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국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슬픔] <1> '620㎞ 인간띠 혁명'의 시원 리투아니아
자유·독립의 상징 '발트의 길' 몸으로 기억하다
620㎞는 얼마나 긴 거리일까? 부산∼서울이 400㎞이니 부산∼신의주쯤 될까. 아니, 이보다 훨씬 더 길고 질긴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이다. 1989년 8월 23일 에스토니아 탈린∼라트비아 리가∼리투아니아 빌뉴스를 잇는 '발트의 길'이 완성됐다. 발트의 길은 세계에서 가장 긴 인간 사슬, 인간띠로 상징되는 자유와 독립의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외쳤다. 단결된 하나의 외침으로…. '라이스베스'(Laisves·자유)!' 이후 발트의 모든 것은 그 길 위에서 생동했다. 그 길이 오는 8월 23일 20주년을 맞는다.
1939년 구 소련에 강제 편입
50년뒤 '인간사슬' 엮어 부당성 항변
어마어마한 인원·차량 스스로 동참
마을마다 교회 종소리도 '합창'
1991년 신생독립국으로 재탄생
위로받는 기억일까, 위안의 아름다움일까? 발트3국에 속하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꿈에서조차 잊지 못한 독립의 몸부림을 또 다시 준비하고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들만의 '인간사슬'을 기억하는 행사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곧 스무 살의 청년이 된다니 역사가 새삼 흥미롭다.
이들은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며, 위로받는 기억과 위안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발트국의 현재와 미래의 상징이 될 테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와 독립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개인이든 국가든 말이다. 그래서 자유와 독립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독일 함부르크를 떠난 '에어 에스토니아' 는 두 시간 반 만에 에스토니아 탈린 공항에 도착했다. 활주로에 둔중한 소리를 잠재우고, 승객을 하나 둘 내려놓는 동안 한 무더기 낯선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9년 8월 23일로부터 불어온 듯했다. 이른바 '발트국의 기억'으로 불리는 내 여행의 첫 주제다. 그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까. 역사책을 읽으면서, 아니면 현장을 직접 탐방해서,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을 만나서. 모든 방법은 유효했다. 이미 관련 책을 읽었고 기초적인 언어를 습득했다. 수많은 사진을 보았기에 이미 풍정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런 까닭에 재생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몇 바퀴만 더 되돌려보자. 이날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오늘'인 1939년 8월 23일. 발트국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러시아와 독일, 히틀러와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이른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서로 사이좋게 그들 사이에 끼여 있는 유럽을 나누어 갖자는 비밀협약이었다. 조약에 따라 독일의 동편에 속하는 폴란드 서부 지역은 독일에, 발트국은 소련에 강제 편입됐다. 치욕적인 이날을 떠올려 발트3국은 소련연방의 발트국 지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 무려 620㎞에 달하는 인간사슬. 구속과 속박의 상징이 '사슬'이라면 자유와 독립을 위한 상징도 사슬이었다. 다만 그 사슬은 쇠붙이가 아닌 인간이 대신했다.
필자는 이 길을 따라가야 했다. 에스토니아 탈린∼라트비아 리가∼리투아니아 빌뉴스를 잇는 '혁명의 길'을. 인간과 역사가 만든, 세계에서 가장 긴 띠 '발트의 길'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시발이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다. 우리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남동쪽으로 며칠째 하염없이 자동차를 몰아 빌뉴스에 도착했다. 빌뉴스는 고풍스럽고 아늑했다. 고단한 역사를 지닌 도시라는 생각은 그래서 잠시 멀어졌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리투아니아에서 인간띠가 처음 시작된 지점이었다. 13세기 건국의 시조인 게디마니스 동상이 서있는 빌뉴스 시내 한 광장의 대성당 앞 돌판 위에는 리투아니아어로 씌어진 '스테부클라스(Stebuklas·기적)'가 새겨져 있다. 글씨를 구경하는데 한 시민이 말했다.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돈 다음, 바로 서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들의 숙원은 자유와 독립이었을 것이다. 사실 자유와 독립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지난 50년의 소련 압제에 앞서 또 다른 강대국의 압제가 늘 지속됐다. 18세기 이후 계속된 발트의 숙명이고 아픔이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마침내 이뤄졌다. 1991년 발트 3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되살아났다.
