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기찻길 따라 자갈치를 오갔지”… 청사포 해녀 김업이 이야기 #7-2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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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 김업이(69) 해녀 이야기>

내 고향은 해운대 청사포.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가족 덕에 큰 걱정 없이 살았다. 어머니와 언니가 바다에 나가 돈을 벌어왔다. 그들은 해녀였다.

나도 여기서 40년 넘게 물질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건 아니었다. 친구들과 수영하며 놀다가 자연스럽게 배웠다. 곁눈질로 사람들 하는 걸 보고, 테왁을 타고 나가다 보니 물질이 됐다.

스물다섯쯤 해녀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 청사포엔 해녀가 많았다. 서른 명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다들 나이가 들었고, 바다에 못 가는 해녀도 많아졌다. 이제 13명 남았다. 나도 한때 머리가 많이 아팠는데, 몸 성할 때까지 계속 물질하고 싶다.


해운대구 청사포마켓에서 김업이 해녀가 청사포 바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해운대구 청사포마켓에서 김업이 해녀가 청사포 바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청사포라는 자부심

해녀가 많았던 ‘전성기’ 시절. 그때도 제주도 출신 해녀는 없었다. 전부 청사포 사람이거나 청사포에 시집온 사람이었다. 모두 청사포 해녀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왔다.

청사포에서는 5월부터 10월까지 물질한다. 가을에 몸을 조금 추슬렀다 겨울이 되면 ‘우니(말똥성게)’를 채취하러 잠깐 바다에 들어간다. 물질은 주로 앞바다에서 많이 한다. 날이 좋으면 인근 섬에도 나간다. 다른 해녀들은 다릿돌전망대 주변까지 가기도 한다.

청사포는 조류가 세서 물건이 좋다. 소라, 전복, 해삼, 성게 등이 많이 잡힌다. 청사포에서 잡은 물건은 씨알이 다르다. 크고 통통해서 다른 지역에서 난 물건과 한눈에 구별된다.

그래서 청사포 해산물은 자갈치시장에서도 일등품 취급을 받았다. 예를 들어 소라는 제주도보다 뿔은 작아도 알이 크다. 전복은 제주도는 넓적하지만, 청사포는 상대적으로 두께가 굵어 통통하다.

특히 미역 품질이 뛰어나다. 기장 미역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청사포 미역이 제일 좋다고 자부한다. 봄에는 미역 양식장에서 일하는 해녀들도 많다.

청사포 앞바다에서 김업이 해녀가 물질하는 모습.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청사포 앞바다에서 김업이 해녀가 물질하는 모습.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철길 따라 자갈치까지

내가 서른 살 때쯤이었다. 청사포에서 잡은 ‘물건(해산물)’을 중구 자갈치시장에 팔러 갔다. 물건을 머리에 이고 철길 따라 해운대까지 걸어갔다. 거기까지 가야 자갈치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20년 정도를 그렇게 물건을 팔았다. 예전에는 대왕문어도 많이 잡혔다. 양철통 하나가 꽉 찰 정도였다. 그걸 또 머리에 이고 해운대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자갈치에 물건을 넘겨줬다. 돌아오면 해는 다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청사포 앞바다에서 바로 팔 수 있지만, 그땐 참 힘들게 살았다.

청사포에서 물건을 팔아도 해녀복을 입은 채 장사를 한다. 해녀가 물질해 잡은 물건이라 알려주는 셈이다. 다른 곳에서는 도매로 일부 물건을 받아 팔기도 한다던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 청사포 해녀는 그날 잡아 온 물건을 다 팔면 더 이상 장사 안 한다.

웬만하면 빠진 날 없이 물질했다. 돌이켜보면 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생 지냈다. 물질하든지 말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고. 남편에게 돈 달라 할 필요도 없다. 하루 물질해서 얼마 버는지는 남편한테 절대 공개 안 한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수익 공개는 어림없는 소리다. 다른 해녀들도 그렇게 안 한다.


물질을 마친 김업이 해녀(오른쪽 앞)와 청사포 해녀들이 보라성게를 손질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물질을 마친 김업이 해녀(오른쪽 앞)와 청사포 해녀들이 보라성게를 손질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화통하고 여유롭게

지금 청사포에는 ‘해녀회장’이 없다. 옛날에는 있었는데 다들 나이가 들어 자리를 비워뒀다. 우리 막내가 65살 정도 됐을 거다. 물질을 나갈지 말지는 의견을 모아 공동으로 결정한다. 웬만하면 이견은 없다. 청사포 해녀들이 화통한 것도 한몫하고 다들 친하게 지낸다.

청사포 해녀는 여유롭다. 물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다. 물때 따라 다르긴 해도 보통 오전 11시에 물에 들어간다. 다른 지역 해녀는 꼭두새벽부터 물질하러 간다던데, 우리는 조금 천천히 바다에 나가는 편이다. 5시간 정도 작업하다가 오후 4시쯤 물 밖으로 나온다.

옛날부터 그랬다. 아침에 모여 수다 떠는 게 일이다. 드라마부터 자식 얘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가 오간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바다에 들어간다.

욕심도 크게 없다. 그냥 쉬고 싶으면 충분히 쉬고, 날이 궂어도 물질을 쉰다. 특히 청사포 해녀는 오리발을 안 신는다. 그냥 실내화를 신는다. 오리발 신으면 ‘억수로’ 잘 나아간다지만, 없어도 바닥까지 잘 내려가서 굳이 필요가 없다. 앞바다 나가면 물건이 많다. 청사포에서는 욕심낼 이유가 없다.


청사포 앞바다에서 물질하던 김업이 해녀가 전복을 캐서 물 밖으로 나온 모습.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청사포 앞바다에서 물질하던 김업이 해녀가 전복을 캐서 물 밖으로 나온 모습.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용왕님 계신 금바다

해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청사포에서 태어나 해녀밖에 떠오르진 않지만, 아마 농사짓고 살았을 듯하다. 청사포 해녀들도 시간이 남을 땐 밭농사를 한다.

요즘 해변열차도 생기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그래서 바다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직접 재배한 채소를 내다 팔기도 한다. 청사포 밭에 가면 없는 게 없다. 들깨, 콩, 쪽파, 오이, 가지, 고추까지 모두 다 잘 자란다.

물질을 오래 하면서 약을 달고 살긴 한다. 머리가 아파서 힘들 때가 많았다. 바다에서 물질하다가 중간에 나오기도 했다. 요즘은 예전만큼 아프진 않지만, 한때 병원에 다닐 정도였다.

그래도 내게 물질은 소중한 일이다. 해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3~4시간 물질하면 돈을 벌 수 있다. 남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한마디로 바다는 내게 ‘금바다’다.

용왕님에게 자주 기도한다. 날씨가 좋게 해달라고. 물에 들어가면 많이 도와달라 빌기도 한다. 몸 성할 때까지 계속 물질하며 살고 싶다.


※김업이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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