보느냐, 문화의 표현으로 보느냐는 것이다. 이는 수단과 목적의 차이만큼 크다.
한국 건축법에서 ‘건축물의 대지·구조 및 설비의 기준과 건축물의 용도 등을 정하여 건축물의 안전·기능·환경·미관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모두 건축물을 만드는 수단이지 좋은 건축물을 만드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수단을 목적으로 혼동하게 되면 인간의 삶이 괴물로 되어 버린다고 철학자 니체는 말했다. 그에 비해 ‘건축이란 문화의 표현’이라고 정의한 프랑스 건축법은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 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총합체로 건축을 보고 있다.
로마 시대에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를 통합적 지식인이자 장인(기술자)으로 정의했다. 그는 건축은 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건축가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습득한 통합적 지식인이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들은 예술, 과학, 인문학에 정통한 지식인이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건축가가 이 모든 것들을 해낼 수는 없지만 건축에 있어 모든 학문의 융합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랜 시간 근대를 거치며 도시와 국가를 만들어 온 유럽과 달리 한국의 근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 전쟁을 겪고 소위 조국 근대화사업을 통한 압축성장 과정을 겪었다. 서양의 문물은 세련된 것이라 받아들이며 한동안 우리 것을 경시한 점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K-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한국어는 세계 언어학습 시장에서 중국어를 제치고 7번째로 높은 수요를 보이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가전은 LG전자 제품이라 한다. 올해 1월 5일부터 8일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23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 주최국인 미국 다음으로 한국 기업의 참가가 많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제 문화와 기술 융합의 정점을 보여 줄 수 있는 K-건축이 남았다.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야 볼 수 있는 공연, 전시 등 여타 예술과는 달리 건축물은 길을 걷다가, 차를 타고 지나다가, 어느 여행지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좋은 건축물이 마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을 주민의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을 알기에 공공재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담는 건축, 불평등을 해소하는 건축,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축은 건축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문화, 기술의 융합과 더불어 국력에 걸맞은 성숙된 민주주의가 함께해야 가능하다.
새해, ‘왜 우리의 건축을 몰라 주냐’가 아니라 건축가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반성해 본다. 막힐 때는 원론을 다시 되짚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2023-01-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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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예술이 지닌 신비와 비밀
지난주 동생 집을 방문했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조카를 보았다. 베토벤 소나타 선율에 취해 눈을 감고 그럴듯하게 몸을 움직여 가며 능숙하게 피아노를 치는 중학생에게 감탄해 칭찬을 해 주려던 순간, 동생은 “또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치고 있다”며 조카에게 핀잔을 주었다. 악보를 보고 쳐야 하는데 자꾸 듣고 외워서 치려고만 해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동생은 조카가 1년 동안 피아노를 배워 제법 치게 되었을 때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조카는 청음 능력이 매우 뛰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억지로 악보 읽는 훈련을 하다 오히려 더 귀한 청음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물론 음악 공부에서 악보 읽는 것도 필요한 훈련이지만 조카가 가진 청음 능력은 더 귀한 능력이니 그것도 함께 발전시키면 좋겠다고 동생에게 조언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대학 동아리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뛰어난 청음 실력을 갖춘 친구를 보고서 경탄과 동시에 심각한 좌절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 밴드 동아리에서 건반 악기인 신시사이저 연주를 맡았다. 7살 때부터 10년 동안이나 피아노를 배웠던 나는 가요, 팝송, 록 음악 정도야 쉽게 연주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합주 첫날 나는 어느 곡도 연주할 수 없었다. 악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타나 베이스, 드럼을 맡은 어느 누구도 악보를 보지 않았고 돌발적인 즉흥 연주를 즐겼다. 