66세의 노시인 시기타스 게다(Sigitas Geda)는 리투아니아 독립운동단체인 '사유디스(Sajudis)'에서 '인간띠'를 기획하고 준비한 조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54㎞ 지점에서 5시간을 보냈다"며 "그 시간 시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행복과 축제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빌뉴스의 인간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100m마다 작은 무대가 세워졌고 그 무대에는 시민들의 지루함을 덜어줄 록밴드와 민속음악단, 불 먹는 곡예사가 자리를 함께 했다. 지금처럼 해가 어슥하게 지는 1989년 8월 23일 오후 7시였다.
시민들이 15분 동안 함께 손을 맞잡고 기도했고 함께 입을 모아 '라이스베스'(laisves)를 외쳤다. '자유'라는 말로 번역되는 라이스베스는 그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때맞춰 마을마다 높이 솟은 교회의 종이 울렸다.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국가에서 국가로 이어지는 종소리의 릴레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숙박한 여관의 노파는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거동이 힘들어 하루 종일 라디오만 들었어요. 저녁 7시를 기다렸는데 교회 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라이스베스'를 외치더라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 그는 또 다시 감동이 되살아났는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종소리는 리투아니아의 옛 수도이자 제2의 도시인 카우나스에서도 울려퍼졌다. 하지만 막상 그날을 기억하며 찾아간 카우나스는 텅 빈 도시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숲과 밭의 굴곡진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그날의 역사는 좀처럼 상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 아름다운 풍정의 실체가 그날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트문화사 연구자로 유학중인 서진석 씨는 당시 카우나스 분위기를 한 지성인의 감동으로 대신 전달했다. "인간의 눈으로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어떤 기막힌 상상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를 몰라 하는 듯했어요. 어마어마한 인원 수, 차량, 사람들의 이동방법을 당시 주최 측은 스스로 준비해야 했을 겁니다. 마치 바닷물을 숟가락으로 퍼내는 것처럼 말이죠."
처음부터 존재하는 길은 없다. 길은 인간이 만들고, 그 길을 따라 또 다른 인간이 지나갈 뿐이다. 그 인간의 길이 곧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이곳 카우나스에서 깨달았다.
띠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단절을 극복하는 이음새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도구로 띠는 너무 숭고한 역할을 도맡은 것이다. 이런 인간띠를 위해 당시 전체 인구의 10%만이 소유한 차량과 버스는 이날의 축제를 위해 자율적으로 동원됐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노래하는 민족'으로 불리는데 전혀 꺼리낌이 없다. 춤추고 노래하며 결국 혁명까지 성취하는 내공, 그것이 인간띠의 숭고한 역사일 것이다.
사실 그들의 노래 전통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웃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마찬가지로 리투아니아 민족은 합창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다이나'(Daina)는 우리의 아리랑 같은 민요다. 농사를 짓거나 잔치, 놀이를 할 때 일상적으로 부르는 노래다. 스크루디체라고 불리는 관악기와 칸클레라는 현악기는 다이나를 부를 때 함께 사용하는 우리의 풍물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야 했던 리투아니아 민족이 4년마다 모여 대합창제를 하는 곳도 바로 카우나스다. 이러니 발트의 '노래하는 민족'이 '노래하는 혁명'을 성사시켰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테다.
리가를 향해 속도를 냈다. 리가는 라트비아의 수도다. 그 중간 지점의 도시가 파네베시스다. 그 길 에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장 혁명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파네베시스에서도 인간띠 준비는 철저했다. 4㎞마다 전통 제단을 세우고 성스러운 불을 그 제단에 올렸다. 당시 간간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지만 불꽃은 오히려 더 크게 타올랐다고 한 시민이 전했다. "하루 종일 노래를 불렀죠. 그리고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 자유의 외침은 불꽃을 태우는 기름이 됐습니다. 불꽃도 춤추고 우리도 춤을 췄지요." 그 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도시의 모퉁이에는 새로운 희망의 불꽃이 춤을 추고 있다. 어둠이 깊다면 그 불꽃은 더 밝을 것이다.
리투아니아 '발트의 길'은 라트비아와의 국경지대부터 '발티요스 켈리아스(Baltijos Kelias)'에서 '발티야스 첼스(Baltijas Cels)'로 언어만 바뀔 뿐이다. sgli@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