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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의 뷰파인더] 암묵지, 경험이 빚어낸 지혜의 힘
영상의 바다 유튜브에서는 ‘부산 사랑에 빠졌다’는 외지인과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예 한달살이를 하면서 부산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콘텐츠로 승부하는 이들도 많다. ‘여기까지 오나’ 싶을 정도로 어디서든 그들을 발견한다. SNS와 유튜브에 ‘부산 콘텐츠’가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이어진다. 부산에 살면서도 가보지 못한 곳을 유튜브로 보며 부산이 이토록 매력적인 도시였나 새삼 깨닫게 된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시청자의 성향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분석한다. 유튜버들도 사람들의 관심사를 철저히 따른다. ‘조회수 터지는’ 콘텐츠로 방향타를 움직인다. 부산 여행을 검색한 이들에게 ‘부산에 또 오고 싶다’며 행복해 하는 표정을 담은 썸네일이 계속 추천된다.
유튜버들은 부산 거리를 누비며 ‘부산이 좋은 이유’에 대해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는다. 강과 바다, 산을 품은 자연 속에 도시가 형성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멋진 풍광을 볼 수 있고, 전쟁 이후에 형성된 독특한 삶과 문화가 곳곳에 스며들어 투박한 정겨움을 느낀다고 한다. 예컨대 영도의 작은 항구와 바다, 느낌 좋은 카페와 오래된 골목에서 그런 것을 발견한다.
이들이 굳이 부산까지 와서 힐링을 하고 영감을 얻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살벌하고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만난, 간접 경험으로 채울 수 없는 ‘현장의 날것’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형태로 표시하기 어려운 지식, ‘암묵지(暗默知)’다. 수십 년 전통을 가진 돼지국밥, 밀면, 떡볶이집 주인 할머니의 손맛 레시피와 노하우, 서비스는 결코 흉내낼 수 없다.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은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암묵지다.
책이나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고 습득하는 객관적인 지식 ‘형식지’와 다른 암묵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AI 시대 생존을 위한 키워드여서다. 암묵지는 디지털화, 문서화되지 않은 지식이다. 도제식 교육이나 오랜 경험으로 체화되었지만 말이나 글로 명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아무리 날고 기는 AI라도 쉽게 생성해 낼 수 없는 보물이다. 타지와 차별화된 부산만의 암묵지가 도처에 가득하니, 외지인과 외국인들이 보물찾기하듯 곳곳을 누빈다.
그런데 경험으로 전달되어야 할 우리의 삶, 암묵지가 도시에 축적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청년들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어르신들의 죽음과 함께 평생을 쌓은 암묵지가 사라지고 있다. 일자리를 만들어 청년을 붙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암묵지를 보존하고 이어가는 데에도 힘을 쏟아야 하는 이유다.
암묵지도 일종의 지식 데이터다. 데이터는 곧 지역의 자산이자 자양분이다. 인구와 출생률 감소를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부산과 울산, 경남에서 평생을 사는 주민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노인과 바다, 아파트밖에 없다’고 조롱하는 이들이 있지만, 지역에서 평생을 헌신한 이들이 가진 방대한 암묵지 데이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이는 많지 않다.
사람과 지역을 샅샅이 꿰뚫는 영업사원, 배달원 등 모든 구성원의 노하우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면서 도시는 지속되고 발전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몫을 다하며 삶의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 이 연결고리가 이어지지 못하면 사람이든 도시든 심각한 퇴화 현상을 겪게 된다. 그게 지역 소멸이다. 온라인 플랫폼의 편리함도 우리의 암묵지를 노린다. 쿠팡과 같은 플랫폼에 종속되면 내가 가진 암묵지가 하나둘 빨려 들어간다.
AI혁명 시대에 지역이 살아남는 방법은 암묵지를 쌓아가는 현장형 청년을 기르는 것이다. 멘토링을 통해 선배들의 암묵지를 전수 받고 도시의 주역으로 커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우리, 상점, 회사, 동네의 암묵지가 쌓이면 정보와 지역의 격차도 극복할 수 있다. 부산으로 향하는 외지인과 외국인들이 그 증거다.
지난 7월 1일 부산과 울산, 경남에서도 새로운 지방정부가 출범했다. 부산의 전재수 시정 역시 해양수도를 기치로 첫발을 디뎠다. 예산의 한계가 많아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역의 암묵지를 쌓아가려면 경험을 축적할 기회와 시간을 줘야 한다. 국가와 시의 획기적인 지원으로 일을 경험하게 하고, 서로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청년세대의 AI 사회 안전망이 될 수 있어서다.
