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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서울 자가 김 부장'을 보며
요즘 화제작인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중년판 미생’으로 불린다. 대기업 부장으로 일하며 승승장구했던 50대 직장인 김낙수(류승룡 분)가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한직으로 좌천되는 등 위기를 겪은 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직장 생활의 희로애락을 코믹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해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드라마 속 승진 경쟁과 좌천, 사내 정치, 회식 문화, 희망퇴직 종용, 부동산 투자 실패 등을 보면 남의 얘기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내용 못지않게 눈길을 끈 것은 제목이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은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이미지로 통한다. 극 중의 김낙수 역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부장’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존감을 채운다.
‘서울 자가’를 소유한 드라마 속 김 부장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그가 첫 집을 장만하던 시절의 서울 아파트 가격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을 것이다. 김 부장처럼 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하려면 이제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4년가량을 꼬박 모아야 한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16일 발표한 ‘2024년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자가 가구의 ‘연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배수’(PIR·Price to Income Ratio)는 중간값 기준 13.9배였다. 서울 주택 가격 중간값인 8억 원과 평균 연 소득 5760만 원을 대입하면 나오는 수치다. PIR은 월급을 고스란히 모았을 때 집을 장만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뜻한다. 서울의 자가 가구 PIR은 2022년 15.2배에서 2023년 13.0배로 하락했지만, 지난해 증가로 돌아섰다. 권역별 PIR은 수도권이 8.7배로 2023년 8.5배보다 늘었다. 부산을 비롯한 광역시는 6.3배로 전년과 같았고, 도 지역은 2023년 3.7배에서 4.0배로 증가했다.
다주택자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전국의 자본이 ‘똘똘한 한 채’만 바라보며 서울 강남 3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 등 한강벨트 부동산으로 유입되면서, 수도권과 지방의 초양극화는 심화하고 있다. KB부동산의 월간 시계열 통계에 따르면 지난 8월 전국의 아파트 5분위 배율은 12.1을 기록했다. 가격 상위 20% 평균을 하위 20% 평균으로 나눈 값으로, 배율이 높을수록 상위와 하위 가격 격차가 크다. 하위 20%인 지방 아파트 12.1채를 팔아야 상위 20%인 서울의 고가 아파트 1채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12월 해당 통계 집계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다고 한다. 서울의 고가 아파트가 연일 신고가를 쓰는 반면, 지방에서는 인구 유출과 집값 하락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수도권의 과열 양상과 지방의 공동화가 맞물리면서 지역 간 자산 격차는 더 벌어지는 것이다.
특히 다주택자에 대한 규제는 수도권 주택 가격만 끌어올려 지역 간 주택 경기 양극화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지난 8월 ‘세컨드 홈’ 적용 지역을 기존 ‘인구감소지역’에서 ‘인구감소관심지역’까지 확대했다. 강원 강릉·동해·속초·인제, 전북 익산, 경북 경주·김천, 경남 사천·통영 등 9곳이 추가로 ‘세컨드 홈’ 특례를 받게 됐다. 하지만 주택 가격 상승을 우려로 광역시는 제외했다. 취득세와 양도소득세를 완화하는 강력한 ‘세컨드 홈’ 정책을 광역시 등 비수도권 전반으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 집을 사는 사람들에게 규제가 아니라 혜택을 오히려 늘리는 게 마땅하다. 수도권과 차별화된 지방 부동산 활성화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지방 부동산 침체 외에도 우려스러운 것은 청년층의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월급을 수십 년 모아도 10억 원이 넘는 수도권 아파트 한 채를 사기 어렵다. 고금리, 정체된 임금, 불안한 고용과 치솟는 집값 사이에서 이들의 내 집 마련 꿈은 요원해지고 있다. 정부가 청년 중심의 주거정책 대전환을 통해서 주거 사다리를 제공해야 한다. 청년 가구의 주거 실태와 생애주기별 주거 요구를 면밀히 파악하고, 실수요자에 대한 맞춤형 정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전세자금 보증 확대, 청년형 공공임대주택의 지역별 공급 확대 등 생활 기반 실질적 지원이 요구된다. 또 소득이 높은 청년들은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해 주택 구매 기회를 확대하고, 저소득 청년들에게는 지분적립형 주택을 공급해 자산 형성 기회를 늘려줘야 한다. 지금 한국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의 인생을 결정짓는 부동산 세습 사회 조짐도 보인다. 청년의 노력만으로 계층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청년의 주거 이전과 자산 형성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청년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면 자산 격차와 삶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집 한 채가 인생을 갈라놓아서는 안 될 일이다.
