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봄, 꽃, 두드러기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한 달 전부터 이마 양쪽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맞다. 꽃가루, 알레르기, 두드러기. 봄이면 매년 반복되는 일임에도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게 된다. 눈을 뿌려놓은 듯 환상적인 벚꽃길, 그리고 개나리·진달래에 이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철쭉·이팝나무 꽃길, 그 덕분에 아무런 이유 없이 한 달 내내 출근길이 행복해진다. 꽃 피는 이 봄이 마치 올해의 시작인 듯, 1월 1일에도 무덤덤했던 마음이 한 해의 희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뭐라도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두드러기 올라온 곳이 가려워 긁다가 이내 피가 맺힌다.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내 어머니는 집에 항상 화초를 키우고 멋진 꽃꽂이를 해 두고, 특별한 때에는 늘 꽃다발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장미, 튤립, 백합, 그런 꽃들이 내겐 조금 징그럽게 보였다. 다들 꽃이 아름답다고 좋아하는데 내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대학생 시절, 이런 내 이야기를 들은 원예학과 친구는 꽃이 식물의 생식기니까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너무 과하게 화려한 색깔과 형태가 내겐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이렇게 꽃은 모순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미와 순수’ 혹은 ‘죽음과 허무’ 등 상징
꽃의 양면성은 예술 작품 소재 되기도
삶과 죽음 등 다층적 의미 사색할 기회
미술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가 바로 꽃이다. 그려진 꽃은 현실의 꽃과 달리 알레르기, 공포심을 유발할 일도 없으니 내게 안전하다고 해야 할까.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꽃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고 흥미롭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기독교 종교화에서 꽃은 성서와 연관하여 각각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리스와 백합은 마리아와 함께 자주 그려지는데, 백합은 순수를 상징하고 아이리스는 예수의 수난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뜻한다. 데이지꽃은 어린 예수의 순수함, 민들레는 그리스도의 고난, 아네모네는 슬픔과 죽음을 상징한다. 한국화에서도 꽃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극락세계와 다산을 상징하는 연꽃, 장수를 상징하는 국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 등과 같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서양 고전 회화에서 오랫동안 어떤 상징적 의미를 담은 부수적 소재로 등장해 오던 꽃이 작품의 본격적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네덜란드 정물화에서였다. ‘성상 금지’의 원칙에 따라 종교화를 선호하지 않는 신교도였던 네덜란드인들은 정물화를 선호했고, 정물들에 종교적 상징들을 담았다. 그런데 네덜란드 정물화에 반짝이는 은식기, 유리잔, 음식, 해골 등과 함께 등장하는 꽃은 인생무상(Vanitas) 즉,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경고를 담고 있다. 화려한 꽃, 반짝이는 값비싼 식기들은 언젠가 사라질 존재들로서 인생의 덧없음, 시간의 무상함, 피할 수 없는 죽음 등을 상징한다.
거대하게 확대된 백합이나 칸나꽃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꽃 그림을 그린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도 있다. 그녀의 꽃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중요한 특징이 강조되면서 형태가 단순화된 추상의 특징,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꽃은 생명의 신비와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많은 평론가들은 여성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페미니즘 예술을 주도했던 오키프의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오키프가 회화로 거대한 꽃을 표현했다면, 한국의 최정화(1961~) 작가는 플라스틱 소재의 거대한 꽃 조각을 야외에 설치하여 주변을 이색적인 풍경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지속적으로 꽃을 작업의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그의 꽃은 생과 사의 순환과 그것의 어김없는 이치를 인간이 거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죽음과 인생무상 등의 의미를 담은 꽃 작품을 선보인 것은 바로 앤디 워홀(1928∼1987)이다. 워홀의 ‘꽃(Flowers)’은 사진 잡지 〈모던 포토그래피〉에 실린 히비스커스꽃 사진을 편집해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것이다. 대량 인쇄가 가능한 판화 기술로 제작한 워홀의 꽃은 밝고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 안에는 어떤 존재든 언젠가 시들고 죽는다는 무상함의 정서가 담겨 있다. 1964년 첫선을 보인 꽃 시리즈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워홀의 주요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4년 후 워홀이 총에 맞고 난 뒤에는 이전 같은 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작품에는 점차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등장했다.
지금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 방문하면 워홀의 꽃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흘러가는 만개(滿開)의 계절, 아름다움과 인생무상, 생과 사의 양면적인 의미를 미술 작품을 통해 사색해 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