거대 빅테크 기업에 대항해 에너지, 건강 등 다양한 암묵지를 모으고, 이를 지역의 자산이 되게 하는 ‘데이터 협동조합’과 같은 대안도 시도해 볼 만하다. 암묵지에 새로운 길이 있다. 그것이 수도권 블랙홀을 피해 지역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박세익 TV방송국장 run@busan.com
2026-07-0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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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의 뷰파인더] BBC가 유튜브와 손잡은 이유
영국 공영방송사 BBC가 올해 들어 갑자기 세계 미디어 업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BBC가 가까이 둘 것 같지 않은 유튜브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세계 주요 미디어들이 ‘디지털·모바일 퍼스트’라는 이름으로 부단히 혁신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초대형 공영방송 BBC까지 대놓고 ‘유튜브 퍼스트’를 외쳤으니 적잖게 놀랄 일이긴 하다. 레거시 미디어의 상징과 같은 BBC가 가장 중요한 콘텐츠 유통 채널로 유튜브를 낙점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공중파와 케이블TV, IPTV에서 유튜브와 OTT로 흘러가는 영상 미디어의 흐름 속에, BBC까지 세계 최강 유튜브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생존을 위한 전략적 변화를 꾀한 셈이다.
BBC는 다큐멘터리, 예능, 어린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유튜브용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고 맞춤형 커뮤니티와 신규 채널을 확대하기로 했다. 동시에 신뢰도 높은 뉴스와 라이브 콘텐츠를 유튜브에서 제공해 글로벌한 성장을 꾀한다고 선언했다. 방송 내용을 자르거나 요약해서 자사 유튜브 채널에 올리는 정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채널과 프로그램으로 신규 수익 모델까지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미디어 중 가장 권위 있고 공정한 방송사로 신뢰를 쌓은 BBC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단순히 콘텐츠를 더 널리 퍼뜨리려고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려는 의도인지, 뉴미디어의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BBC는 디지털화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해왔다. 자체 플랫폼도 구축해 승부를 걸었다. 그런 BBC가 경쟁 플랫폼과 동행을 선언한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든 결단이다.
여러 자료와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하면, BBC는 TV수상기나 셋톱박스 시대를 넘어 시청자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시청자가 많이 머무는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더 쉽게 만나게 하겠다’라고 유튜브를 선택한 취지를 설명했다. 시청자에게 콘텐츠가 닿지 않으면 공영방송의 접근성과 브랜드 경쟁력,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 영국에서 유튜브 이용자가 BBC를 능가했고, 젊은 연령대에서는 유튜브 점유율이 압도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BBC 입장에서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단순한 유튜브 채널 운영 차원을 넘어선 단계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젊은 시청자들이 유튜브에서 콘텐츠와 뉴스를 소비하는 상황에서 공중파의 오랜 문법을 들이대봤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한때 너나없이 라디오가 사라질 거라고 쉽게 말했다. 그런데도 라디오는 건재하다. ‘보이는 라디오’라는 이름으로 유튜브를 타고 공간을 더 확장하고 있다. 라디오 진행자와 초대 손님의 생생한 영상을 생중계하면서 음성과 주파수의 한계를 벗어나 버렸다. “나머지 이야기는 유튜브에서 이어집니다”라는 멘트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가장 ‘올드하다’는 신문사라고 그대로 있으란 법은 없다. 누구든 어디서나 한계 없이 방송하고, 시청할 수 있는 시대다. 방송법, 신문법의 족쇄를 유튜브가 단박에 날려버린 마당에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올해 출범한 부산일보 TV방송국의 유튜브 대표 채널인 ‘부산일보TV’는 6·3 지방선거를 맞아 지역신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장 8시간 30분에 달하는 실시간 ‘끝장 개표방송’에 도전했다. TV방송국 기자 3명이 진행자로 나서고, 여야 정치인과 취재 기자가 스튜디오에 출연해 상황을 분석하며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실시간 개표 상황을 그래픽으로 제작해 표출하고, 각 선거 캠프에 영상취재기자와 PD들이 총출동해 현장을 중계했다. 직전 선거 기간에는 민심르포, 후보 현장인터뷰 등 다양한 기획 콘텐츠를 생중계하거나 업로드해 호응을 얻었다. 공중파 방송과 달리 지역에만 천착한 개표 방송은 최고 동시 접속자 8000명, 조회수 27만 회를 기록해 지역 신문사로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처럼 무모한 도전이 가능했던 건 유튜브라는 막강한 플랫폼 덕분이다. 시청자와 독자의 시간은 이미 스마트폰으로 이동했다. 전국의 시청자들은 유튜브와 SNS에 모여 이번 선거와 관련한 콘텐츠를 접하고, 서로 소통하며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BBC의 선택처럼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가, 그들에게 맞는 콘텐츠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팬덤’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미디어의 숙명이 된 것이다.