2025-11-2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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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세대를 넘어 삶을 잇다
1970년 베트남전 참전 뒤 전쟁의 참혹함을 가슴에 새긴 채 40여 년간 장애인 복지에 헌신한 강충걸 씨, 국내 최초로 유도 8단 승단의 위업을 달성한 ‘여자 유도계의 대모’ 서경애 씨, 국내 최연소 국가기능검정 재단 1급 자격증을 따고 부산의 복식문화를 개척한 이영재 씨, 부산 영도구 제1호 여성 통장으로 수십 년간 봉사에 앞장선 이옥자 씨, 부산시 무형유산 부산고분도리걸립 예능보유자로 전통문화 보전과 전승에 일생을 바쳐 온 정우수 씨.
부산도시공사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지난달 펴낸 웹툰 자서전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에서 이들의 삶을 접했다. 부산도시공사 유튜브 채널인 ‘바다가튜브’에 나온 영상 자서전도 보았다. 70대인 이들의 공통점은 부산에 오랫동안 살면서 특유의 집념과 성실함, 재능을 바탕으로 각자 분야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뤘다는 점이다. 이들의 삶에는 한국전쟁과 피란, 신발 공장 취업, 베트남전 참전 등 부산과 한국의 현대사가 녹아 있었다. 이들은 부산시와 부산도시공사가 진행하는 도시재생 문화콘텐츠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사업’에 귀감이 되는 어르신으로 올해 참여했다. 이 사업은 지역 전문가와 관계 기관의 추천을 받은 어르신들의 일생을 재조명해 영상 자서전과 웹툰으로 서사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취지다. 이들은 도시재생 사업 고유 목적에 맞는 경제·사회·문화 재생 분야 어르신으로 참여했다. 사업 첫해인 작년에는 피란 수도 부산이라는 공간의 ‘과거-현재’를 연계해 어르신 5명을 조명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청년 크리에이터와 어르신들의 만남과 교감이다. 영산대 웹툰학과 재학생 등은 어르신을 인터뷰해 웹툰 자서전과 영상 자서전을 만들어냈다. 시니어 세대의 지혜와 인생 경험을 소재로 삼아 MZ 세대들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헌정 취지의 자서전을 제작한 것이다. 교감과 공감을 바탕으로 시니어와 청년들이 세대를 넘어 관계를 맺고, 삶을 잇는 콘텐츠를 협업한 셈이다. 부산도시공사는 지난달 16일 부산 중구 신창동 청년작당소에서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문화 교류 행사를 개최했다. 영상 자서전 상영과 웹툰 전시, 사진전, 공연 등 세대 간 네트워크 강화의 장을 마련했다.
2021년 전국 특광역시 최초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부산의 산업은 점차 쇠퇴하고 주거 환경은 노후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령자들의 삶은 소외되고, 공동체의 가치와 관계성은 와해돼 이웃 간 유대감과 신뢰가 옅어지는 게 현실이다. 청년들은 떠나고 노인과 빈집이 늘어나면서, 부산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세대이음 메모리얼스토리 사업’은 도시 소멸의 고착화를 막고, 활기를 되찾게 하는 상상과 노력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사업을 접하면서 부산시의 ‘부산근현대구술자료집 사업’이 떠올랐다. 부산근현대구술자료집은 부산시가 2010년부터 지금까지 총 17곳의 자연마을을 선정해 구술 채록을 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발간하는 책자다. 부산에 인구 유입이 집중됐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에 자연스레 조성됐던 마을이 도시 개발로 점차 사라지면서 이들 자연마을에 대한 생생한 구술 기록물을 남기는 작업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보통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복원하는 것이 취지다. 마을 토박이 어르신을 심층 면접해 나온 구술과 증언을 영상과 기록물 형태로 수집한다. 구술부터 자료집 발간까지 수년은 걸린다고 하니 그 깊이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부산시 시사편찬실은 그동안 닥밭골 마을, 매축지 마을, 외양포·대항 마을, 임기 마을, 남산동 마을, 무지개 마을, 감천문화 마을, 대천 마을, 학리 마을, 안창 마을, 물만골, 돌산벽화 마을, 소막 마을 등에 관한 구술자료집을 펴냈다. 2021년 시도한 구술 채록을 바탕으로 마지막 열일곱 번째인 흰여울 마을 자료집을 내년 여름 발간할 예정이다. 