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관문화훈장 받은 고고미술사학자 이은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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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의 책들이 삶의 선생님이여'

거실, 큰방, 작은방은 물론이고 베란다와 현관문 입구 조그만 틈까지 빈 공간은 죄다 책으로 빽빽했다.

며칠 전 문화유산 보존과 연구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한 이은창(85·부산 남구 용호동)씨의 집 풍경이 그랬다.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에서 일흔의 나이까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낸 것도 모자라 여든 나이까지 대전보건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낸 고고미술사학자다.

지름 1.8cm밖에 안되는 유리구슬 속에 왕과 왕후로 추정되는 6명의 인물과 백조 6마리, 2개의 나뭇가지를 정교하게 장식한 '미소 짓는 상감옥'은 누구나 한 번쯤은 책에서 봤음직한 유물. 보물 634호인 상감옥 목걸이의 일부분인데, 그걸 발굴한 이가 바로 그다. 1973년 영남대박물관 학예서무과장으로 있던 시절, 경주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했던 유물이다. 머리와 꼬리는 용, 몸체는 거북 모양에다 받침대는 나팔형인 서수형토기(瑞獸形土器·보물 636호)도 그때 함께 발굴했다.

그해엔 고령 양정동 암각화를 연구한 논문으로 교수자격 논문심사를 통과하기도 했다. 51세 때였다.

보물을 발굴하고, 여든 넘게 교수로 활동했던 그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고향인 충남 청양군의 비봉초등학교를 다닐 시절, "고무신 한 켤레 살 돈 없는 빈농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우리 집에 있는 책들이 선생님이여." 선생님이 따로 없으니 책으로 독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히는 부분이 없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교원시험에 합격해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고향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광복 뒤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유적을 조사했다. 백제의 고도였던 부여와 공주가 고향과 가까웠던 이유도 있다. 유적과 문화재의 매력에 빠져 고고미술사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조사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1967년께 대전 괴정동 유적에서 청동기가 쏟아져 나왔다. 밭을 갈다 나온 청동기는 검파형 동기, 방패형 동기, 청동방울, 청동거울, 한국식동검 따위. 교육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그를 불러 수습을 맡겼다. "그때 수습 조사한 결과를 논문으로 썼는데, 처음엔 보통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 이리 글을 잘 쓸 수 없다며 학자들이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등 쟁쟁한 학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고고미술동인회에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그가 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학문적 실력이 배경이 됐다. 심지어 일본의 한 교수는 그가 쓴 논문을 바탕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 그가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유물 기증과 관련해서다. 9대조 할아버지인 이덕성의 초상화(보물 1501호)를 포함해 대대로 내려오던 127점의 고문서와 전적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했던 것.

장서는 3만 권쯤 된다고 했다. 책이 선생님이란 말, 그가 살아온 길을 더듬고서야 그 말의 무게가 제대로 느껴졌다. 막내아들과 며느리도 그의 뒤를 이어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강릉대 사학과 이성주 교수와 부산의 복천박물관 이현주 학예사가 그들이다. "책이 선생님"이란 울림은 그들에게도 전해지지 싶다.

이상헌기자 tton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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