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부산진·동래부 순절도 1963년 軍이 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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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락서원 임원 증언

1963년 당시 안락서원에서 육군박물관으로 이관되고 현재 복사본이 걸려있는 부산 충렬사 전시관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 앞에서 19일 오후 지역 유림들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김경현기자 view@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인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숨겨가면서까지 지켰던 동래의 자존심인데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육사에서 보관하는 거라고요? 수백 년 동안 봄 가을 충렬사 제례를 지낼 때마다 제단 좌우에 내걸었던 귀중한 유품이었는데…."

충렬사 안락서원 박수환 원장의 목소리에 옅은 분노가 묻어났다.

주섬주섬 꺼내놓은 문건은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보내온 서류.

부산진순절도(보물 제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 제392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안락서원에서 육군박물관으로 이관됐는지, 서원 측의 반환 요구에 대한 박물관의 입장을 담은 서류였다.

육군박물관이 밝힌 입수 경위는 이렇다.

1962년 12월 당시 육군박물관장이 안락서원 김모 씨와 순절도 이관에 합의했고, 1963년 1월 안락서원으로부터 이관 허가 회신도 받았다는 것. 안락서원이 자진해서 양도를 했으며, 정당한 절차를 밟은 합법적 행위였다는 거다.

결정적으로 부산 유림들을 화나게 한 것이 이 대목이다.

"1963년 당시만 해도 부산에선 순절도가 중요문화재라는 인식도 없었고, 군사정권 시절에 이관됐다고 해서 강압성과 약탈성만 강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육군박물관의 볼멘소리.

충렬사 매점 옆 자그마한 안락서원 사무실에서 만난 유림들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동래향교 박희찬 전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또 다른 문건을 꺼내놓았다.

2점의 순절도를 뺏긴 1963년 당시 안락서원 임원 9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오강환(87) 옹의 증언을 녹취한 서류.

"1962년 연말 군사교육용으로 순절도를 가져가겠다는 군 당국의 명령이 내려왔다고 했어. 안락서원 임원들과 유림 원로들이 긴급회의를 갖고 이를 거부하기로 했지. 서원 임원들은 순절도를 뺏기지 않으려고 야간에 당번을 정해 숙직을 하면서까지 순절도를 지키자고 결의했지. 나도 자식과 함께 서원 방에서 밤샘을 해가면서 순절도를 지켰지. 그런데 어느 날 육군사관학교 교장 명의로 순절도 2폭을 줘서 고맙다는 감사장과 순절도 복사본 2폭을 보내왔다는 말을 들었어."

정당한 행정 절차를 밟았다는 육군박물관의 설명과는 달리 당시 유림들은 마치 도둑을 막는 절박한 심정으로 순절도를 지켰던 게다.

순절도 이관에 합의했다는 육군박물관의 주장에 대해서도 유림들은 할 말이 많다.

"안락서원의 재산 처분은 원회의 결의에 따라 원장이 집행하는 게 수백 년 동안의 전통인데도 군 당국에서 합의했다고 주장하는 인물은 대표성이 전혀 없는 임원 중의 한 명일 뿐이다." 안락서원 이춘기 이사장의 말이다.

육군박물관이 1963년 안락서원으로부터 받았다며 결정적인 증거물로 내놓은 양도증에는 강요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타자기로 예쁘게 정리된 서류다. "당시 안락서원에는 타자기가 한 대도 없었는데…. 군사 정권 출범 초기 서슬 퍼렇던 시절, 군 당국이 안락서원 명의로 서류를 만들어 와 들이민 거지, 자발적으로 작성한 건 아니에요."

24일 안락서원 원장을 비롯한 임원들과 유림 대표들은 육군박물관에 공식적으로 항의 방문을 하고, 반환을 요구하는 청원서도 제출할 예정이라고 했다. 7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단체행동에 나서겠다는 거다.

충렬사 전시관으로 올라갔다. 설명 카드는 전시된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임을 밝혀두고 있다. 부산 출신 화원 변박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죽기를 각오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부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기록화는, 전쟁의 현장이면서 그림을 제작한 현장에는 현재 복사본으로만 남아 있다.

"역사적 유물은 역사 현장에 있을 때만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당연한 명제에 앞서 복사본을 바라보는 유림들에겐 또 다른 감정이 있다. 그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지켰던 유물을 빼앗겼다는 자괴감이다. "고개를 들고 조상들을 우째 보노…." 이상헌기자 tton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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