시사편찬실은 2021년 마을을 주제로 한 구술 채록을 마무리한 뒤, 다양한 부산 현대사 발굴을 위해 2022년부터 음악, 영화, 연극, 무용 등 주제별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의 근현대 생활상과 역사를 담은 어르신들의 구술을 모아 지역사의 빈틈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던 지역의 미시사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부산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 부산시와 지역 공공기관의 의지와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민들의 소중한 삶의 기록을 후세대와 공동체로 확산하고, 세대를 넘어 삶을 잇는 뜻깊은 걸음을 지속하기를 바란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5-10-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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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조지아 구금 사태'가 남긴 것
미국 이민 당국에 의해 체포·구금된 한국인 300여 명이 우여곡절 끝에 11일(현지시간) 귀국길에 올라 12일(한국시간)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들은 지난 4일 미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이뤄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불법 체류 단속에서 체포돼 구금 시설에 일주일간 억류됐다. 방미 중인 조현 외교부 장관은 11일 “구금된 한국인이 미국에 재입국할 때 불이익이 없다는 점에 대해 미국 측의 확약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한국인 집단 구금 사태는 ‘군사동맹’(상호방위조약)에서 ‘경제동맹’(자유무역협정)까지 영역을 확장해 온 양국 관계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어서 외교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중무장한 요원들이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을 중범죄자 취급하며 수갑과 족쇄로 묶는 단속 영상을 미 당국이 자랑하듯 공개하면서 더 공분을 샀다. 미국이 관세 인하 대가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놓고 정작 사업에 필수적인 외국인 인력을 범죄자처럼 다룬 것이다. 이를 접한 한국 국민은 모욕감, 굴욕감, 배신감, 분노 등 복합적 감정에 휩싸여야 했다.
이번 사태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모순에 기인한다. ‘뉴욕타임스’의 지적처럼 ‘미국 제조업 확대와 강력한 이민 단속 정책의 상호 충돌’이다. 관세를 무기로 내세워 대미 투자를 압박해 왔던 트럼프 행정부가 오히려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을 공격한 셈이다. 이번 사태가 정치적인 배경에서 이뤄졌다는 분석도 있다. 조지아주는 2020년 대선 때는 바이든 전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했던 대표적 경합주다. 특히 단속 대상이 된 합작 배터리 공장 투자는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시절 결정됐다고 한다. 바이든 전 대통령 치적을 흠집 내면서 동시에 불법 이민자 추방을 지지하는 강성 지지층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여론을 의식한 결정이라는 해석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고질적으로 풀지 못한 대미 파견 직원들의 비자 문제였다.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현장에서 전문직 취업(H-1B) 비자 등을 발급받아야 하지만, 통상 2~3개월이 소요돼 관광 목적 체류만 가능한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나, 회의 참석 등을 위한 단기 상용 비자인 B-1, B-2 비자로 업무를 수행하는 편법적 관행을 반복해 왔다. 구금된 한국인 대다수가 전자여행허가와 B-1 비자를 받아 문제가 된 것이다. 정부는 2012년 이후 별도의 한국인 전문인력 대상 비자 쿼터(E-4 비자)를 신설하는 ‘한국 동반자법’ 입법을 위해 미국 정부·의회를 설득해 왔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 상무부와 국토안보부가 외국 기업 근로자의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해 논의하기로 했고, 한국 외교부와 미 국무부도 워킹그룹을 구성해 새 비자 형태를 만들기로 협의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번 사태로 미국 투자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한국 기업들이 장기 투자 계획이 위축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 시장에서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가 불쑥불쑥 출현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시장이면 차라리 투자를 재검토하고 관세를 무는 게 나을 것”이란 볼멘소리가 나오겠는가.