그들은 악보가 없어서 연주할 수 없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엔 팝송이나 록 음악의 완전한 악보를 구하기가 어려워 공연 준비하는 내내 나는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 대학 응원전 행사에 우리 동아리가 반주를 맡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그간의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응원가 대부분은 잘 알려진 가요였기 때문에 미리 악보를 구해 열심히 연습한다면 피아노 실력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연습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응원가 연주는 건반 악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타를 맡은 팀원이 함께 건반 악기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의 연주를 듣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나는 단순한 멜로디와 그에 맞춰 일반적 화음을 넣는 방식의 매우 초보적 연주를 했지만, 그 친구는 그 노래가 방송에서 흘러나올 때와 완벽하게 똑같은 전주, 간주, 반주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친구에게 악보를 좀 달라고 했더니, 자신은 악보를 볼 줄 모르고 그냥 들은 대로 연주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 번에 8개 건반을 함께 눌러야 나는 소리를 악보 없이 들은 것만으로 정확하게 짚어 낼 수가 있다니? 늘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훈련만 해 온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고 그 곡들을 특별히 연습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졸업 후 회사원이 되었지만 본인이 작곡하고 연주한 음반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이렇게 예술에 있어서 교육하거나 규칙화하여 설명하기 어려운 그것은 무엇일까? 모든 예술은 재능과 훈련, 영감과 기술이라는, 어찌 보면 아주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중요하게 관련된 두 측면으로부터 나온다. ‘기술’은 합리적인 규칙 등으로 설명될 수 있고 시간과 노력에 의해 숙련될 수 있는 부분이며, 다른 한편 ‘영감’은 설명이나 교육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으로서 예술적 착상이나 충동과 관련된다. 영감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 뮤즈 여신에게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를 읊조리는 상태’로부터 유래했다. 비합리적인 광기 등에 사로잡혀 보통 사람들은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듣게 되는 일종의 접신 상태를 말한다.
기술은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여 얻을 수도 있다지만, 영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많아서 사실은 답변이라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 남들이 가지지 않은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함으로써, 천부적인 재능을 통해서, 특별한 경험과 시도를 통해서, 지식과 정보들을 습득함으로써, 그리고 또한 부단한 기술적인 연마에 의해 어느 순간 특별한 영감을 얻게 되기도 한다.
예술이 지닌 신비와 비밀은 바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평생 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예술의 그러한 측면이 아닌가 한다. 더 궁금한 분들에게는 영화 ‘블랙 스완’(2011)을 권한다. 부단한 훈련과 자기 관리로 기술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평범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던 영화의 여주인공이 특별한 그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해 보시길.
2023-01-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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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우리다
2022년 11월 30일에 인공지능 개발회사 오픈AI(OpenAI)가 발표한 챗GPT(ChatGPT)가 요즘 주변의 화제였다. 이 채팅 사이트의 기반 기술은 GPT-3인데, 이 기술은 딥러닝을 통해 인간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자기 회귀 언어모델’을 의미한다. 대체로 대학에서 인문학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는 지인들이 많은 까닭에 주요 관심사는 학생들의 과제 평가 문제였다. 가장 민감한 반응들은 에세이 평가로 학점을 부과할 수밖에 없는 미국 대학의 인문학 관련 전공 교수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챗GPT로 에세이를 써서 제출하면 표절 검색기로도 잡아낼 수가 없기에 사실상 평가 체계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주장이었고,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했다는 괴담들도 상당수 떠돌았다.
AI가 대학생의 에세이 숙제까지 해결
인문학 교육의 붕괴가 우려되는 시대
결국 AI를 사용하는 인간 자체의 문제
물론 한 철학자의 농담처럼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이용해 에세이를 제출하면 교수들도 그 에세이를 인공지능에 맡겨 평가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면 고등교육 시스템도 문제없이 작동할 것이고 누구도 일할 필요 없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런 풍자는 실없는 즐거움을 주기보다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어떤 제도인지 아프게 폭로하는 것에 가깝다. 이미 대학은 탈 없이 ‘작동’하는 것만이 목적을 가진 조직으로 전락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농담은 되묻고 있는 셈이다.
