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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아델의 뮌헨 레지던시 공연을 위한 팝업 콘서트홀
8월 독일 뮌헨의 메세(Messe)에서 영국 팝스타 아델의 역대급 콘서트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올 초 접했다. 국내서도 일산 킨텍스나 부산 벡스코에서 대형 공연이나 행사가 종종 열리기에, 독일의 박람회장을 일컫는 메세 공연이 의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기존 시설을 활용한 공연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팝업 형태의 대형 아레나 무대가 공개되었을 때,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 10회의 공연에 80만 명이 참가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회당 7만 4000만 명이 승인되었다. 교통 혼잡을 우려한 바이에른주 경찰과 안전상의 이유에 따른 뮌헨 당국의 요구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달 31일 마지막 날 방문했는데 그 규모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콘서트와 부대시설을 위해 조성된 전체 부지는 40만㎡(12만 평)에 이르며 이는 축구장 60개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메인 무대에 사용된 LED 스크린 너비만 220m, 높이는 30m에 이른다. 이는 역대 공연 무대에 사용된 것 중 최대이며, 제작 비용이 무려 4000만 유로, 약 한화 600억 원에 이른다.
‘아델 월드’로 명명된 공연장 주변은 식사와 주류, 대관람차와 회전목마, 비어가르텐 등으로 1300명을 동시 수용했다. 〈빌보드〉 8월 호에 따르면 건설 비용을 포함해 팝업 공연장과 제반 시설 비용에만 1억 달러(한화 1340억 원)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번 아델 공연은 최종 73만 장이 판매되었는데, 식음료와 굿즈 판매 등 파생상품까지 따지면 천문학적인 매출 규모가 예상된다. 뮌헨시는 아델의 이번 공연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레지던시 10회 콘서트가 유발하는 경제 수익은 5억 6000만 유로에 달할 것으로 발표했다.
이번 공연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팝업 무대임에도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준 초대형 LED 스크린과 적절한 동선 계획과 입·퇴장 시 두세 차례에 걸쳐서 의도적으로 지체하도록 동선을 우회시키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성가시고 불필요하다고 느껴졌지만, 문제없이 7만 4000명의 관객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놀라웠다.
팝업 공연장 사례 중 아델의 경우는 그의 상품성에 기인한 바 크지만, 클래식은 더 자주 만날 수 있다. 제네바 그랑시어터와 쾰른 오페라 극장 그리고 뮌헨 필하모닉이 상주하고 있는 가슈타익이 리노베이션 되는 동안 지어진 임시 목조 공연장이다. 수년에 걸쳐 세 곳을 모두 방문했는데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모습은 학습할 만한 좋은 사례가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로덕션의 공백이 없도록 하는 부분이 돋보였다. 이는 공연을 사랑하는 관객들이 전제되어야 하는 문화이기도 하다.
2024-09-0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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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호수 위에서 만나는 혁신적인 오페라 무대, 브레겐츠 페스티벌
오스트리아 서부 포어아를베르크주에 있는 인구 3만의 작은 도시 브레겐츠에서는 오늘날 가장 혁신적인 무대를 선보이는 오페라 축제가 해마다 여름이면 열린다. 호반 위 수상 무대를 콘셉트로 하는 브레겐츠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3국이 맞닿아 있는 보덴 호수에 면해 있는 호수 도시라는 지리적 특성을 잘 살렸다.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축제라는 한계를 2년에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강수를 두면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방법으로 뛰어넘었다.
야외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오페라 축제는 음향학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이나 베로나의 고대 원형경기장인 아레나,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 남부 장크트 마르가르텐에서 열리는 채석장 오페라 축제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넓은 야외무대와 7000석에 육박하는 브레겐츠는 사정이 다르다. 소리가 모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마이크와 스피커를 써서 오케스트라 반주와 가수들의 소리를 객석에 전달한다. 스피커 위치에 따라 객석에 소리의 착시 현상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잔향을 조정할 수 있는 미국 메이어사의 콘스텔레이션 시스템을 적용한다. 오페라 가수가 어느 위치에서 노래를 부르더라도, 무대에서 소리가 펼쳐지는 것처럼 들리게 한다. 다른 야외 오페라와 다르게 어느 정도 비가 오는 환경에서도 공연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가 실내에서 연주하기 때문이다. 연주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몫이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이 오페라 팬을 넘어 전 세계에서 주목받았던 건 2008년 개봉한 007시리즈의 22번째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데이비드 파운트니가 연출한 오페라 ‘토스카’ 무대가 스크린에 방영되면서이다. 필자도 그다음 시즌인 2009/10의 ‘아이다’를 시작으로 이번 달 24/25 시즌 작품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까지 15년간 8편의 작품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마술피리’, ‘투란도트’, ‘카르멘’, ‘리골레토’, ‘나비부인’ 등 전작보다는 ‘마탄의 사수’가 자주 오페라 무대에 오르는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효시로 여겨질 만큼 음악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 한 편의 컬트 무비를 보는 듯한 무대는 인상적이었다. 뮤직비디오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독일 출신의 필립 슈톨츨이 예술감독을 맡았는데 장르의 경계를 넘어 혁신을 선보이는 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부산도 얼마 뒤면 오페라 극장을 보유하는 도시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인구 300만이 넘는 메가 도시 부산은 신설되는 오페라극장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여론이 존재한다. 인구 3만의 도시도 이렇게 멋진 오페라 축제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2024-08-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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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피크닉과 함께 즐기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영국 이스트 서식스주 글라인드본(Glyndebourne)에서는 매년 5월 중순부터 8월까지 열리는 근사한 오페라 축제가 있다.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이다. 꽤 실력 있는 오페라 프로덕션과 이름 있는 오페라 가수들이 출연하는 90년 역사를 가진 오페라 축제이지만, 오늘 소개할 시그니처 문화공간은 오페라극장이 아니라 글라인드본의 영국식 정원이다.