미국에 진출한 부산 기업들도 사태를 면밀히 살피는 중이다. 자동차부품 기업인 성우하이텍은 테네시주 텔포드 공장에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모델 시장 공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현지에 나간 직원이 모두 주재원 비자를 받아 문제는 없지만, 새로 설비를 설치하거나 추가 투자가 이뤄질 경우 한국인 직원이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취업비자 쿼터 확대 등 후속 대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부품, 방산, 에너지 부문의 북미 사업 확대를 위해 최근 미국 루이지애나주 공장 부지를 인수한 SNT 그룹도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에 참여하는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조선소와 조선기자재업체들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폭 늘어난 대미 투자 현실에 맞춰 미국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한국인 전문직 취업비자 쿼터를 늘려야 한다. 감정이 악화된 한국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도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안심하고 작업할 수 있지 않은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며 일하러 간 한국인들이 또다시 부당한 수모와 불이익을 겪는다면 양국의 신뢰 약화는 불가피하다. 이번 사태로 한미동맹의 근간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미국에 대한 한국민의 우호적인 감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틀림없다. 미국은 양국의 굳건한 신뢰가 경제 협력의 튼튼한 기반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2025-09-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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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중국의 놀라운 '과학기술 굴기'
20여 년 전 중국 저장성 항저우와 산둥성 칭다오에 취재를 간 적이 있다. 당시 항저우의 수산업 현장과 인건비 절감을 위해 칭다오에 진출한 부산 기업의 제조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제조업 하청 국가 정도로 여겨졌고, 그 이미지는 상당 기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달 방영된 KBS의 ‘다큐 인사이트-인재전쟁’에 나온 중국의 변화된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특히 ‘공대에 미친 중국’ 편에는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를 창시한 량원펑의 모교로 항저우에 있는 저장대가 나왔다. 이 대학은 1999년부터 상위 1%가 들어가는 창의 혁신 인재 육성을 위한 엘리트반인 ‘주커전 반’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 출신들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창업한다. 최고의 교수진과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정부와 선배들이 물심양면 도와주기 때문이다. 주커전 반 출신인 량원펑이 성공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AI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며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인재들을 모아 열정적인 연구 문화를 조성한 덕분이다. 중국의 어린 학생들이 량원펑을 모델로 삼아 프로그래머를 꿈꾸며 공대 진학을 원하는 모습은 ‘의대 열풍’에 휩싸인 한국과 대비됐다. 물론, 엔지니어가 의사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중국의 정치·사회·경제 체제가 한국과 다르기는 하다.
중국은 국가 주도적인 과학기술 기반 산업 혁신 전략을 펼쳐 성과를 거뒀다. 대표적인 것이 2015년 수립한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다. 2025년까지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10대 제조업 분야를 집중 육성해 제조업 강대국이 되겠다는 계획이다. 미국은 트럼프 1기(2017~2021년) 이후 중국의 기술 굴기를 좌초시키기 위해 각종 제재를 강화해 왔다. 하지만 중국 제조업은 막대한 정부 지원을 발판으로 기술 자립을 단계적으로 이뤄냈고, 미국의 기술 패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특히 전기차(BYD), 전기차용 배터리(CATL), 태양광(론지솔라), 5G 통신(화웨이), 드론(DJI), 고속철도(CRRC) 등의 분야에선 세계 1위 기업이 탄생했다. 국가의 과감한 규제 혁신, 치열한 기업 간 경쟁, 첨단산업 성장을 주도할 혁신 인재 양성 등이 종합적으로 작동한 성과로 보여진다.
특히 중국의 10대 부자 대부분이 공대 출신으로, 혁신 기술 창업을 통해 자수성가했다. ‘공학 천재’를 동경하는 분위기 속에 공대로 인재가 몰리고, 기술 혁신의 붐이 이는 이유다. 중국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창업 생태계를 활성화해 실패에 따른 리스크를 줄여준다. 또 과학기술 분야 최고 학자를 ‘원사’로 지정해 한 해 많게는 1조 원 규모의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맡기는 ‘원사제도’와 해외 고급 인재 유치를 위해 기본 연봉의 최대 5배와 연구비의 최대 100배 조건을 내걸고 2008년부터 추진한 ‘1000인 프로젝트’ 등은 과학기술 혁신의 기반이 됐다.
중국의 놀라운 과학기술 굴기는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한국에 큰 위협이 된다. 메모리반도체·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등 일부를 제외하면 기술적으로 중국이 한국을 넘어선 지 오래라고 한다. 특히 AI·로봇 분야는 격차가 상당하다. “한국이 하는 건 중국이 다한다. 중국이 하는 것 가운데 한국이 못 하는 게 많다”는 과학계 인사의 지적이 뼈아프다. ‘메이드 인 차이나’(중국 제조)가 아닌 ‘인벤티드 인 차이나’(중국 창조)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전환됐다.
중국이 과학기술 굴기를 통해 인재를 육성하는 사이 우리나라에선 인재의 의대 쏠림과 이공계 기피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열악한 연구 환경, 낮은 보상,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공학자와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을 때 의사 이상의 경제적·사회적 대우를 받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공계 인재 발굴·육성·처우에 관한 국가 차원의 파격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매년 최상위권 이공계 인재를 대거 선발해 파격적 대우와 교육으로 과학기술을 선도할 엘리트를 집중 육성해야 한다. 두려움 없이 창업에 도전할 수 있는 혁신 창업 생태계 정착, 공격적 투자와 대학의 체질 개선을 통한 인재 해외 유출 방지, 이공계를 존중하는 분위기 조성, 대대적인 연구·개발 예산 확충 등이 뒤따라야 한다.
