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뉴스] 지중해를 무대로 벌어진 문명충돌
해양노마드4 / 르네상스와 동고동락한 해적
르네상스기에 일어난 지중해의 패권다툼은 ‘해상 문명 충돌’이다. 이전에도 비록 유럽 기독교 세계의 선박들을 사라센 해적들이 약탈하고 해안가를 분탕질했으나 북아프리카의 해적세력이란 게 제국의 옷을 입지 못한 일종의 ‘해적 떼’에 불과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 이슬람 해상세력은 동쪽에서 밀려온 오스만 투르크 제국 전위 세력의 옷을 입고 나타나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가 당시 세계의 중심 지중해에서 영토, 패권, 종교를 놓고 진정한 의미의 치열한 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배를 타고 나가서 물건과 사람을 납치해서 싣고 돌아오는 해적질이 섬 전체를 수중에 넣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복행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본질이 바뀐 것이다.
르네상스기 지중해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합스부르크가 황제들의 자존심을 건 일전을 벌인 전장이었으며, 신·구식 무기들이 경합을 벌인 과학의 대결장이었고, 해적과 제독들의 지략싸움터였으며,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무제한적으로 재원이 투입된 총력전의 현장이었다.
유럽 서쪽 세계에서 밀려온 초원의 유목민 투르크가 해적이라는 신발을 신고 뛰어든 길 지중해. 해적들이 제국의 제복을 입은 시기의 내해는 문명과 문명의 대결구도로 출렁였다.
방파제가 무너지다
1453년, 중세 1천년 동안 유럽의 동쪽 끝에서 기독교세계의 방파제역할을 하던 비잔틴제국이 멸망했다.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초원의 유목민 투르크 술탄 메메드 2세에 게 함락된 것이다. 16만 이슬람 병력에 맞선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병력은 고작 7천여 명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해군선단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고 해안선을 따라 성벽이 세워져 도시를 보호하는 천혜의 항구이자 자연적인 방어 요충지였다. 더욱이 이곳은 시리아의 베이루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등 여러 나라가 사용하던 국제 물류의 중심.
1453년 4월 12일 투르크군의 최신 비밀병기 ‘우르반 대포’가 첫 포성을 울린 지 56일 만인 5월 29일 투르크 술탄 메메드 2세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도시는 새로운 이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투르크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다. 비잔틴 제국과 그리스의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했으며 유럽의 오래된 종교적 질서 붕괴에 일조하면서 본격적인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다.
한편 메메드 2세의 야망은 기독교 세계인 유럽 전역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속령으로 삼아서 투르크가 주도하는 ‘이슬람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야망의 달성을 위해서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서구 기독교 세계로 진격하였다. 말을 타는 것이 더 익숙했던 투르크인들은 배의 운항과 배를 짓는 것은 피정복민 그리스인을 이용하고 각종 도료를 비롯한 선자재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조달하면서 해양력의 증강에 힘을 기울여 서진의 고삐를 조인다. 콘스탄티노플 조선소에서 배 짓는 도끼 소리가 쉴새 없이 울려 퍼지자 지중해의 해양강국 베네치아 정보당국은 “투르크가 에게해를 자기들의 바다로 만들려고 한다”는 분석을 했다.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채 10년도 되지 않아서 먼저 흑해가 투르크의 바다가 되었고 1463년에는 배를 이용해서 레스보스섬을 공격, 해양강국 제노바의 식민지를 탈취해버린다. 이어서 7년 뒤인 1470년에는 그리스의 핵심 물류기지 네그로폰테섬을 250척이나 되는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함락시키면서 동지중해의 강자로 떠오른다.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한 술탄의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 에게해로 밀려들어가는 광경을 두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남하해가는 배들의 돛대가 끝나지 않는 숲처럼 보였다”고 베네치아의 스파이는 보고했다.