10년 전 이 축제를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의아했던 건, 생각보다 긴 인터미션 시간이었다. 러닝타임이 긴 바그너 오페라도 아니고 2시간 남짓의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었는데 막 사이 90분이라는 비교적 긴 인터미션의 존재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방문과 동시에 그 의문은 풀렸는데, 오페라 막간에 즐기는 피크닉 디너 덕분이었다.
서식스(Sussex) 지방에 꽤 넓은 영지를 가진 작곡가이자 연극 연출자인 존 크리스티는 소프라노 오드리 밀드메이와 결혼과 동시에 그들의 땅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하고 1934년 완공한다. 축제 첫해에는 모차르트 오페라 ‘코시 판 투테’와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되었는데, 꽤 큰 성공을 거둔다. 현재는 손자인 거스 크리스티가 가문의 영지에서 축제를 이어 오고 있는데 올해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을 즐기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준비한다. 드레스 코드와 피크닉이다. 여성 관객은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고, 남자들은 검은색 정장과 보타이, 파나마모자를 착용한다. 그리고 피크닉 박스에 준비해 온 갖가지 음식과 와인을 아름다운 정원 위 원하는 곳에 테이블을 펼친다. 여행객이어서 테이블과 피크닉 박스를 준비하기 쉽지 않다면, 주최 측에 사전 요청하면 된다. 본인이 원하는 자리를 지정한 뒤 오페라 1막을 마치고 돌아오면 근사한 정원에서 야외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내부가 목조로 마감된 1200석 규모의 오페라극장은 어느 좌석에서도 무대가 가까이 보이게끔 설계되었다. 그래서 1층인 스톨과 2층, 3층의 발코니도 금액에 편차가 없다. 이번 시즌은 비제 오페라 ‘카르멘’, 레하르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 헨델 오페라 ‘줄리어스 시저’,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무대에 올랐다. 필자는 ‘유쾌한 미망인’을 지난주 관람했는데, 무대와 연출, 연주자 기량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최근 국내에서도 각양각색의 축제가 펼쳐진다. 축제의 홍수라고 할 만큼 유사한 축제가 줄을 잇고 있다. 흥행을 위해서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인기 가수를 초청하는 것도 다반사다. 여기에 살짝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의 시그니처인 피크닉 디너를 차용하면 어떨까? 야외 피크닉이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어릴 적 소풍을 생각하면 우리 추억의 책갈피에도 한 장면 있는 내용이다.
아트컨시어지 대표
2024-08-0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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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위도가 가장 높은 공연장 '하르파'
북위 66도부터 북극권이라 부른다. 여름이면 해가 지지 않는 백야와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 극야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아이슬란드는 이 지역에 면해 있고, 수도 레이캬비크는 북위 64도에 해당한다. 이곳에 ‘하르파(Harpa)’가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도가 높은 극지방에 위치한 공연장이다.
필자는 새로운 도시를 방문할 때면 공연장과 미술관과 같은 문화공간을 사전에 찾아보는 게 루틴이다. 하지만 아이슬란드는 전체 인구가 30만 명, 수도 레이캬비크 인구는 12만 명에 불과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객석 수 1800석의 콘서트홀을 만난 것이다. 결국 일정을 조정해서 하르파에서 아이슬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2011년 개관한 하르파는 레이캬비크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역사가 길지 않음에도 건축과 콘서트, 콘퍼런스 센터로서 이미 많은 수상 경력이 있다. 2013년 ‘미스 판 데어 로에’ 현대 건축상을-EU 집행부와 미스 판 데어 로에 재단이 2년마다 유럽 최고 건축물에 부여한다-수상했으며, 1923년 창간한 클래식 전문 매거진 영국 그라모폰에서는 2000년대 이후 지어진 최고의 콘서트홀 중 하나로 선정했다. 아이슬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업해 제작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립 글래스의 현대음악 연주, 윈튼 마살리스와 같은 재즈 뮤지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같은 세계적인 단체도 이곳에서 연주한 이력이 있었다.