정부는 6월 ‘국가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이공계 지원 특별법’ 시행에 들어갔다.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 고경력 과학기술인 등 과학기술 인재 전주기 지원에 나선 점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정부가 장기적인 이공계 발전 전략을 갖고 인재 육성, 창업 인구 증가, 유니콘 기업 성장, 첨단산업 생태계 조성,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5-08-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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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일상이 된 기후 재난
역대급 폭염의 기세가 무섭다. 지난 8일 부산 최고기온은 34.8도로 1904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후, 7월 상순(1~10일) 기온 최고점을 찍었다. 경남 밀양 역시 지난 7일 낮 최고기온이 39.2도까지 오르며 7월 상순 최고기온 중 1위를 기록했다. 전국적으로도 올 7월 상순 기온은 역대 최고점에 달했다. 지난 8일 서울은 한낮에 37.8도까지 오르면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인천도 35.6도까지 올라 기상관측 이후 7월 상순 최고기온으로 기록됐다. 이런 가운데 서울에서는 낮 40도 돌파와 초열대야(밤 최저기온 30도 이상) 발생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이번 극한 폭염은 대기 상층에는 티베트 고기압이, 중·하층에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겹치면서 발생했다. 두 고기압이 ‘이중 고기압 층’을 형성하며 발생한 열기가 차곡차곡 쌓이고 뜨거운 남풍과 동풍이 번갈아 불면서 우리나라를 달구고 있다. 근대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0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는 아무리 더워도 낮 40도와 초열대야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름철 바다에서 해풍이 불어와 대기의 과도한 가열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난화 여파로 대기와 해수면 온도가 동반 상승하며 여름철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공기 자체가 열풍이 됐다는 것이다. 극한 폭염을 막아주던 한계선이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인해 망가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7월 말과 8월 초에는 더 큰 폭염이 온다고 하니 걱정이다.
폭염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면서 지난 8일 하루에만 온열질환자가 238명에 달했다. 7월에 온열질환자가 하루 200명 이상 발생한 것은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3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올해 5월 15일부터 지난 8일까지 누적 온열질환자는 총 122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78명 대비 2.6배에 달한다. 온열질환은 열로 인해 발생하는 급성질환이다. 장시간 노출되면 두통·어지럼·근육 경련·의식 저하 등의 증상을 보이고, 방치 땐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올여름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는 8일까지 모두 8명으로 파악된다. 지난해(3명)의 약 3배다.
극한 폭염과 같은 기후 재난이 일상화되면서 폭염 취약 계층의 안전에도 비상이 걸렸다. 부산시가 파악한 폭염 취약 계층은 독거노인 22만여 세대를 비롯해 노숙인, 쪽방 거주자, 중증 장애인 등 모두 27만여 명에 달한다. 일터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하청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도 폭염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폭염 시 건설 현장과 공장 노동자의 작업 중단권을 둘러싼 논의에도 진전이 필요하다. 실효성 있는 규정을 마련해 누구라도 충분한 휴식권을 보장받도록 해야 한다. 극한 폭염은 이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상적인 재난이며, 불편을 넘어 불평등까지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폭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 지자체, 산업계 등이 신속하고 실효성 있는 사회적 차원의 지원과 배려에 나서야 한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열섬 현상 완화를 위해 녹지 공간을 더 많이 늘리고, 건물 설계 개선, 폭염 쉼터 지정, 정확한 날씨 예보·경보 시스템과 인력 확충 등 복합적인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기후변화와 극단적인 기후 현상으로 인한 기후 재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정부도 국가적인 ‘기후 위기 대응 콘트롤타워’ 증대 필요성에 따라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내세운 공약이기도 하다. 국정기획위원회도 지난 8일 기후에너지 TF를 신설했으며 탄소중립 정책 추진, 기후위기 대응 산업 육성, 재생에너지 확대 등 이 대통령의 관련 공약을 중점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은 이미 기후와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독립 부처를 운영하며 탄소중립을 목표로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기후·에너지 정책은 산업부, 환경부, 국토부, 농림부, 해수부, 기상청 등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다. 특히 산업부는 에너지 정책을, 환경부는 기후 위기 대응을 담당하고 있는데, 양 부처 업무가 분리돼 정책 통합과 조율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향후 기후에너지부 조직개편 과정에서도 규제 성격의 부처인 환경부와 진흥 성격의 부처인 산업부의 유기적 결합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는 결국 에너지 문제라는 점에서 기후에너지부를 통한 통합 거버넌스 구축은 바람직하다. 기후 위기 대응, 탄소중립 이행, 재생에너지 확대, 에너지전환 전략을 한 곳에서 조율하는 전담 부처는 필요하다. 다만, 기후에너지부 신설 관련 조직개편에 대해 여러 방안이 검토 중이고, 구체적 로드맵은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새 정부가 정교한 정책 조율을 통해 기후에너지부를, 실행력을 갖춘 행정 조직으로 어떻게 구축해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2025-07-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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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이제는 '경제'의 시간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내수와 수출의 동반 부진, 미국발 관세 전쟁, 성장 잠재력 하락이라는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있다. 내수 경기의 대표적 지표인 소매판매액 지수는 2022년 2분기부터 11분기 연속 마이너스다. 2003년 카드대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수준이다.