동지중해를 호령하게 되었으나 투르크인들은 여전히 바다가 익숙지 않은 초원의 유목민이었다. 1480년에는 로도스섬으로 진격을 하지만 성요한 기사단에 패하여 쓴 맛을 보게 된다. 1년 뒤 술탄 메메드 2세가 사망하고 11년 뒤인 1492년 기독교 세계의 아라곤왕과 카스티아 여왕이 이전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겼던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권을 재탈환한다. 이 시기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다. 1500년을 분수령으로 기독교 연합군이 레우카스섬을 투르크에게서 재탈환하는 등 투르크의 지중해를 통한 서진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사실 투르크의 해상 군사력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태생이 초원의 전사였던 그들로서는 바다의 길을 건너는 데 노잡이를 비롯, 배를 움직이는 세력으로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 해양민족들의 노하우를 빌렸다. 군용 갤리선을 스스로 운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 동쪽으로의 물결은 잠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리 해적
그때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8세기부터 10세기 지중해를 공포의 바다로 만든 북아프리카의 ‘사라센 코르세어’ 형제들이었다. 이 코르세어들은 이전부터 지중해에서 활동한 튀니스, 알제리, 모로코, 리비아 등지의 이슬람계 해적으로 주변 이슬람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코르세어는 선장 자신이 이슬람의 토호였고, 부하들을 거의 노예 다루듯이 다뤘다고 하며,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신을 후원하는 이슬람 정권에게 바치는 일종의 사략선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이들이 바로 15세기 말부터 지중해를 괴롭힌 ‘바르바리’ 해적들이다.
이슬람의 공동체인 투르크인은 사라센 코르세어 해적세력을 자신의 해상전력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신앙심이 없는 무리인 기독교세력을 적으로 삼는다는 이슬람의 대의도 만족시키고 서진의 동력으로 이용하는 1석 2조였다. 방대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인된 공복의 위치를 부여한 뒤 이들의 기항지를 투르크인들이 보호해주고 대신 투르크인들은 해양 전투의 필요성이 생기면 이들 해적 떼를 소집했고 나머지 시기는 본업에 충실하도록 놔두었다. 단 해적질에 충실할 때에는 소득의 10-20%와 항구이용료를 납부해야 했다. 전시에는 오스만 제국 해군의 주축이 되었다.
바르바리는 그들의 기지로 사용된 일련의 북아프리카항구를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모로코·알제리·튀니tm와 리비아 서부가 이에 속한다. 바르바리라는 지명은 이 지방의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에서 유래하며, 그리스·로마문명 및 그후 그리스도교 문명과 다른 이질적인 문명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바베리언(barbarian)이 교양 없는 인간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되었다.
해적행위와 오스만 제국의 해군 복무를 겸하기 전부터 이들은 이미 고도로 조직된 코르세어 공동체였다. 르네상스 기간 내내 지중해를 지배하기 위해서 싸운 가혹한 종교전쟁의 최전선에 투입된 이슬람 해양세력들이었다. 그들이 흉악하다는 평판은 거의 전설적이었다. 그들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 종교의 적들과 전쟁을 벌였다. 노략행위의 특징은 보물을 빼앗는 데 보다도 사람들을 납치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몸값이 오를 때까지 인질을 보관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팔아버렸다. 튀니스나 알제리 등의 강제노역장은 해적들이 잡아온 기독교 세계의 개종하지 않은 노예들로 채워졌다.
12세기부터 기독교 세계의 ‘구출 수도회’와 ‘구출기사단’들은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고 숱한 희생을 치르면서 협상을 통해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을 구출하는 데 앞장선다. 자고 나면 가격이 달라지고 변덕이 죽 끓듯했고 부르는 게 가격이었다. 마지막 구출행은 1779년에 이루어졌다. 약 500년간 납치와 몸값지불이 반복된 셈이다. 인간 납치장사가 얼마나 이익을 남기는지 이슬람해적들은 900여 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 후예들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참 역사란 아이러니하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봉사하는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목표는 철저하게 비 이슬람선박으로 제한했다. 오스만제국과 선린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의 선박은 약탈표적에서 제외하였다. 예를 들면 베네치아의 도시국가는 16세기에 투르크와 평화를 유지했기에 베네치아선박에 대한 공격은 한동안 억제된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규모가 작은 쾌속선을 이용해서 유럽 기독교 세계의 선박과 해안마을을 습격했고 북아프리카 해안은 노예와 약탈품을 거래하는 시장이 되어서 붐볐다.
정복자의 옷을 입은 해적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향상된 ‘스타해적’을 양산하면서 지중해 연안을 이슬람의 물결로 물들여갔다.
르네상스의 황혼, 레판토해전
바르바리 해적이라는 신발을 신은 초원의 유목민 투르크의 서진은 1571년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청, 에스파니아, 몰타기사단, 사보이아공국 등이 연합한 신성 동맹의 갤리선 함대와 맞붙은 ‘레판토해전’에서 치명타를 맞게 된다.