더욱 흥미로운 건 하르파는 덴마크의 건축사무소 헤닝 라르센 아키텍츠와 아이슬란드계 덴마크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이 합작해 설계했다는 점이다. 헤닝 라르센은 코펜하겐 오페라극장을 디자인한 전위적인 건축가 중 한 명이며, 올라퍼 엘리아슨은 자타공인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가이다. 이들이 협업해서 만든 파사드는 하르파를 가장 특징적으로 만들어 준다. 유리와 철제로 이루어진 하르파 전체 건물의 구조는 화산섬인 아이슬란드의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 절벽에서 착안했다. 현무암의 수많은 구멍 모양에서 나온 기하학적인 모듈 구조는 마치 아이슬란드 해변에서 마주할 수 있는 주상절리와도 같다. 북구의 자연을 건물에 가져온 것이다.
하르파의 한 면은 바다 쪽을 향하고, 다른 한 면은 레이캬비크 도시를 향해 있다. 이는 설계 단계부터 건물이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콘서트나 오페라 감상이 아니더라도 낮에도 언제든지 방문해서 도시 경관을 보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열린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극지방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문화로 극복한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2024-07-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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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10년 담금질로 태어난 플래그십 콘서트홀, 엘프필하모니
브람스가 태어났고, 비틀스가 실제로(리버풀이 아닌 함부르크 리퍼반) 데뷔했으며, 말러도 지휘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오페라극장이 있는 곳이 함부르크다. 현재는 세계적인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이끄는 함부르크 국립발레단과 독일 명문 NDR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이 이 도시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또한 스테이지 엔터테인먼트가 운영하는 네 곳의 뮤지컬 전용 극장에선 ‘라이온 킹’을 비롯한 동시대 흥행 뮤지컬이 매일 밤 공연된다. 2017년엔 엘프필하모니가 개관했다.
엘프필하모니가 위치한 부지는 과거 항구로 쓰이다가 새로운 항구가 개발되면서 지역 전체가 창고로 변했다. 게다가 유럽이 철도와 고속도로망으로 통합되면서 항구 물동량이 감소했고,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에 함부르크시는 2000년 하펜시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오래된 항구의 창고들을 사무실, 호텔, 상점, 오피스빌딩과 주택지역으로 변모시키려는 계획이다. 그 중심에 함부르크 최고층 주거빌딩과 호텔 위에 지어진 콘서트홀 엘프필하모니가 있다.
하지만 엘프필하모니가 탄생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2010년 첫 함부르크 방문 당시 엘프필하모니 공사 현장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겉보기에는 이내 손님을 맞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개관은 여러 차례 연기됐다. 예정 부지였던 곡물 창고는 건축사적 의미가 큰 것으로 밝혀지면서 문화재로 지정돼 함부르크시는 기존 창고 건물 위에 새 건물을 올리기로 한다. 3년으로 예상된 건축 기간은 10년 가까이 소요됐고, 2억 4100만 유로로 예상한 예산은 3배가 넘는 8억 6600만 유로, 현재 환율로 따지면 한화 1조 2000억 원이 넘는다.
갈등과 우려 속에 태어난 엘프필하모니는 대성공이었다. 2017년 개관 후 7년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함부르크의 이 랜드마크를 찾고 있다. 필자도 7년간 공연 관람을 위해 다섯 차례 걸음 했는데, 방문할 때마다 그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가장 최근 통계를 보니 콘서트홀 방문을 비롯해, 함부르크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플라자까지 연인원 360만 명이 엘프필하모니를 찾는다고 한다. 하루에 1만 명이 방문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난 공간 중 상당수는 원안대로 순조롭게 진행하지 못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그렇고, 필하모니아 드 파리도 그렇다. 대부분 부침과 갈등이 있고, 공기가 연장됐으며, 공사비가 갑절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태어났다. 그만큼 제대로 된 문화공간을 만나는 일은 녹록지 않다. 북항에 서게 될 부산 오페라하우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계획과 다르게, 애정과 기대로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만큼 제대로 된 시그니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2024-07-1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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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사립미술관 '반스 재단'
일 때문에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종종 있다. 이번 달도 기회가 있어서 미국 동부의 주요 공연장과 미술관을 다녀왔다. 오늘은 미국 동부에 있는 필라델피아의 한 사립 미술관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반스 재단(Barnes Foundation)이다.
필라델피아의 의사이자 사업가 그리고 미술 수집가인 앨버트 반스(1872~1951) 박사는 1912년부터 필라델피아와 파리를 오가며 예술 작품에 심취했다. 또한 앙리 마티스와 폴 세잔, 오귀스트 르누아르,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화가와 교류하면서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워 갔다. 그는 사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수집가에게 얼마나 힘을 실어 주는지 파악했으며, 파리의 수많은 옥션 회사를 통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왕성하게 구입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고향인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정육점 주인의 아들이었던 반스의 안목을 깎아내렸다. 1923년 자신의 컬렉션 중 일부를 펜실베이니아 예술 아카데미에서 전시했으나, 현지의 냉담한 반응과 평론가들의 차가운 시선에 이내 전시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컬렉션이 혹평받는 것을 경험한 반스는 보다 독립적이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신의 재단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문화적 자본이 결핍한 흑인과 노동자 계급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예술이 정신을 개선하고 삶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 믿었고, 그가 수집한 독특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반스 재단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미술을 보는 방법을 가르쳤다.