플랫폼 문법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청자·독자의 성향 등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진화한다. 어떤 플랫폼에서든 이용자와 접점을 놓치지 않는 미디어가 살아 남는다. 부산일보TV도 이제 막 시청자·독자가 있는 곳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박세익 TV방송국장 run@busan.com
2026-06-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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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의 뷰파인더] 보이지 않는 감옥, 에코 체임버 탈출하기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 놀러 갔다가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교장선생님이 서시던 단상에 어깨띠를 두른 아저씨들이 차례로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관중 일부가 다 같이 이름을 외치니, 박수 소리와 야유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른바 ‘운동장 유세’ 현장이었다.
그 시절 유권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미어캣처럼 눈과 귀를 기울였다. 후보들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무슨 말을 해도 놓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가 없던 시절, 신문이나 TV 뉴스 이외에는 후보들의 언행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운동장은 밝기만 한 곳이 아니긴 했다. 사람들을 동원해 인지도를 왜곡하거나 싸움을 하고, 돈봉투를 주고 표를 사는 매표 행위가 횡행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연스럽게 후보가 어떤 공약으로 어떻게 일하겠다고 하는지, 말과 행동을 어느 정도 종합하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공직선거법은 투명한 선거를 치르도록 진화했다. 거리 유세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최근 선거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공간을 더욱 파고든다. 수많은 유권자들이 다양한 정보가 넘쳐나는 SNS나 영상 플랫폼에 모여 갑론을박을 벌이고, 거기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여기서 큰 문제가 생겼다. 이전에 비해 손쉽게 후보들을 만나고 정보를 파악하는 장점의 이면에 눈과 귀를 가리는 편 가르기 현상이 심화하고 있어서다. 이것이 알고리즘 추천 온라인 뉴스와 영상의 미로 속에 스스로 갇히는 ‘에코 체임버’다. 내 말과 소리가 세상에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갇힌 공간이라는 의미다. 유권자들이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종이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점점 외면하고, ‘네 생각이 옳다’고 맞장구치는 커뮤니티나 유튜브 콘텐츠에 점점 매몰되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나마 과거 ‘운동장’을 경험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 세대는 처음부터 전체를 보기 힘들게 됐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사회생활을 하기 전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비슷한 무리의 생각에 갇히기 쉽다. 알고리즘이 그들의 생각이 전체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끝없이 유도한다. 그래야 영상과 광고를 더 많이 시청해 매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20대 남성과 여성의 생각과 가치관이 양극단에 위치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절대다수가 이용하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플랫폼은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한다. 공익이나 견제와 균형, 저널리즘 따위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광고를 보게 할 것인가’가 AI 알고리즘의 유일한 목표다. 그렇게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또래가 많이 본 영상을 지속적으로 추천하는 ‘입소문 시스템’을 강화한다. 절대 ‘필터 버블’ 소우주 밖 은하계를 노출하지 않는다. 그것이 확증 편향인 줄도 모르고, 시야가 점점 좁아져 극단적으로 가짜 정보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제는 미로를 스스로 탈출할 때가 됐다. 경주마의 눈가리개를 치우고 넓게 보려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항상 가동되는 내 안의 ‘레드 팀’이 필요하다. 단순한 노력으로 불가능하다. 습관 자체를 바꿔야 한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추천 피드에 의존하지 말고 검색과 시청 기록을 주기적으로 초기화하는 것이다. 자동재생 기능도 꺼야 한다. 알고리즘에만 맡길 게 아니라 내가 주도해 반대 의견을 검색한 뒤 한 건 이상은 읽고 시청하는 습관을 들이자. 유튜브나 네이버 등 한 플랫폼에만 머물지 말고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는 공간과 채널, 커뮤니티를 찾아다녀야 한다. 다른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계정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강한 콘텐츠를 잘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어떤 정보든 의심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감정적으로 공감되는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출처와 1차 자료를 가지고 교차 검증을 해보면 근거 없는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콘텐츠는 공유하지 않는 게 낫다. 부산일보TV 등 공신력 있는 영상 콘텐츠를 의도를 가지고 무단으로 재가공해 돈벌이를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유튜버들도 난무하는 상황이다. 그런 이들이 만든 짧은 영상들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심리적 지배를 당하게 된다.
세상 모든 시스템에는 장점과 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날로그 운동장 유세와 온라인 공간의 장점만 남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영화 맨인블랙의 끝도 없이 확장하는 우주처럼, 나만의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태도가 절실하다. 견디기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어느 쪽이든 무슨 근거로 주장하는지 들어는 보고 판단할 일이다.
6·3 지방선거가 달아오르니 온갖 주장이 난무한다. 고귀한 나의 한 표를 쉽고 편하게 던져 버리고 말 일인가.