연합군의 전력은 갤리선 203척, 소형 갤리선과 범선 80척과 8만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함대의 좌익과 우익엔 베테랑 중의 베테랑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해군장수를 배치한다.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와 잔 안드레아 도리아였다. 총사령관은 해전경험이 없는 26살의 풋내기 돈 후안이었다. 9월 28일 메시나항을 가득 메웠던 연합함대는 투르크함대를 찾아서 동쪽으로 선수를 돌린다. 투르크 함대가 서쪽으로 향했다는 정보에 기인한 것.
한편 투르크 해군은 이번 작전의 지휘를 해적에게 맡기지 않고 궁정의 고관이었던 알리파샤를 임명했다. 그도 해전의 경험이 없었다. 대신 좌와 우익과 후미엔 해적 장수를 배치했다. 전력은 갤리선 270척. 샬루크와 울루치 알리였다.
10월 7일 일요일 아침, 레판토 해군 기지에서 서쪽으로 출항한 오스만 함대와 메시나에서 출항한 신성 동맹의 함대가 그리스 서부의 바깥쪽에 있는 파트라스 만의 끄트머리에서 만나면서 역사적인 전투는 시작되었다. 5시간에 걸친 해전은 기독교 측의 압승으로 막을 내린다. 투르크함대는 전사 8천 명, 총사령관과 바르바로사의 두 아들, 알제총독인 해적 샬루크 등이 전사했다. 더욱이나 숙련된 선원과 노잡이, 군인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대체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고도로 숙련된 전사들의 손실은 쉽게 대체될 수 없으며, 사실상 오스만 군의 살아있는 전통들이 사라졌다. 투르크 해군의 핵심알맹이들을 잃어버린 전투였다. 다만 해적 울루치 알리는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해 해군을 재건하지만 이후 술탄은 투르크해군에게 통상적인 해적행위만 주문한다. 투르크가 서진용으로 신은 해적의 신발을 벗는 계기였다.
레판토해전 이후 신성 동맹은 일시적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로마를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유럽을 향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오직 노를 젓는 전함들만으로 치러진 이 해상 전투는 갤리선끼리의 해전으로서는 마지막해전으로 기록된다.
레판토 전투 이후 세계를 움직이는 추는 다른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해, 부유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가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세계의 패턴을 갖추게 되었다는 평가다. 레판토해전은 투르크의 물결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이슬람의 집이 서쪽으로 확대되는 것을 저지했고 한편으로는 16세기 말 르네상스의 황혼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악명을 떨친 스타 해적들
쿠르토골리= 르네상스 시기 이슬람 바르바리 해적의 대표적 인물을 고른다면 쿠르토골리가 있다. 그가 북아프리카나 그리스출신이 아닌 투르크족 출신이라는 점이 술탄의 눈에 띄었다. 해적 쿠르토골리는 이스탄불 궁정에 불려가 기독교도를 상대로 해적업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한다. 그에게 술탄은 풍부한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쿠르토골리는 곧바로 북아프리카의 튀니스의 수장에게서 튀니스 북쪽 60킬로에 있는 비제르타항을 해적 본거지로 사용허락을 받고 수익의 20%를 수장에게 상납하기로 약속할 정도로 정치적 수완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당장에 푸스타 30척과 6천 명의 병력을 모은 그는 1508년 곧바로 로마의 북쪽 리구리아일대를 습격한다. 이후 대담하게도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급습해서 교황청해군의 기함과 승무원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명성을 올린다. 심지어는 1517년엔 현직 교황까지 납치하려고 이탈리아의 마렘마 평원을 습격하는 대담무쌍한 작전을 전개할 정도로 간이 큰 해적이었다.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쿠르토골리의 습격에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는 굴욕을 겪었다. 술탄은 이런 쿠르토골리를 높게 평가해 이듬해에 투르크해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해적들에겐 인생역전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
가드 알리= 그는 쿠르토골리 밑에서 분대지휘를 하면서 해적질의 잔뼈가 굵은 인물. 쿠르토골리가 후임으로 술탄에게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다. 비쩍 마른 체격에 짙은 피부색, 날카로운 눈빛, 잔인하게 앙다문 입술에 행동도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진정한 해적이었다. 특히 그가 악명을 떨친 데는 붙잡힌 기독교 소년들을 이슬람국가의 궁정에 환관으로 넘긴 데서 기인한다. 환관으로 바치기 위해서 그 소년들을 거세하는 데 유난히 정열을 쏟았다고 하니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가 악마로 비쳐졌을 것이 틀림없다. 교황청의 기함을 사로잡고 코르시카섬을 돌면서 노예사냥에 열을 올리던 그는 1519년 제노바를 치다가 교황청 해군 안드레 도리아에게 붙잡혀 피아노사 섬으로 끌려가 감옥에서 사망한다.