현재 반스 재단은 르누아르 181점, 세잔 69점, 마티스 59점, 피카소 46점 등 후기 인상파를 중심으로 약 3000점의 회화와 조각, 장식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는 필라델피아뿐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사립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르누아르의 경우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 다음으로 많이 소장하고 있다.
특히 반스 재단의 층고가 높은 메인 홀 높은 창 위로 난 3개의 아치에는 마티스가 직접 그린 벽화 ‘춤’이 있다. 흔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시 박물관과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 있다고 알고 있는 ‘춤’이 반스 재단에도 있다. 놀라운 것은 반스의 요청으로 마티스가 직접 필라델피아를 방문해서 제작한 작품이다.
1951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반스는 괴짜 수집가답게 지역의 작은 흑인 대학인 링컨대학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기증했다. ‘자신이 기획한 그대로 전시를 이어갈 것과 작품의 복원 금지, 판매와 대여 금지 그리고 단일 작품 전시 금지.’ 덕분에 반스 재단의 23개 방(전시실)에는 동서남북 4면이 반스가 의도한 방식대로, 그의 안목으로 소장하고 꾸민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시되고 있으며, 온오프라인으로 여러 미술 프로그램이 꾸준히 운용되고 있다.
2024-06-2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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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세계 최대의 구(球)형 공연장, 스피어(Sphere)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도시를 손꼽으라면 미국 네바다주에 위치한 라스베이거스를 이야기할 것이다. 대형 카지노와 리조트가 밀집한 스트립 구간 호텔 내 공연장에서는 매일 밤 개성 넘치는 쇼들이 열리고 사람들로 가득 찬다. 최근엔 지난해 9월 정식 개관한 ‘스피어(Sphere)’가 보태졌다.
스피어는 개막 전부터 화제였다. 천문학적인 제작 비용 덕분이다. 애초 12억 달러로 예상했던 건립 비용은 몇 차례의 설계 디자인 변경, 물가 상승 등의 요인으로 두 배에 가까운 23억 달러(약 3조 1600억 원)까지 증가했다. 이는 엔터테인먼트 사상 역대 최고 제작비다.
두 번째로 놀라운 건 규모다. 높이 111m, 지름이 157m인, 아파트 40층 높이의 스피어는, ‘자유의 여신상’이 이 거대한 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스피어 외부에 쓰인 LED의 전체 면적은 축구장 2개 반 크기와 맞먹는 5만 4000㎡. 120만 개 LED가 시간에 따라 다양한 영상을 구현하고 있다. 얼마 전 공개한 삼성전자의 갤럭시 S24 언팩 행사 홍보도 스피어를 통해 선보였다. 업계에 따르면 스피어 외벽 광고 비용은 하루에 45만 달러, 한화 6억 원이 넘는 비용이다.
스피어 내부는 9개 층으로 이뤄졌고, 연면적은 8만㎡가 넘는다. 메인 통로로 들어가면, 5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스피어의 큐레이션을 담당한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층과 층을 가로 잇는 대형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는 동안은 마치 우주에 온 듯한 분위기의 조명과 홀로그램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피어의 핵심은 볼륨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대형 공연장이며, 그 자체가 첨단 기술과 혁신의 산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해상도가 높은 LED 스크린이 내부의 객석과 바닥을 제외한 나머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면적만 1만 5000㎡에 달하며 해상도는 18K에 이른다. 내부에는 16만 개의 스피커가 설치돼 있고, 4D를 구현하기 위해 바람, 진동 등을 전달하는 시스템이 좌석마다 갖추어져 있다. 하루에 많게는 4차례 공연(상영)하는데, 시간에 따라 79~249달러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현재는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이 만든 ‘지구에서 온 엽서(Postcard From Earth)’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 중이다.
그런데 필자의 감상평은 경이로움도 있지만 결국 파노라마 영화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스피어 흥행을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만, 후속 콘텐츠도 중요하다. 당장 경기도 하남시가 추진 중인 ‘스피어 하남’이 우려됐다. 외국의 대형 콘텐츠를 국내에 도입하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지만, 투자와 유치는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해서 접근해야 한다.
2024-06-1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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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지역의 역사·예술·자연 함께 담아낸 '루마 아를'
스위스 출신의 유명 컬렉터 마야 호프만이 1억 5000만 유로(당시 한화 약 2100억 원)를 기부해 만든 ‘루마 재단’은 2004년부터 환경, 문화, 교육, 인권 등을 주제로 한 시각예술 창작을 지원하고 있다.
루마 재단은 프랑스 남부 아를의 국영 철도회사 부지에 2013년 전시회, 콘퍼런스, 라이브 공연 등을 통해 예술과 문화, 환경, 교육·연구에 대해 탐구하는 학제 간 창의적 예술단지를 시작했는데, 바로 ‘루마 아를(Luma Arles)’이다. ‘아틀리에의 공원’이라는 뜻의 부속 건물인 ‘파크 데 자틀리에’를 비롯해 ‘그랜드홀’, ‘포르주’, ‘메카닉 제네랄’에서 연중 각종 문화 이벤트가 개최된다.