관료주의의 목적은 바로 그 관료주의적인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있다. 이 정언명령은 좌우의 정치 이념을 막론하고, 특정 조직이 도달하는 지점이 왜 관료주의인지 질문하게 한다. 이 관료주의는 관료 조직이라는 특정한 시스템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교착 상태의 예시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이 보편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알고리즘의 합리성이다.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는 것은 결국 기계의 작동과 유사해진다는 뜻이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압도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사실상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전자책 단말기인 ‘아마존 킨들’의 디지털 기술은 종이책이라는 아날로그적인 상상을 필요로 한다. 기술은 관념에 머물 수 없고 언제나 사용함으로써 현실화한다. 언어를 관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한 언어일 수 없다. 도구는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고 원래의 쓰임새를 확장한다. 기술의 목적은 이 의미의 획득과 확장에 있다.
그럼에도 챗GPT의 출현과 함께 목격했던 의미심장한 현상 중 하나는 이 기술이 인문학의 종언을 확실하게 선언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대학에 종사하는 인문학 전공 교수들에게 인공지능 글쓰기 기계의 발달은 분명 기존의 평가 방식이나 글쓰기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환의 물결이 인문학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인문학 전공 교수들의 쓸모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물결은 지금까지 기계에 맡겨도 될 일을 교육의 주요 목표로 삼아 온 대학이라는 근대 교육기관의 시대착오성을 폭로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근대 유럽에서 시작한 오늘의 대학은 시민의 가치를 교육하는 기관으로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그 정체성이 자명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수업 시간에 에세이를 쓰는 본래의 목표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마당에 그 에세이를 인공지능이 대신 써 준다고 해서 무엇이 그렇게 대수이겠는가. 시험을 보고 점수를 매기는 행위가 학점 취득과 취업이라는 현실적 이해관계로 쉽게 환원되어 버리는 대학의 현실은 챗GPT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그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인공지능 자체보다도 자본주의가 그 인공지능을 인간에 반해서 사용하는 것을 더 우려해야 한다고 했던 미국의 SF 작가 테드 창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반농담 삼아 나는 챗GPT에게 인공지능의 발달이 대학 인문학 교육의 붕괴를 가져올지 물어보았다. 당연히 이 기계는 자신은 단순히 언어모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 대답했다. 이 대답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없는 것은 바로 부정적인 대답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사정에 비춰 보면,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문학이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는 챗GPT의 알고리즘에서 도출할 수가 없다. 만일 머신 러닝 모델의 알고리즘에 반하는 ‘특이점’이 출현한다면 그 낯선 요소는 오류로 처리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아지려면 이 낯선 오류를 새로움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가능할 것이지만, 지금 넘쳐나는 인간 군상만으로도 힘든 이 세계에서 굳이 기계까지 왜 그래야 하는지 근본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챗GPT를 둘러싼 현상은 인공지능보다도 오히려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2023-01-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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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아파트 이름 순화의 필요성과 방향
최근 아파트 이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아파트가 있는 지역과 특징, 건설사와 브랜드, ‘펫네임(pet name)’이라 부르는 개별 단지의 별칭까지 쓰다 보니, 이름이 10글자를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명의 평균 글자 수는 1990년대 4.2자에서 2019년 9.84자로 길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전국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무려 25글자에 달했다.
