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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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1981~ )

그 방에 오래 있다 왔다 거기서 목침을 베고 누운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는 것 같았고 그저 숨을 쉬는 건지도 몰랐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방에 있자니 오래된 아내처럼 굴고 싶어진 것이다 일으켜 밥을 먹이고 상을 물리고 나란히 누워 각자 먼 곳으로 갔다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깨어나는 일



비가 온다 여보



당신도 이제 늙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나 등이 아름답네요



검고 습한 두 개의 겨드랑이



이건 당신의 뼈



그리고 이건 당신의 고환



기록할 것이 많았던 연필처럼

여기는 매끄럽고 뭉둑한 끝



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 시집 (2016) 중에서
사랑은 사는 일/살아가는 일이다. 이 사는 일에 잠복해 있던 비가 내린다. ‘비가 온다 여보’라고 부르는 시인의 입말엔 ‘오래 된 아내처럼 굴고 싶어’지는 시간의 신비가 생긴다. 매끄럽고 뭉둑한 연필의 끝으로 어떻게 적는가에 따라, 이 세상의 사랑은 달라질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등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일은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처럼 고요하나 격정적이다. 놀라워라. 이런 사랑이여. 그런 사랑이여. 성윤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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