이 중 연면적 1만 5000㎡ 규모의 ‘타워’가 완공과 동시에 주목받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프리츠커 수상자이자 파리의 루이뷔통 재단,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했다. 루마 아를 타워는 단번에 오래된 도시 아를에 현대미를 갖춘 랜드마크가 되었다.
2000년 전 로마 시대부터 역사가 누적된 고도 아를, 15개월간 거주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긴 반 고흐의 도시에 위치할 현대적인 문화공간을 그가 어떻게 풀어낼지는 일찌감치 세간의 관심이었다. 구도심 자체가 뮤지엄인 아를의 역사성과 잘 조화될 수 있는 것이 기본 목표였다. 루마 아를은 게리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스테인리스 벽돌 1만 1000개와 유리 박스 53개가 일정한 패턴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원통형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뒤틀리는 형태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온도의 햇빛을 반사한다. 이는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연상되기도 하며, 레보드프로방스 지방의 거친 암석 같기도 하다.
타워 저층부는 지름 54m의 투명한 원통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내외부를 완충하는 동시에 건물의 라운지 역할을 한다. 구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고대 로마 유적 중 하나인 ‘아를 아레나’가 오버랩 된다. 높이 56m 타워의 최상층인 9층 테라스에 오르면 광활하게 펼쳐진 ‘크로 평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론강과 카마르그 늪지, 알피 산맥, 도시 아를이 한눈에 들어온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7월 개관한 루마 아를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필자도 개관 이듬해와 지난달 두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컨텍스트와 텍스트. 맥락과 내용을 하나의 건축물로 풀어낸 공간이 얼마나 있을까? 루마 아를은 아를의 역사와 예술 그리고 주변 자연까지 한 건축물에 담아냈다. 오래된 고도 위에 불쑥 선 건축물이 이질적이지 않은 이유이다.
2024-05-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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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예술과 과학의 도시' 발렌시아와 북항
발렌시아는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하지만 쉽게 찾는 곳은 아니다. 우선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와 달리 국내 직항편이 없으며, 두 도시와의 거리도 각각 350㎞씩 떨어져 있다. 관광지로 주목받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와도 500㎞ 거리에 있어서 특별한 방문 목적이 없으면 여행 일정에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도시의 콘텐츠는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가끔 발렌시아 전통음식인 파에야가 언급되는 정도다.
필자는 지난달 발렌시아를 방문했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 복합문화단지 내에 있는 오페라극장 ‘레이나 소피아 예술궁전’에서 공연된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 일정에 맞춰서이다.
신미래주의 건축가 중 한 사람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디자인한 ‘예술과 과학의 도시’는 1998년 개장됐다. 한 해 앞서 개관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거의 비슷한 시기이다. 부지는 1957년 발렌시아 대홍수로 강 방향이 바뀐 후 정원이 된 투리아강의 수로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규모는 길이 2㎞, 35만㎡에 이른다. 단지 내에는 2개의 다리와 아이맥스 영화관인 에미스페릭, 펠리페 왕자 과학박물관, 식물원과 야외 조각공원으로 쓰이는 움브라클, 유럽 최대 규모의 수족관인 오세아노그라픽, 레이나 소피아 예술궁전 그리고 컨벤션센터로 쓰이는 아고라까지 6개의 건축물이 있다.
발렌시아는 그동안 예술과 건축 분야에서 수도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 밀려 있었으나 ‘예술과 과학의 도시’가 완공되면서 빌바오 구겐하임의 성공에 버금갈 만큼 주목받는 도시가 되었다. 공주와 왕자 이름으로 된 과학관과 오페라극장이 다소 생경할 수 있는데, 레이나 소피아는 스페인의 전 국왕 후앙 카를로스 1세의 아내이자 2014년 왕위를 물려받은 현 국왕 펠리페 6세의 어머니이다.
레이나 소피아 예술궁전은 투구 형태의 독특한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인상적이었다. 극장 안팎을 이어 주는 완충공간 격인 로비와 라운지는 자연 채광이 들어와 안락했다. 객석은 평일인데도 거의 만석이었다. 발렌시아 현지인들의 오페라를 즐기는 문화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오페라가 끝날 무렵엔 펠리페 왕자 과학박물관을 다녀오는지 자녀가 있는 가족이 눈에 많이 띄었다.
돌이켜 보니 과학과 예술 그리고 교육이 어우러진 공간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싶었고, 단지를 가득 메운 아이들의 모습에서 건강한 미래가 엿보였다. 이미 20여 년 전에 개장한 시설이라는 게 새삼 놀라웠다. 북항이 오버랩됐다. 엑스포 유치는 멈췄지만, 북항 개발도 예술과 과학이 어우러진 멋진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랐다.
아트컨시어지 대표
2024-05-1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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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이우환
문화적으로 역량이 있는 대도시 미술관은 한두 개로는 역할을 다하기 어려워 분담한다. 장르로 구분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시기로 나뉜다. 프랑스 파리의 주요 미술관이 그러하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이 1848년을 기점으로, 또 다른 퐁피두 미술관은 1914년을 기점으로 오르세 미술관과 시대를 구분해서 전시된다. 독일 베를린도 마찬가지이다.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과 구 국립미술관은 시대별로 나뉘고,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으로 다시 세분된다.
