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불교에서 욕망은 과연 나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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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철학과 교수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암송되는 불경이다. 사찰에서 독송하는 심경(心經)은 한어인데, 여타의 불경처럼 원래는 범어로 적혀 있었다. 심경은 범어로부터 한어로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유명한 3가지 번역본 중 하나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이 649년 옮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암송하는 심경은 현장의 번역본으로, 문장이 아름다우며 간결하다. 그러나 중요한 단어를 빠뜨리고 엉뚱한 문장을 추가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크게 오해하게 했다.

현장 번역의 심경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은 해방의 최고 지혜를 깊이 탐구하면서, 오온(五蘊) 즉 만물이 공허하다는 점을 보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 여기에는 원문에 있는 단어 ‘본성’이 누락되었으며, 원문에 없는 구절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가 추가되었다. 범어 원문은 ‘오온의 본성이 공허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장은 그냥 ‘오온이 공허하다’고 번역했다. 오온은 다섯 개의 덩어리라는 의미이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망라하므로 만물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공허의 원어는 수냐(sunya)인데, 수냐는 ‘결여하는, 없는, 비어 있는’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여기에 여성 명사형 접미어 '타'를 붙여 수냐타(sunyata)를 만들면, 그것은 ‘결여, 제로, 공허’를 의미하는 추상명사가 된다. 보통 수냐타를 공(空)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말이 다소 모호하기 때문에 필자는 공허라고 번역한다.

〈반야심경〉 원본 번역 과정에서 오독

인간의 삶에 욕망과 고통은 불가피

제거하지 말고 에너지로서 수용해야

만물이 공허하다는 것과 만물의 본성이 공허하다는 두 문장은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만물이 공허하다는 문장은 모든 것이 헛되고 쓸데없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많은 불교도들은 돈·명성·권력 등 이 세상의 존재를 무의미하다고 보고 그 욕망을 버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심경에서 붓다는 세속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만물의 본성이 공허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본성의 원문은 스바-바바(sva-bhava)이다. ‘스바’는 자기, ‘바바’는 존재라는 뜻이어서, 스바-바바는 독립성이나 본성을 의미한다. 붓다 당시 인도 사상은 만물이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암소의 본성은 우유 생산이다. 반면 붓다는 모든 존재에 본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본성은 비어 있다고 본다. 만물의 본성은 사실상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라 타자가 덧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암소의 젖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문화에서 암소의 본성은 우유 생산이지만, 그렇지 않은 문화는 그것을 다르게 여길 것이다. 비트코인은 본성이 한 개가 1억 원의 가치인지 아니면 1만 개가 피자 두 판의 가치인지, 그것은 대중의 마음에 따라 결정된다. 비트코인 자체는 내재적 본성이 없는 것이다.

현장이 번역에서 추가한 위의 문장은 심경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심경은 고통의 제거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현장이 그 문장을 넣은 이유는 고통에 관한 붓다의 초기 사상이 심경에서 완전히 바뀌었는데 현장이 이 점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붓다의 첫 강연을 기록한 〈전법륜경(轉法輪經)〉에 고통의 원인과 해방에 관한 4개의 위대한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가 나온다. 이 당시 붓다는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라고 보고, 욕망을 제거하여 고통을 없애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갈망한다. 사업에서 성공하고, 선거에서 당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에서 욕망은 자주 좌절하기 때문에 고통이 일어난다. 만약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갈망하지 않았다면 실패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없애려고 욕망을 제거하면 안 된다. 욕망은 삶에 목표와 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으면 인간은 죽어버리고, 욕망이 적으면 인간은 발전하지 못한다. 욕망을 제거하여 고통을 없애는 방식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길을 붓다는 모색해야만 했다.

심경에서 붓다는 본성의 공허 사상을 통하여 고통을 수용하는 자세로 전환한다. 승패는 타자에 달려있다. 승자가 있기 때문에 패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 부유하기 때문에 누구는 가난한 것이다. 누가 패자인지 가난한지 그 성격은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 패배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패자는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다.

심경의 마지막에 붓다는 사성제를 명확하게 부정한다.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 제거의 가능성, 고통 제거의 방법에 대한 이론은 타당성이 없다.’ 붓다는 욕망을 제거하여 고통을 없애는 초기의 해법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이런 변화의 기저에 욕망에 대한 평가의 변화가 놓여 있다. 욕망은 삶의 에너지이므로 제거해서는 안 된다. 욕망이 있는 한 고통은 불가피하니, 고통의 강은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은 죽는 그날까지 고통의 강물에서 헤엄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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