관세 전쟁 여파로 버팀목이던 수출마저 흔들린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5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은 572억 7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 동월 대비 1.3% 감소했다. 양대 수출 시장인 미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은 8% 이상씩 급감했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한국의 주력 수출 분야는 중국의 빠른 추격과 미국의 정책적 압박으로 세계시장에서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수출 시장에서 우리와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중국의 ‘제조 굴기’는 놀라울 정도다. 중국은 2015년 10대 첨단 제조업 집중 육성을 위해 ‘중국 제조 2025’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결과 전기차·배터리, 드론, 고속철, 신소재, 태양광 패널, 5G 통신, 전력 설비 등 최소 7개 분야에서 세계 1위 중국 기업이 나왔다. 우리가 메모리 반도체, 이차전지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전 산업 분야에서 중국에 추월당했다는 섬뜩한 분석도 나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일(현지 시간) 미국으로 수입되는 외국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율을 기존 25%에서 50%로 인상하는 포고문에 서명하면서 ‘미국발 철의 장막’이 현실화했다. 중국산 저가 철강의 범람과 건설업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국내 철강업계엔 큰 악재다.
이뿐만 아니다. 암울한 저성장을 예상하는 지표도 속속 나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3일(현지 시간)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을 1.5%에서 1.0%로 석 달 만에 0.5%포인트 내렸다. 관세 전쟁에 따라 수출 타격이 심하고 민간 소비 부진이 장기화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행도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5%에서 0.8%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국내 경제 성장률이 0%대로 내려간 것은 1998년 외환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21년 코로나 팬데믹 등 돌발 변수가 덮쳐왔을 때뿐이었다.
막 출범한 이재명 정부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중에서 무너진 경제를 정상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일 취임식에서 밝힌 ‘1호 지시 사항’은 비상경제대응 태스크포스(TF) 신설이었다. 민생 회복과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과제로 꼽은 것이다. 이 대통령이 그리는 중장기 경제 분야 청사진은 ‘3·3·5’ 전략이다. ‘경제·산업 대도약’을 기치로 ‘인공지능(AI) 3대 강국’ ‘잠재성장률 3%’ ‘국력 세계 5강’을 이뤄내겠다는 것이다. 비상경제대응 TF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실행계획을 내놓고, 민생 대책과 미래 먹거리 산업 육성을 위한 재원 마련 전략이 뒤따라야 한다.
한국 경제의 핵심 동력인 수출은 미국의 통상 압력이란 거대한 산 앞에 서 있다. 이대로라면 반도체와 자동차, 철강 등 주력 업종의 수출 둔화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수출 전선의 사활이 걸린 ‘한미 관세 협상’은 주어진 시간이 한 달 남짓에 불과하다. 새 정부가 정상급 외교 채널을 복원하고, 동시에 수출 충격을 최소화하는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역점 사업인 상호 관세 정책은 시행 유예 기한이 내달 8일까지로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아 새 정부 통상팀은 촉박한 상황에서 협상에 임하게 됐다.
재정·금융정책을 통한 단기적 경기 부양과 함께 중장기적으로는 산업구조 개혁과 혁신산업 중심의 성장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 경제를 지탱해 온 13대 주력 산업 가운데 철강, 정유, 기계 등 9개 산업이 올해 무더기 수출 역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기업들이 과감하게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규제 혁파에 나서고, 일자리와 소비 창출 효과가 큰 산업군에는 전방위적인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난해 12·3 비상계엄부터 6·3 조기 대선까지 6개월간 정치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황에 놓여 왔다. 이제 불확실성이 제거된 만큼 ‘정치’가 아닌 ‘경제’의 시간이 도래했다. 새 정부는 저성장 극복과 경제 도약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실용적이고 선제적인 경제정책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
이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균형발전을 강조하며 수도권 집중화 탈피를 언급한 것이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모두 함께 잘 사는 나라’ 구상의 중심에 국토균형발전 의지가 담겨 있어서 다행이다. 불균형 성장 전략이 한계를 드러낸 만큼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골고루 발전해 지속 성장의 토대를 만들어 모두 함께 잘 사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
2025-06-0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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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치매 환자 돌봄 인프라 확충해야
지난해 12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024만 명으로 전체 인구 5122만 명의 20%를 돌파하며 대한민국은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노인 인구 증가에 따라 노인성 질환인 치매 환자도 계속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3월 발표한 ‘2023년 치매 역학조사와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치매 노인 환자 수는 올해 97만 명이고, 내년엔 100만 명, 2044년엔 2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는 셈이다.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부산의 올해 65세 이상 추정 치매 환자는 7만 명에 달한다.