함부르거 현대미술관(Hamburger Bhanhof)에서 반호프(Bahnhof 줄여서 Bhf.)는 기차역을 의미하는데, 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된 건물이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884년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1906년 교통-건축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단장하였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본격적인 복원은 베를린 도시 탄생 750주년을 맞아 국가 차원에서 진행돼 1996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기차역을 복원해서 전시장 외관도 내부도 독특하다. 열차 플랫폼이었던 큰 홀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연결된 여러 개의 전시관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을 찾았던 이유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달 28일까지 이어진 이우환 선생의 전시가 있어서다.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이다. 2010년엔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합작으로 일본 나오시마에 이우환 미술관을 개관했고, 2015년에는 부산시립미술관 내 이우환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상설 공간이 마련됐다. 2022년은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에 이우환 미술관(Lee Ufan Arles)이 열렸다. 그리고 세계 미술계의 중심이 된 도시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 회고전은 선생의 경력에 정점을 찍는 중요한 전시라고 생각했다. 2000년까지는 독일에서 자주 전시했으니, 독일이 선생을 세계로 나가게 뒷받침한 셈이다.
함부르거 반호프 초청 특별 회고전은 이우환 창작 인생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57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망라했다.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동풍, 조응, 관계항, 모놀로그 등 그의 작품은 사물이 배치된 공간과 나의 관계를 세워 주고, 이를 통해 세계를 열어 준다. 사물 그 자체보다는 전시된 사물이 외부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데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에도 많은 베를린 시민이 걸음 하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전시 말미인 지난달 18~20일은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한국인 지휘자 김은선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해 화제가 되었다. 유럽을 대표하는 문화도시 베를린에서 음악과 미술, 우리 K예술이 활약하는 장면들에 가슴 뛰었던 시간이다.
2024-05-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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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고대도시 로마에서 만나는 미래건축 '맥시'
이탈리아 로마는 서구 유럽과 인류 문화의 중심이자 시작이다. 그런데 현대의 문화로 한정하면 다소 이야깃거리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는 로마의 너무나도 많은 문화유산과 유적과 같은 콘텐츠에 가려진 착시일 뿐 현재의 로마도 놀랍게 변화하고 있고, 그 중심에 국립21세기미술관, 맥시(MAXXI)가 있다.
맥시는 이탈리아어로 ‘Museo nazionale delle Arti del XXI secolo’, 즉 국립 21세기 미술관(National Museum of XXI Century Arts)이란 뜻의 약자로, 로마 플라미뇨 지구에 위치한 국립현대건축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이탈리아 문화유산부 산하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이라크 출생의 영국 국적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했다. 국내에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로 잘 알려져 있다.
맥시는 설계와 시공의 특수성 때문에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2010년 완공되는데, 자하 하디드 디자인은 국제 공모전에 출품된 273개 디자인 가운데 당선된 작품이다. 당시 렘 콜하스, 장 누벨, 스티븐 홀과 같은 쟁쟁한 건축가를 물리치고 선정됐다. 또한 유럽 최고의 건축물에 수여하는 영국 왕립건축가협회(RIBA) 스털링 건축상을 수상했다.
맥시는 크게 미술관과 건축관 두 개의 건축물로 이루어진다. 내부는 오디토리움과 미디어 도서관, 서점, 카페 그리고 기획전시나 공연, 교육 등을 위한 갤러리가 포함됐다. 미술관 주변의 야외 중정은 대규모 예술작품 설치 공간으로 제공되고 있으며, 현재는 니키 드 생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맥시 외관은 대로에서는 바로 눈에 띄지 않는다. 곡선으로 된 벽과 외관, 각 층은 서로 다른 층고를 가지고 변하고 있으며, 만나는 교차점마다 방문객은 다양한 경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이는 매우 다채로운 공간적, 기능적 구성을 제공한다. 또한 원래 부지로 쓰였던 육군 막사에 대한 지표성을 유지함으로써 도시적 맥락에 대한 접근도 고려됐다. 특수 지붕 시스템은 내부를 자연광과 조명을 조화롭게 가동해 편안한 관람 환경을 제공한다.
맥시의 예술품 컬렉션은 최신 작품과 과거 경험 사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수집된 회화, 설치, 비디오 아트, 조각, 사진 등 400여 점으로 구성됐다. 시기적으로는 1960년대에서 20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탈리아와 해외 작가들 작품이다. 또 이 작품은 신예 작가들과 상호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 컬렉션의 핵심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어쩌면 고대도시 로마의 수많은 유적 사이에서 특별하게 존재하는 이 미술관의 존재와도 맥을 같이 한다. 유니크함과 맥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2024-04-1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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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2차 대전 벙커가 미술관으로 변신, 잠룽 보로스
전 세계 주요 수집가의 미술관이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관람객을 만나는 곳이 제법 된다. 스위스 루체른의 로젠가르트 컬렉션, 프랑스 파리의 피노 컬렉션, 미국 휴스턴의 메닐 컬렉션, 뉴욕의 프릭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독일 베를린의 잠룽 보로스도 그러하다. 독일어로 잠룽(Sammlung)은 컬렉션이란 뜻이다.