게다가 이 긴 이름을 한국어,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을 조합하여 만들다 보니, 아파트 이름의 의미를 짐작조차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luce)’와 집을 뜻하는 독일어 ‘하임(heim)’을 조합해 ‘루체하임’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와 같은 국적 불명의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점점 길고 복잡한 외래어 명칭 난무
최근 한 지자체, 개선 토론회 개최
쉬운 우리말 사용 땐 혜택 등 고려
적합한 명칭 추천도 검토해 볼만
‘우리 집인데 주소를 못 외운다’라거나 ‘서류 주소의 기입란이 모자라 아파트 이름을 다 쓸 수 없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닌 것이다. 또 서울시민 100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0% 이상이 아파트 이름이 어렵고 비슷해 집을 찾는 데 헷갈린 경험이 있고, 외국어 이름이 어렵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서울시가 지나치게 길고 어려운 아파트 이름 대신 알기 쉽고 간단한 이름을 쓰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지난달 29일 ‘알기 쉽고 부르기 쉬운 공동주택 명칭 관련 토론회’를 시작으로 2~3회 더 토론회를 열어 의견을 청취한 뒤 아파트 작명 지침과 중장기 정책을 마련한다고 한다.
부산도 서울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특히 ‘센텀시티’, ‘에코델타시티’와 같이 지역명이 외국어로 되어 있어 아파트 이름 전체가 외국어로만 작명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따라서 부산도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 논의를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파트 이름을 짓는 데까지 지자체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도 있다. 민간 기업에서 상품성을 고려해 이름을 짓는 것까지 지자체가 관여하는 것은 불필요한 규제를 만드는 일이며, 외국어 남용이 문제라면 아파트 이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해당된다.
그럼에도 지자체에서 아파트 단지 작명에 관여해야 하는 이유는 아파트 단지 명칭이 ‘공공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명칭은 그것이 곧 지명으로 사용된다. 가령 버스정류장 등이 아파트 단지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 이름이 지명으로 사용되면 공공성을 획득하므로 지자체는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을 마련할 근거가 있다.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 마련이 외래어, 외국어를 아파트 명칭에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어만 사용하고 다른 외래어, 외국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파트 단지 이름의 글자 수를 제한하는 규제도 바람직하지 않다. 몇 글자 이상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 이름이 12글자 이상이 되면 안 된다는 규제를 만들었을 때, 12글자가 기준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11글자는 허용되고 12글자는 안 되는데 11글자와 12글자의 차이는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은 ‘규제’의 측면에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규제라는 채찍보다 당근에 해당하는 ‘보상’의 관점에서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울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건축, 재개발 과정에서 쉬운 우리말 이름을 지을 경우 다양한 혜택을 주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지자체에서 아파트 건설 지역과 관련된 옛 지명, 방언, 문화 등에 대해 조사하고 정리해 적합한 명칭을 추천하거나 상표권 등록 절차에 대한 행정 지원을 해 주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항간에 아파트 이름을 길고, 어렵게 짓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아들 집을 찾아오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집을 찾기 어려우면 시누이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다. 아파트 이름을 외국어로 길고 복잡하게 짓는 이유는 그래야 아파트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가격 상승이라는 욕망에 취해 지금처럼 외국어를 남용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말은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23-01-0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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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잊지 않아 모름지기 돌아오는 일
한파가 절정이던 주말 저녁 부산역 부근에 마련한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분이지만 ‘페친’으로 10여 년 동안 서로 교류했던 지인이 문학상을 받는 자리인지라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행사 막바지 무렵 그는 다소 흥분되지만 경쾌한 목소리로 깔끔하게 수상 소감을 마쳤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처럼, 어제도 만나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친구처럼, 자연스러운 만남에 수다도 즐거웠다. 그는 시인의 꿈을 남몰래 키웠으나 그리 내색은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다만 조용히 준비하면서도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을 써 왔던 시인이었다. 그리하여 모 잡지의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학의 품으로 들어왔다.
직장이나 성향, 혹은 성격이 달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합류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존재한다. 이를 사후(事後)에 근거한 환원주의의 해석이라 비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서로 아무런 연고도 없이 자신만의 소신과 생활환경만으로 각자 삶을 영위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동아리를 이루거나 지향점을 나누는 장(場)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인 중요도나 영향의 정도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어떤 것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끌어올리거나 공동의 비전을 다양한 방법으로 키우게 된다.