유대인 시남= 가드 알리가 사라진 바다엔 해적질을 지휘할 또 다른 후계자가 나타난다. 유대인 시남이 그다. 유대인들이 해적이 된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왜냐면 유대인들은 가족 밖에 신용하지 않기에 부하를 부려서 조직을 꾸리는 해적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기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유대인 시남은 드물게 다fms 민족과 협력관계를 쌓는 데 성공한 해적이었다.
원래 그는 소아시아의 스미르나 해안 출신 유대인이지만 개종하여 이슬람 교도가 된다. 애꾸눈으로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비스듬히 가린 그는 요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애꾸눈 선장의 효시다. ‘해적스럽다’고나 할까. 그는 잔인할 뿐 아니라 교활하고 약삭빨랐다고 알려진다.
바르바로사(붉은 수염) 형제= 르네상스기를 통틀어서 바르바리 해적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붉은 수염이란 뜻의 바르바로사 형제였다. 레스보스 섬 출신의 해적질을 가업을 한 그리스인이었으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인물. 형인 바바 울루지(1474–1518)는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항해하는 선원으로 경험을 쌓았다. 이때 선원이란 바로 해적이란 단어와 동일하게 생각하면 된다. 에게행의 선박으로 공격하고 트리폴리에서 돌아오던 중 성 요한 기사단의 습격을 받아 포로로 잡혔다. 울루지는 노예가 되어 이집트로 팔려갔다가 3년 후에 풀려난 후 본격적으로 해적일에 나섰다. 철저한 기독교혐오주의자가 된 그는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하이르 앗딘(신의 선물,1475-1546)은 바바 울루지의 동생이다. 생각이 깊고 6개 국어에 능통하고 매우 총명한 인물이었다. 알제를 거점으로 하여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을 이끌고 있었는데 마요르카와 니스를 약탈하고 지중해의 스페인 영지들에 습격을 퍼부으면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을 단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533년 오스만 투르크 술레이만 1세로부터 해군 사령관직에 임명되었으며 1538년 스페인과의 프레베자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547년 사망할 때까지 북아프리카의 광범위한 영지를 빈틈없이 장악했다. 투르크 제국 안에서 2급 시민인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그는 붉은 바탕에 하얀 초승달이 새겨진 투르크제국의 깃발을 펄럭이면서 유럽을 벌벌 떨게하다 1546년 투르크 제국 안에서 한 몸에 존경을 받으면서 편안한 생애를 마쳤다. 지금도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그의 묘소는 참배하는 터키인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바르바로사는 터키해군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SEA&강승철기자ds5bsn@busan.com
TIP/ 지중해와 이슬람 ? 나침반
지중해를 가운데 놓고 아랍인이 주도하는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로 나뉘어 대결해온 긴 역사를 갖는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투르크가 주도하는 이슬람 제국과 기독교를 믿는 유럽 각국의 대결장이 되어서 본격적인 문명 충돌과 종교의 교류 혼합이 혼재한 역사의 장이 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 종교가 되는 데 300년이 걸린 반면, 지중해 전역에 이슬람의 그림자가 짙게 물든 데 걸린 시간은 100년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슬람은 사막 유목민의 종교로 시작, 낙타라는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를 지나 지중해와 마주친 뒤론 이집트인들의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넜다. 그러는 시간은 100여년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 유목민의 DNA를 기반으로 달려간 종교가 이슬람. 지금도 이슬람은 노마드 정신으로 충일하다.
끝없이 펼쳐진 몽골초원의 유목민과 바다의 유목민을 비교해 보면 다를 게 거의 없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사막을 여행하는 것은 거의 비슷했다. 이동하는 방식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낙타와 배, 방향을 알 수 없는 사막과 바다, 하늘을 바라보고 방향을 정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중국인이 발명한 북쪽을 가리키는 신통한 물건 나침반은 초원의 유목민의 손을 거치고 다시 사막의 유목민손을 거쳐 이탈리아인들에 의해서 포터블로 변신해서 유럽에 전해진다. 나침반은 사막을 건너는 데나 바다를 항해하는 데 유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