광고업계의 성공한 사업가인 크리스티안 보로스는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할 베를린의 역사적인 장소를 물색했고,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3년 히틀러 명령으로 건축가 카를 보나츠가 설계한 벙커를 2003년 구입한다. 다른 벙커와 마찬가지로 전쟁 직후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가 이후 꽤 오랫동안 직물과 과일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였던 공간이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2년부터는 테크노 클럽으로 바뀌었다.
베를린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에 대비해 자국민을 대피시키기 위한 벙커가 곳곳에 남아 있다. 독일인에게 벙커는 참혹한 역사의 잔해이다. 벙커를 부수지 않고 보존하는 곳이 적지 않으며, 도심 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 벙커는 과거를 넘어 미래로 향하고 있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곳이 베를린 미테 지역에 위치한 라이히스반 벙커이다.
보로스가 인수한 라이히스반 벙커는 그의 컬렉션을 담은 현대미술관으로 바뀌었다. 건축가 캐스퍼 뮐런 니어에 의해 베를린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현재는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적어도 한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할 만큼 인기가 많다.
건물을 처음 마주하였을 때 그 육중한 콘크리트 매스가 주는 위압감에 놀라게 되고, 내부로 들어가면 창 하나 없이 폐쇄적인 공간을 잇달아 만나게 되면서 긴장감마저 돈다. 하지만 회화부터, 조각, 설치미술, 비디오, 사진 등 독립적인 공간마다 각기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그 긴장감은 이내 호기심으로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진입로가 사면으로 뚫려져 있어 똑같은 4개의 파사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입구가 어디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단 하나의 사인물도 건축물 외관에는 없다. 예약 시간이 되어 내부에서 문을 열어주었기에 메인 파사드와 입구를 알 수 있었으며, 이마저도 두 개의 철문으로 된 입구 중 하나는 거대한 돌로 막혀 있어, 무언가 역사적 사건 현장 한가운데 있는 분위기를 연출시킨다.
부산에도 200여 개의 근대건조물이 있고, 문화재 수준의 가치가 있는 건조물을 2010년부터는 근대건조물로 지정, 관리하는 조례가 제정되었다. 하지만 손이 미치지 못한 40여 곳은 이미 사라졌고, 시비로 매입해 운영하는 곳도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방치되기도 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2024-04-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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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공동주택의 반전, 야마모토 리켄의 '판교 하우징'
지난 5일(현지시간) 일본의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79)이 올해의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로써 일본은 1979년 이 상이 제정된 이래 8회에 걸쳐 총 9명(2010년 수상자 ‘SANNA’는 세지마 가즈요·니시자와 류에 공동 수상)이 수상해 미국과 동률(8회)이 되었다. 한국인 수상자는 아직 없다.
야마모토 리켄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뒤 그가 설계에 참여한 경기 성남시 ‘판교 하우징’(월든힐스 2단지 아파트)과 서울 ‘강남 하우징’(세곡동 보금자리주택 3단지)이 주목받고 있다. 국내 소재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건축을 탐방 중인 필자는 이번 주 판교 하우징을 다녀왔다.
방문에 앞서 월든힐스 2단지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공동주택이 위치한 분당구 산운마을을 검색했다. 그중 눈에 는 글이 하나 있었는데 ‘미분양 굴욕 10년 이후, 일본 건축가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 사연이었고, 이에 화답하고자 지난 2020년 1월 스태프 20명과 함께 건축가가 2박 3일 내한했다는 기사였다. 바로 야마모토 리켄과 판교 하우징 이야기다.
판교 하우징은 모든 주택이 현관으로 통하는 2층의 공유 테라스를 가지고 있으며, 마주 보고 있는 각 세대 현관은 사방이 유리 벽인 현관홀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공동주택 설계 때 이웃 간 프라이버시 확보라는 공식과도 같은 명제를 깨트렸다. 이런 연유로 산운마을 최초로 미분양 사태를 초래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세대 간 공동체가 결속되는 반전의 결과가 나타났다. 거주자들은 투명한 현관홀을 응접실로 쓰고, 개방된 창을 통해 이웃과 인사하며 지내고 있었다. 자연 환기와 시간에 따른 볕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는 공동주택이 된 것이다. 공간이 거주자의 삶을 바꾼 셈이다.
현재의 ‘1가구 1주택’ 모델의 수정, 이는 가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새로운 주거 모델을 요구한다. 미래 주택에 대한 새로운 상황 인식과 건축가로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곳이 판교 하우징이다. 주택문제를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고,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공간에 반영됐다.