시인이 된 지인은 ‘시인’이라는 정체성만으로 이미 문학의 장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국민이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기존 문학사회의 대문을 열고 들어온 셈이다. 새로운 구성원에게 보내는 박수는, 단지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늘어난 데서 생겨나는 반가움의 표시라기보다는, 오히려 낯선 이를 맞이하면서 차차 동화되어 갈 자신들의 또 다른 얼굴을 다시금 본 데서 생기는 기쁨의 표시에 가깝다. 다시 말해 타자의 진입으로 타자의 속성이 자신들의 동아리에 융합되는 순간부터 동일화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화는 구성원들의 유형화된 모방심리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처럼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를 욕망하기는 하지만, 실은 자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성향과 습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다. 지근거리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대개 가깝거나 비슷한 동료 혹은 직업군에 속한 존재들이지만, 저마다 지향하는 목표나 가치가 엇비슷하기에 늘 모방심리가 던지는 낚시 바늘에서 안전하지 않다. 욕망은 모방을 낳고, 모방은 경쟁을 불러온다.
정치는 사람들의 욕망과 모방과 경쟁 심리를 가장 극적으로 재현하는 장이다. 그곳에는 대표자들의 ‘환담’이 훈훈한 뉴스거리로 송출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정적’을 향한 사형 언도를 지시하는 발화가 난자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에게는 모든 언쟁이나 정치적 실천이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여건에 따라 시시때때로 카멜레온처럼 의미를 달리하는 ‘국민’이나 ‘국민 정서’는 사실 허깨비 놀음이 가져다주는 허상이라는 사실은 정치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토록 ‘국민’을 입에 올리면서도 아직도 누구 하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일부’ 국민의 눈초리에 벗어날까 봐 사정 당국은 수사를 빌미로 꼬리를 자르거나 압수수색을 하는 등 요란을 떨고 있다.
‘정치권’이라는 사회에서 자행되는 몰상식적이면서 반국민적인 정서는 문단이라고 해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문단 정치’란 말이 오래전부터 회자되는지 생각해 봐도 될 것이다. 창작은 뒷전이고 감투를 둘러싼 이전투구와 돌려먹기식의 수상자 선정, 그리고 작품집 발간을 미끼로 금전을 요구하는 등의 행태가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인간이기에 눈앞의 이익이 저 멀리 펼쳐져 있는 두루뭉술한 문학적 비전보다 분명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외관과 모양새에만 정신이 쏠리다 보면 애초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가기 십상이다. 경쟁이 가져다준 욕망의 일그러진 흉터요 생채기다.
바야흐로 새해를 장식할 문단 새내기들의 얼굴이 곧 신문이나 그 밖의 매체를 장식하게 된다. 모름지기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스스로 헤아려 잘 모르는 부분을 어떤 의미로 확정하거나 단정 짓는 등 자기 확신에 빠져들어 함부로 실천에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민심(民心)은 위정자들이 곧잘 이용하는 국민으로, 문심(文心)은 ‘문단 정치꾼’들이 자신들의 행태를 변호하는 얄팍한 문단 활동이나 수상 이력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모름을 지켜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2-12-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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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엘리자베스 비숍과 상실의 시학
북극에서 내려온 한파 때문에 두꺼운 코트를 입어도 찬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든다. 곳곳에 장식해 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따스하다. 추운 날에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생각한다. 가난한 산모가 해산할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의 지혜가 놀랍다. 겨울에 따스한 희망을 전해 주는 아기 예수는 신비롭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는 스스로 겨울을 선택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부유하든 가난하든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없는데, 숭고한 모정을 포기하는 일이 종종 있다. 외롭게 아이를 출산하는 미혼모를 떠올린다. 최근에 아기를 낳은 가정에 실질적인 경제 지원을 하는 정부 정책이 나와 반가웠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청춘의 삶이 팍팍한 현실이다. 정상 가정과 미혼모에게도 사회적 혜택이 똑같이 지원되기를 바란다.