치매는 기억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판단력, 언어 능력, 행동 조절 등 전반적인 인지 기능이 악화하는 질환이다. 일상생활이 쉽지 않아 타인의 도움이 절실하다. 보건복지부 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치매 환자와 같이 살지 않는 가족도 주당 평균 18시간을 돌봄에 할애했다고 한다. 환자 1인당 연간 관리 비용은 지역사회에 거주할 때는 1733만 원, 시설·병원에 머물 때는 3138만 원에 달했다. 가족들이 경제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급증하는 치매 환자로 인해 ‘간병 지옥’ ‘돌봄 지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치매는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삶도 피폐하게 만든다. 치매 환자 돌봄이 여전히 환자 자신과 가정의 책임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로 인한 사회 전체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수다. 우선 치매 검진과 예방, 치매 조기 발견, 환자 가족 지원 등을 담당하는 지역 치매 관리 기관인 전국 256곳의 치매안심센터 역할이 중요하다. 부산 지역 16개 구·군에 위치한 치매안심센터는 보건소가 운영을 맡고 있으며 간호사, 작업치료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등 전문 인력이 상주한다. 치매안심센터는 치매 조기 진단 부문에서는 이전보다 성과를 내고 있지만, 조기 선별 이후 치료와 돌봄서비스로 연계하는 데는 미흡하다고 한다. 센터가 보건·의료·복지 등 지역사회 돌봄 체계와 더욱 긴밀한 협력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부산시 치매안심센터 운영 지원 예산은 130억 원으로 전년 대비 13억 원이 감소해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부산시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부산 전역에 총 40개의 치매안심마을을 선정했다. 치매안심마을은 치매 조기 검진, 치매 인식 개선 교육, 치매 예방 교실, 인지 강화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 치매안심마을은 치매에 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을 위한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치매 환자와 가족들에게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 확충이 필요하다. 네덜란드, 영국 등 고령화 시대를 먼저 경험한 국가들은 시설 중심 관리에서 벗어나 개인주택이나 치매 마을 건설을 통한 치매 환자의 자립적인 생활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치매 노인도 지역 사회에서 함께 늙어갈 수 있도록 ‘AIP’(Aging In Place·내 거주지에서 나이 들기) 기반을 만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2008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치매마을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에 위치한 호그벡 마을이다. 치매 환자들은 이곳에서 거주자로 대우를 받는다. 국가 지원을 받아 200여 명의 중증 치매 환자들이 거주한다. 이들은 슈퍼, 음식점, 미용실, 극장 등 편의시설을 이용하고 마을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250여 명의 요양 전문 간호사, 간병인, 의사, 자원봉사자들은 마을 주민으로 위장해 레스토랑 직원, 수리공, 산책하는 사람, 텃밭지도사 등 역할을 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치매 환자를 돌본다. 호그벡 마을의 성공 요인은 치매 환자도 생활 능력을 유지해 삶의 질을 지키는 데 있다. 이상적인 모델인데, 이를 지역에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치매 환자는 갈수록 늘 것으로 보여 효율적인 치매 관리는 국가와 지자체의 최대 과제 중 하나다. 치매안심센터와 치매안심마을, 치매전문 주간보호센터 등 인프라를 확충하고, 장기요양 재가서비스와 돌봄 공백 지원을 위한 장기요양 가족휴가제 등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정부도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선언한 만큼, 치매 환자 돌봄을 가족에게만 맡기지 말고, 치매 환자에 대한 국가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치매를 고령으로 인한 필연적인 질환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도 필요하다. 일본은 치매라는 용어 대신 ‘인지증’(認知症)이라는 표현을 쓴다. 말 그대로 단지 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치매 노인이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하나라는 인식 확산이 절실하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5-05-0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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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포커스온] 지역문화사를 축적하자
“부산 문화예술계의 사표로 기릴 만한 예술인을 선정해 그들이 남긴 방대한 예술 작업의 결과를 집대성하고 문화사적 위치를 재정립하겠다.”
