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실적 잔치의 그늘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살인적인 폭염을 피하기로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은행만 한 곳이 없다. 한데 처음부터 은행이 버젓한 점포를 갖추고 영업한 건 아니었다. 은행(bank)의 어원을 벤치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방코(banco)에서 찾는데,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환전상들이 노상에서 탁자에 저울을 올려놓고 벤치에 앉아서 환전이나 자금 거래를 한 데서 기원했다고도 한다. 변변한 점포 하나 없이 길거리를 전전하던 그때와 비교하면 요즘의 은행은 천국이다.

천국의 한때를 구가하는 요즘 은행의 실적이 공개됐다. 올 상반기 국내 4대 시중은행이 이자수익으로만 11조 원에 가까운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도 무려 1조 원 넘게 늘었단다. 덕분에 당기순이익도 4대 시중은행 모두 1조 원을 넘겼다고 하니 온 나라를 옥죄는 경기 불황은 딴 나라 이야기다. 성과급 잔치에 은행원들의 석 달 치 월급은 중소기업 월급쟁이의 연봉을 넘었다. 우리은행만 빼곤 나머지 시중은행은 외국인 지분이 70%에 육박하는데, 거칠게 계산해도 1조 4000억 원가량의 배당금이 외국인 주주에게 돌아간단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심사가 편치 않다. 이자 감당하느라 에어컨도 못 켜는 서민을 더 덥게 하는 건 막대한 은행 수익의 근원이 '이자놀이'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워서다. 금리가 오를 때 예금 금리는 찔끔 올리고 대출 금리는 큰 폭으로 높인 덕분이다. 4대 시중은행의 원화대출금이 대략 830조 원이니 예대마진 0.1%포인트만 높아져도 앉아서 연간 8000억 원이 넘는 이자수익을 더 챙기는 구조다. 돈 안 되는 기업대출은 모르는 체하고, 경영합리화 명분으로 일자리도 확 줄였다. 고의로 고객의 소득을 줄이고 담보를 누락해 가산금리를 더 붙인 전과까지 떠올리면 그 행태가 '약탈적 금융'이라 해도 과언 아니다.

사상 최대의 실적은 결국 "빚내서 집 사라"며 빚 권하는 사회의 꼬임에 빠져 1500조 원의 가계부채에 허덕이는 서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셈이다. 서민이 힘들수록 돈을 더 벌어가는 은행은 셰익스피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로 묘사한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벤치를 모태로 하는 은행이 벤치에 드러누워 벤치를 독차지하는 꼴불견이다. 은행이 독차지한 벤치를 서민에게 돌려줘야 할 때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