2026-05-0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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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의 뷰파인더] 영상 전성시대, 대한민국 사용법
‘아무리 그래봤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누구나 입에 달고 살던 때가 있었다. 밥상머리나 술자리에서 “강대국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 멀었다”고 푸념할 때 쓰기도 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도 그랬다.
그때는 ‘세계화의 물결’ ‘세계 속에 우뚝 선 대한민국’이란 말을 신문, 방송에서 지겹도록 접해야 했다. 화려한 국가 비전을 내세워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 하라’는 억지 메시지는 먹혀들지 않았다. 정권의 치적을 ‘가스라이팅’하려는 속셈도 컸다. 오히려 ‘우리는 전혀 글로벌하지 않다’는 사실을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탄허 스님 등 여러 예언가들이 ‘한반도가 세계 문화와 정신의 중심지가 된다’고 했을 때도 ‘우물 안 개구리’들은 헛웃음만 지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 꽃을 피운다’는 스님의 예언이 끝내 완성될지 알 수 없지만, 2026년 대한민국은 분명히 거대한 ‘K문화의 물결’을 세계로 분출하고 있다.
최근에는 군 복무를 마친 방탄소년단(BTS)의 광화문 컴백 무대가 꽃을 피웠다. 세계인들이 텔레비전으로, 휴대전화로 K팝 아이콘의 화려한 귀환을 축하하며 실시간으로 즐겼다. 대한민국 문화력이 세계의 중심이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데 BTS 소속사 하이브는 현장을 전파할 수단으로 ‘올드 미디어’가 아닌 넷플릭스를 선택했다.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많은 세계인이 동시에 양질의 라이브 무대를 시청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 당연한 선택인 듯 보였다. 넷플릭스가 영화와 드라마 등 K문화 전파자로서 일등공신이긴 하나, 이를 두고 ‘K문화가 위기에 빠졌다’는 갑론을박도 일었다. 독점에 가까운 글로벌 OTT 플랫폼의 기세에 무늬만 화려한 K콘텐츠로 전락한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영상 플랫폼의 독재자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유튜브가 단순한 영상공유 사이트의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한 건 2005년. 잠재력을 간파한 구글이 2006년 10월에 16억 5000만 달러에 사들였고, 2008년 한국어 서비스가 시작됐다. 유튜브는 2011년 한국에서 수익을 내는 파트너 프로그램을 공식 도입하면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고화질에 라이브 스트리밍 기능까지 강화돼 이제는 지상파 방송까지 침몰시키는 세계 뉴미디어의 절대 강자로 폭풍 성장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는 돈을 버는 마케팅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는 시청자, 소비자들은 홈페이지를 전전하다가 고객센터에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되어도 “국내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은 ‘재주를 잘 부리는 곰’이자 ‘구독료로 배를 채워주는 호구’다.
그러니 K문화를 향한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 세계의 박수에 취해 콘텐츠와 지식재산권을 해외 자본과 플랫폼에 빼앗겨서는 곤란하다. 콘텐츠를 잘 만들 뿐 아니라 시장을 장악하는 나라로 올라서야 하는 것이다. OTT와 유튜브를 포함한 소셜 미디어, 팬덤 플랫폼이 하나의 생태계로 확산하는 시대에 K문화가 확고한 영향력으로 뿌리를 단단히 다지지 않으면 영원히 소모품에 머물 수밖에 없다.
씨앗이 될 사례도 있다. 하이브의 자회사가 운용하는 플랫폼 ‘위버스’에서는 여러 기획사의 180개 팀이 넘는 국내외 아티스트들이 팬과 소통한다. 팬들이 실시간으로 콘텐츠를 즐기며, ‘공식 굿즈’까지 살 수 있는 국가 대표 글로벌 팬덤 플랫폼이다. 위버스 이용자는 매달 1000만 명 규모로, 팬덤에 국한되는 한계를 가진다. 유튜브 이용자 25억 명, 넷플릭스 가입자 3억 명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도 넷플릭스, 유튜브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서비스가 한국에서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되려면 더 정교한 대한민국 사용법이 필요하다. 이제는 글로벌 플랫폼 종속을 줄이고, 저작권 수호와 불법유통 대응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발 영상 플랫폼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부산행 KTX를 타는 외국인들이 줄을 잇는 이때, 지역성도 빠질 수 없는 덕목이다. K문화력이 지역경제와 연결돼 지역균형발전을 견인할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부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이 공연과 팬 투어, 국제행사 등과 연계돼야 상승 효과를 낸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에서 지방선거에 나선 주자들이 K문화를 수용할 K팝 아레나, 돔 구장 등을 경쟁적으로 공약하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문화로 세계를 움직이고, 한국의 시선이 곧 산업이 되는 시대. K문화의 힘으로 플랫폼과 시장을 아우르는 온전한 설계도를 완성한다면, 한반도가 문명을 꽃피운다는 예언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2026-04-09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