잇단 연말 한파에 몸도 마음도 꽁꽁
상실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우주의 빛이라는
존재의 깨달음으로 승화될 수도 있어
한 해의 끝이 아쉬워 연말에는 모임이 많다. 무사히 한 해를 잘 보냈는지 염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을 떠날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을 갑작스럽게 잃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현대의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자본의 위력을 비판하면서도 삶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자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그 누구도 이러한 자본의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소유욕을 추구하되 절제하는 미덕이 필요한 시대이다.
소유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서 미국의 시인인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1911~1979)은 오히려 ‘상실의 시학’을 전개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슬픔이 그녀의 시인 ‘한 가지 기술(One Art)’에 녹아 있다. 생후 8개월 만에 건축가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그 영향으로 어머니마저 정신 질환을 앓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이후로 비숍은 외가와 친가의 조부모 집으로 옮겨 다니며 양육된다. 주체가 형성되는 유아기에 애착 경험이 부족한 비숍은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알코올에 의존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심리적 안정을 일시적으로 찾았던 것은 브라질에서 건축가 로타 소아레스를 만난 시기였다. 그들의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원래 제목은 ‘달에 도달하기(Reaching for the Moon)’였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영화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브라질에서 로타와 15년 동안 지내는 동안 비숍은 브라질 시인들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타와의 사랑도 성격 차이와 갈등으로 끝나고 사업에 실패한 로타는 자살을 한다. 정신 형성에 있어 기본적인 틀이 되는 부모의 사랑이 결핍되고 연인마저 상실한 그녀가 그 참혹한 고독을 극복하는 데 시 창작은 일부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기술’에서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으로 떠난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소중히 간직했던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나는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보라! 내가 사랑하는/세 채의 집 중 마지막 것이,/아니 마지막에서 두 번째 것도 사라졌다./잃는 기술을 숙달하기가 어렵지 않다.//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두 개의 도시를 잃었다. 그리고 더 크게는,/내가 소유했던 어떤 영역, 두 개의 강과 하나의 대륙을 잃었다./나는 그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그것이 재앙은 아니었다.’
이 구절에서 보듯 비숍은 상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자존감을 강화시킨다. 인생에서 상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단아한 시 형식으로 토로한다. 이 시는 반복적인 리듬과 적절한 시적 모티브를 활용하여 죽음 혹은 이별로 고통받는 독자를 위로한다.
그리고 나는 비숍이 로타의 머리를 감겨 주면서 쓴 시가 참 인상적이었다. ‘샴푸’라는 시에서 연인의 머리에 난 흰 머리카락을 별똥별로 인지하는 그녀의 따스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영화에서 로타가 비숍의 작업실을 만들어 주는 장면은 감동이었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는 비숍을 배려하는 로타의 마음과 그것을 시로 승화시킨 그들은 미국 문학사와 브라질 건축사에서 한 획을 긋는다. 예술도 소중하지만 인생의 순간도 숭고한 것임을 비숍은 시에서 재치 있게 전달한다.
살아생전에는 작품 발표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비숍은 오히려 사후에 ‘엘리자베스 비숍 현상’이라 일컬을 정도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 추운 겨울에 연인의 몸을 안아 주거나 다정하게 씻어 주는 추억을 나누면 좋을 것이다. 언젠가 사라지는 존재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소중한 우주의 빛이다.