산술적으로는 주택보급률 100% 초과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내 집’을 꿈꾸는 동안 대다수 주택은 밀실이 되었고, 주변 환경은 피폐해졌으며, 지역 커뮤니티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건축은 사람을 연결해야 한다. 단순히 사생활을 중시하는 사회가 아니라 주민들이 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 건축 개념을 선보인 야마모토 리켄이 이 시대에 주목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2024-03-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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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삶의 표준 제시한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한스 샤로운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건축가를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설렘으로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Die Weissenhofsiedlung)’를 한걸음에 달려갔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지금으로부터 97년 전인 1927년 독일공작연맹과 슈트트가르트시 지원으로 건설됐다. 독일공작연맹은 예술, 건축, 산업 간 통합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예술가와 건축가들의 단체였다. 이 단체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심각한 주택문제에 관심을 두고 새로운 건축 재료와 기술을 활용한 실험적인 주거단지 개발을 추진한다. 여기에 당시 30, 40대의 젊은 건축가 17명이 대거 참여하는데, 훗날 이들은 20세기 현대건축의 거장이라는 반열에 서게 된다.
20세기 최고 건축가 중 한 사람인 르 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새로운 건축 재료와 기술을 통해 변화하는 근대 건축의 모습을 5가지 원칙으로 제시했다. 이 5가지 원칙인 필로티, 옥상정원, 수평 연속창, 자유로운 입면(파사드), 자유로운 평면은 바이센호프 내 르 코르뷔지에 주택에서도 구현됐다. 현재 이 주택은 전체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면서 1927년 당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Less is More(적을수록 풍요롭다)”라는 명언을 남긴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이센호프 계획과 건설 총감독을 맡았다. 그는 24세대가 거주하는 4층 규모 공동주택을 디자인했다. 장식을 최소화했기에 “Less is Bore(적을수록 지루하다)”라는 말로 비난도 받았지만, 기능적이면서 경제적이고, 또한 표준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어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다.
한스 샤로운은 베를린 필하모니 콘서트홀을 만든 건축가이다. 기능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설계된, 최초의 빈야드 형태의 콘서트홀로 공연장 건축의 새로운 원형을 제시했다. 바이센호프 건축 때도 건축물에 필요한 기능을 자연스레 도면에 표현했다. 거주자의 생활방식, 공간 이용 패턴, 부지 위치와 특성을 고려해 주택 각 공간의 형태를 결정했다.
바이센호프 프로젝트로 지은 총 33채의 주택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돼 현재는 11채만 남아 있다.
거장들이 설계한 주택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하지만 지금의 눈높이로 평범해 보이는 공간과 기능은 당시는 새로운 시도였고, 현재까지도 유효한 방식이라는 점은 놀라웠다.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개막식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집을 설계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설계했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바이센호프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들의 고민과 정신을 다시금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2024-03-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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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백색 건축가' 리차드 마이어가 설계한 솔올미술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들이 만든 공간이 국내에도 제법 만들어졌고, 계획 중인 프로젝트도 다수 있다. 초기에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 정도가 제주도를 시작으로 몇 곳 선보이는 수준이었지만, 근래에는 제법 많은 건축가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도드라지는 분야가 미술관과 박물관과 같은 전시 공간이다.
안도 다다오의 뮤지엄 산·유민미술관·본태박물관을 시작으로 장 누벨의 삼성미술관 리움, 렘 콜하스의 서울대 미술관, 알바로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헤르조그 & 드 뮈롱의 송은 아트스페이스 등이 해당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스타 건축가이자 프리츠커 수상자인 리차드 마이어에 의해 지난 14일 강릉 솔올미술관이 개관했다.
리차드 마이어의 주요 작품 역시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미국 애틀랜타에 위치한 하이 뮤지엄과 로스엔젤레스의 게티 센터가 있다. 유럽에는 독일 바덴바덴의 프리더부르다 미술관과 프랑크푸르트 장식미술관 그리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현대미술관이 잘 알려져 있다.
건축계에서는 그를 ‘백색의 건축가’로 부른다. 건축물 외관을 백색으로 하고 자연광과 주변 경관을 최대한 활용한다. 백색 건축은 주변 모든 색깔의 빛을 담아내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이 공간과 건축물에 투영되도록 한다. 리차드 마이어의 ‘시그니처’이다.
지난 주말 솔올미술관을 찾았다. 현대미술의 아이콘인 루치오 폰타나의 개관 전시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미술관 건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다녀올 만했다. 리차드 마이어는 2018년 ‘미투’ 운동 당시 불명예스럽게 은퇴했지만, 그가 만든 회사 마이어 파트너스와 그의 철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미술관 로비에 들어서면 일체의 조명이 불필요할 만큼 자연광이 내부 공간 깊숙이 들어왔다. 자칫 차가울 법한 백색 마감에 온기가 더해진다. 3개의 전시실은 높은 층고의 큐브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공간을 잇는 수평, 수직 동선의 외부는 큰 유리창으로 되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외부와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솔올미술관은 미술과 건축이 분리되지 않고 어우러지는 콘셉트로 계획되었고, 미술, 자연, 사람이 함께하는 개방된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이 솔올미술관 개관과 초기 운영을 맡고 있는데, 그 첫 프로젝트로 ‘루치오 폰타나:공간·기다림’과 ‘In Dialog:곽인식’ 두 개의 개관 전시를 오는 4월 14일까지 선보인다. 이는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함께 조명한다는 솔올미술관의 비전이기도 하다. 강릉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지 기대된다.
2024-02-22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