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룡의 의병장이야기] (19) 지하에서 통곡하는 진동의병장 강두필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일제 앞잡이 이용 동족 참살 그만둬라'

1907년 7월 20일, 일제와 그들 앞잡이 내각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빼앗았다. 그리하여 재판장과 경무국장 이하 경찰서장까지 일본인으로 임명하여 의병 토벌에 나섰던 일제는 마지막으로 '비장의 카드'를 뽑았다. 친일 내각으로 하여금 수십 년 동안 길러 두었던 일제의 앞잡이들을 관찰사·군수로 임명하게 하여 자발적이고 경쟁적인 의병 토벌에 나서게 했던 것이다.

윤갑병 함북관찰사, 유혁로 평북관찰사, 이두황 전북관찰사, 이규완 강원관찰사, 김사묵 경기관찰사, 황철 경남관찰사, 박중양 경북관찰사, 최정덕 충남관찰사, 권봉수 충북관찰사, 신응희 전남관찰사, 조희문 황해관찰사, 이진호 평남관찰사, 이범래 함남관찰사가 그들이다. 독립협회 간부를 지낸 후 일진회를 이끌었던 윤갑병(전 만민공동회장)·유혁로·최정덕, 갑신왜란(갑신정변) 때 6대신 참살 행동대원이었다가 일본으로 도망쳤던 신응희·이규완·황철, 을미왜란(을미사변) 때 당시 명성황후 살해를 도왔던 이두황·이범래·이진호, 일본에 다녀온 후 일제의 주구가 되었던 권봉수·김사묵·박중양·조희문이었으니, 이 나라 13도지사는 악랄한 일제 앞잡이들로 채워졌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일제는 보병 10개 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 선발 파견하고, 야포병과 공병부대까지 동원했다. 여기다 일진회의 자경단과 헌병보조원을 수만 명 고용하여 의병 사냥에 나섰으니,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화승총을 든 의병이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었으랴?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이 시기, 강원도 이천(현 북한)을 중심으로 황해도 곡산·신계 지역과 함경남도 접경 지역인 강원도 평강·회양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인 의병들이 많았다. 강기동·강두필·채응언 등의 의병부대가 그들이었다.

1910년 4월 15일, 일본군 헌병대 원산관구장은 통감부 경무총장에게 이례적인 보고를 한다. 의병장이 헌병대에 보낸 격문 내용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것은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함이고,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헌병보조원의 행위는 미물들에게도 웃음거리의 대상이니 그만두라는 것과 헌병대를 공격하겠다는 것. 당당하게 일본군 헌병대에 격문을 보냈던 의병장이 '진동창의장(鎭東倡義將)' 강두필이다.

강두필 의진은 주로 채응언 의진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쳤는데, 1910년 6월 22일, 이천군 회랑동에서 남산역·고산역 두 헌병분견소 헌병과 헌병보조원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 앞서 6월 13일, 황해도 선암헌병분견소를 습격, 분견소장 이하 10여 명을 살상하고, 분견소에 있던 30년식 보병총 13정과 탄약 5천800발 등 분견소 비품 전부를 노획했다. 의병들은 그렇게 일제 총기로 무장하고 사기까지 충천해 있었다. 일제의 비밀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의병은 지난 번 선암에서 탈취한 30년식의 정예한 무기 및 탄약을 사용하는 바람에 크게 우세하여 순식간에 헌병대를 포위 공격했다. 대전 5시간이 되자 헌병대는 휴대 탄약 2천500발을 소모하고 보조원 2명이 전사하였으며, 상등병 1명은 중상을 입었고 기타 인원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강두필 의병은 채응언 의병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연합작전을 구사하여 일본 군경은 매우 두려워했다. 일본군 수비대·헌병대가 합동으로 의병 토벌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장면이 일제의 비밀기록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7월 9일 아침, 선암헌병분견소에서 출장 중인 관구장에게 연락을 위해 떠났던 보조원이 도중에 의병에게 저격을 당하여 부상을 입었다. 현재 곡산군 동북부에서 강원도에 걸쳐 배회하는 의병은 채응언·강석필(강두필-필자 주)이 거느리는 600여 명이다.'

강두필 의병장의 행적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만 49차례 나오고, '독립운동사' 등에 5차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몰연대나 인적사항에 관해선 알 수가 없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지 않았기에 신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고, 그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건국 60주년이 됐는데도 그의 공적에 대한 포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생존권과 민족자존의 차원에서 '촛불집회'가 50회를 넘기고 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느 작가가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의병 혼령이 있다면 지하에서 통곡하리라!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의병에 대하여 이렇게 뜻매김했다.

'의병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즉시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이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전공)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