부산문화재단이 2020년 7월 ‘부산 예술인 아카이빙 사업’인 ‘부산의 삶, 예술로 기억하다’를 시작하면서 밝힌 취지다. 아카이빙은 ‘영구적인 가치를 위해 보존하는 인간 활동의 기록물’(아카이브)을 수집, 평가, 선별, 분류, 정리, 기술, 보존하는 과정을 말한다.
재단은 2020년부터 2024년까지 ‘부산 예술인 아카이빙 사업’을 통해 해마다 작고 예술인과 원로 예술인을 2~3명씩 선정해 순차적으로 집중 조명해 왔다. 윤정규 소설가, 허영길 연극 연출가, 황무봉 전통 무용가, 이상근 작곡가, 김석출 동해안별신굿 보유자, 송혜수 화가, 최민식 사진가, 이규정 소설가, 오태균 지휘자, 김종식 화가, 김한순 민속예술인 등 작고 예술인과 제갈삼 피아니스트, 허만하 시인, 조숙자 무용가 등 원로 예술인이 대상이었다. 당시 부산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예술인 상당수가 포함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모를 통해 선발된 아카이빙 연구팀들은 해당 예술인의 저서, 악보, 공연 팸플릿, 언론보도 기사, 사진, 동영상, 평론, 증언 자료 등을 폭넓게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펼쳤다.
그 결과, 선정된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 등을 담은 책자가 연차적으로 나왔다. 재단은 시민이나 연구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전자아카이빙을 통해 전자책(e-book) 형태로도 등록했다. 또 연구 결과물은 전시, 학술 세미나, 축제 형태 프로그램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됐다. 이러한 아카이빙의 결과물은 부산을 대표하는 예술인들의 치열한 예술혼을 복원하고 지역의 역사·사회·문화 연구의 기초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사를 발전적으로 계승·축적할 수 있다.
재단은 올해부터 ‘부산 예술인 아카이빙’ 관련 2차 사업에 착수해 앞으로 5년간 예술인 10여 명에 대한 조명 작업에 나선다. 이번에도 예술인 선정 기준에 대한 객관성 확보가 중요하다. 지역 문화사에서 빼어난 업적을 남기고, 지역 문화예술의 고유성과 문화적 가치를 드높인 예술인을 선별할 필요가 있다. 재단은 책자 형태보다는 예술인 영상 채록을 통해 생애와 작품 세계 등을 담아 재단 유튜브 채널인 ‘컬쳐튜브’에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부산 지역 박물관과 미술관 등 일부 문화기관은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라 기록물의 활용과 확산을 위해 아카이빙 사업을 펼치고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은 유물 수집 외에도 기록물을 활용해 전시, 도록 발간,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아카이브 홈페이지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도 소장품에 대한 해제, 도록 발간, 디지털화 작업 등을 통해 체계적인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한다. 부산문화재단도 2009년 출범 초기부터 온라인 아카이브를 운영하면서 지역의 문화예술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그러나 각 기관이 수행하는 문화예술 아카이빙 성과에 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열람하거나 확인할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다. 서울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국립국악원, 국립극단, 국립무형유산원, 국립극장,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 공연예술 관련 국립기관과 연계해 아카이빙 결과를 통합 제공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부산도 여러 기관의 아카이빙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가공해 제공하는 ‘온라인 아카이빙 종합 플랫폼’이 필요하다.
문화예술 아카이빙 관련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요구도 지역 문화예술계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문학 장르의 경우, 2028년 개관 예정인 부산문학관이 부산문학사의 체계적 아카이빙을 수행할 콘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 공연예술 등 타 장르는 아카이브 자료를 수집, 관리, 전시, 활용할 수 있는 종합적인 오프라인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다. 가칭 ‘부산예술기록관’을 설립해 지역 예술 사료의 유실을 막아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부산예술기록관이 지역 예술 자원들의 체계적인 수립, 관리 기능을 수행하고 전시, 교육,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관별로 추진하는 아카이빙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사용자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부산시가 주도적으로 나서 문화예술 아카이빙 총괄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대구시의 경우, 문화체육관광국 문화유산과에 문화예술기록팀을 설치해 문화예술 아카이빙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문화예술 아카이빙 사업은 비용 대비 즉각적인 효과를 내는 사업은 아니다. 꾸준하고 묵묵히 실행해야 하는 사업이다. 지역 문화예술 자원 기록 활성화를 통해 지역문화사를 복원하고 축적한다는 점에서 이 사업은 지속돼야 한다.
2025-04-03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