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小說]실험정신의 成敗
말재주로 기본 構成해체 「당신···」
실험정신이란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연다는 측면에서 매우 값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자기류의 독선이나 혹은 파괴를 위한 부정이라는 자리에 서고 싶은 유혹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새로운 것의 모색이란 항상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서 비롯하므로 대단히 주관적일 수 있고 또한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에서 이같은 실험정신의 성공적 모델로 우리는 李箱을 들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신문학에 국한된 경우지만 李箱이 남겨준 일련의 작품들은 몸부림치는 그의 「벗어남」의 고뇌가 진득이는 것들이다. 李箱의 이같은 작업은 그의 시와 소설에서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있지만 그가 시에서 행했던 지나친 파괴, 극단적인 부정은 긍정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언어의 파괴를 넘어선 부정과 단절은 李箱에서 그쳐버리고 말았다.
결국 李箱이 행한 실험정신의 온당하지 못했던 극단적 파괴는 오늘 실험적인 작품을 대하는 우리들의 관점에 많은 시사를 던져주게 된다.
이인성의 소설에 대해서 논자들은 다양한 관점에 설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이인성의 실험정신에 의한 소산이란 점에서는 일치할 것이다.
소설에서의 이야기 배제, 그것은 정통적인 구성의 해체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소설에서의 話者와 作家와 주인공의 일치, 그것은 결과적으로 화자도 작가도 주인공도 없애버리려는 시도가 된다.
그래서 이인성의 소설은 수필도 잡문도 소설이라고는 더더구나 생각할 수 없도록 독자 앞에 제시된다. (文學思想3)도 그런 소설중의 하나다.
독자여, 이번의 이 소설은 이소설을 읽으려는 당신 자신을 곧바로 겨누고 있다. 당신 자신이란 말 그대로 당신들 각자의 자기 자신이다. 그말은 이소설을 쓰는 나에게 제나름대로 살아 움직이는 수많은 당신들을 「당신」이라는 공집합적 대명사 속에 하나로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은 우선 이인성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를 매우 높은 지적수준의 소유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을 내보여준다. 적어도 「공집합」이라든가 「대명사」라는 용어에 통달되지 않을때 이인성 소설의 독자로서는 실격이다. 우선 그의 문장을 해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인성은 실험적인 자기 소설속에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독자의 동참을 강권한다. 황당무계하므로 독자를 혼동시킨다음 그 기세로 독자를 소설속에 함몰시키려 한다.
이인성이 만드는 소설 속의 실험적 장치로 독자의 동참을 자연스레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言表를 통해 강권하는 곳에 이인성 소설의 허세는 있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같은 말재주로 이어지는 해체된 소설을 독자는 읽어내기가 몹시 힘들게 된다. 이인선이 소설에 대해 행하고 있는 이같은 과격한 부정과 해체는 결국 그것이 그의 말재주 연속이란 결과로밖에 제시되지 않으므로 공감을 얻지 못하고 만다.
한국소설이 새로운 교육제도로 키워낸 세대에 의해 도전 받지만 그것은 한국교육이 결국 서구의 물질만능적 퇴폐주의와 손잡고 있었다는 결과를 이인성의 실험정신속에서 읽어낼 수 밖에 없도록 한다. 한마디로 이인성의 실험정신은 말재주에 의존하는데서 지양되어야하고 그렇지 않을때 그의 소설해체작업은 소비문화적인 산업사회의 병폐속에 있어지는 문학적 앙탈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 것이다.
徐廷仁의 (文學思想·3)는 대화에 의존하는 장면처리로 이야기를 전개하여 기존 소설의 형태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체해서 자기의 것으로 이룩하려는 의지가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인성과 비교할 때 徐廷仁의 소설적 실험은 매우 소극적이지만 성공적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李相文의 (現代文學·3) 韓龍煥의 (文學思想·3) 김호운의 (現代文學·3)들은 정통적인 단편의 구성으로 현실에 대한 아픈 소설적 응전을 행하고 있다.
또한 정연희의 (동서문학·3)은 인간과 동물의 性的관계를 다룬 매우 특이한 소재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獸姦이라는 것과 연관되는 한 지나친 통속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해준다.
東國大교수·문학평론가 金善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