2022-12-2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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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랜드마크
연말이다. 그것도 코로나19에 저당 잡혔던 일상이 3여 년 만에 풀린 연말이다. 매년 이맘때면 광복로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와 형형색색의 조명이 더해져 온통 ‘빛’ 천국이다. 거리에 선 사람들 모습마저 덩달아 빛이 된다. 올해는 아직 빛을 밝히지 못했다.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 축제’를 주관하던 단체의 횡령 문제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대표 랜드마크로 활용하기 위해 쏟는 투자와 노력을 보니 늦어지는 광복로 크리스마스트리 축제가 안타깝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록펠러센터 트리,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 근처의 트리는 물론 말레이시아나 홍콩까지 가지 않더라도 제주도에서도 미디어 파사드와 크리스마스트리에 점등을 시작해 크리스마스 명소로서 랜드마크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원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연말 명소가 횡령으로 얼룩져 사업비가 줄고 개막이 늦어진다 하니 경쟁력을 쌓기는 힘들어도 무너지는 건 금방이다.
파리 에펠탑, 뉴욕 자유의 여신상, 인도 타지마할,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등 직접 가보지 않아도 도시나 나라를 들으면 떠오르는 랜드마크는 관광객을 모으고 경제적 효과로 이어지기에 세계 각국은 물론 지자체에서도 랜드마크를 만들자고 한다. 심지어는 규모가 큰 고층 아파트를 랜드마크라 칭하면서 지역 내 최고층 랜드마크 단지를 분양하겠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아무렇게나 쓰이고 있는 랜드마크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랜드마크는 ‘어떤 지역을 대표하거나 구별하게 하는 표지’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본래의 의미는 탐험가나 여행자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특정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든 표식인데 지금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건물, 조형물, 문화재, 지형 등과 같이 어떤 곳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의미를 가진다.
미국 도시 계획가이자 이론가인 케빈 린치는 도시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로 통로(Path), 가장자리(Edge), 결절점(Node), 지구(District), 지표물(Landmark) 등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이들 요소가 잘 갖추어져야 인상적인 도시, 길을 찾기 쉬운 도시, 즉 선명한 도시가 된다 했다.
여기서 지표물(Landmark)은 말 그대로 랜드마크다. 단순히 높고 크다고 해서 다 랜드마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가 점점 더 높은 건물을 만들고 거기서 살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그곳은 공공이 향유할 수 있는 대표성보다는 개인의 소유욕을 부추긴다. 개방적이기보다는 폐쇄적이다.
랜드마크는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별한 장소에서 개인의 경험과 집단의 기억이 공유되어 도시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은 단시일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랜드마크는 공공의 장소, 공유의 역할을 톡톡히 할 때 그 의미가 발현된다.
건축물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여러 건축물이 모이면 공공적 환경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윤리성’을 내포한다. 공공의 개념이 건축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건 18세기 유럽에서였다. 공공건축은 18세기 이후 시민계급으로 대표되는 대중과 그들을 중심으로 한 공론장이 형성되면서 등장한 건축 개념이다. 당시 왕정 건축아카데미와 궁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폐쇄적인 논의 방식을 공공건축과 공공 공간규범에 대한 논쟁으로 공론화시켰다. 전문가와 지식인, 대중이 미적 규정에 대한 토론을 활발히 전개해 공공건축 양식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건축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다.
부산시가 도시 브랜드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 홍보와 부산의 도시 브랜드 제고를 위해서라고 한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랜드마크를 짓고 만들겠다고 한다. 지난 4일 ‘부산항 북항 1단계 재개발사업지 내 해양문화지구 랜드마크 부지 개발 민간사업자 공모 사전참가신청’에 국내외 시행사 10개 업체가 신청을 완료했다고 한다. BPA는 ‘공공성은 살리면서 부산의 상징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는 사업자를 선정할 방침이라 한다. 부산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유엔묘지, 용두산타워, 민주공원의 충혼탑 등과 더불어 시민과 방문객이 역사적 기억을 함께할 수 있는 랜드마크가 들어섰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압축 근대화 과정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도시와 건축을 지배한 논리는 경제적 기능주의였다. 그러다 보니 도시화 과정에서 난개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 같은 북항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 변명거리는 별로 없다. 우리가 북항재개발 랜드마크 부지에 주목하는 이유다.
2022-12-15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