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수확기에 폭락한 쌀값, 어찌하오리까?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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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에도 웃지 못하는 농심… '쌀 시장 격리' 늦춰선 안 된다

산지 쌀값 45년 만에 최대폭 하락
20kg당 지난해 5만 5000원대
올해는 4만 2000원대로 떨어져
농협, 재고쌀 42만 톤 이상 보유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
쌀값 하락 당분간 이어질 전망
정부 ‘양곡관리법’ 적용 매번 실기
재배 면적 감축 피할 수 없는 상황
농가 지원 포함 세밀한 정책 기대

이달 말부터 일부 조생종 벼의 수확이 시작됐다. 하지만 최근 쌀값이 45년 만의 최대 낙폭을 기록하면서 전국 농민들이 잇따라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23일 부산 강서구 죽동동의 한 논에서 진행된 부산 지역의 첫 벼 수확 장면. 정종회 기자 jjh@busan.com 이달 말부터 일부 조생종 벼의 수확이 시작됐다. 하지만 최근 쌀값이 45년 만의 최대 낙폭을 기록하면서 전국 농민들이 잇따라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23일 부산 강서구 죽동동의 한 논에서 진행된 부산 지역의 첫 벼 수확 장면. 정종회 기자 jjh@busan.com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벼 수확기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전국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기대감으로 즐거워야 할 수확기가 오히려 재앙으로 닥쳐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바로 요즘 농민들의 심정이 이렇다. 기상이변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파로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하며 식량 위기를 운운하는 소리가 높지만, 대한민국의 쌀값은 정반대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최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5일 기준 산지 쌀값은 20㎏당 4만 2522원을 기록했다. 딱 1년 전 이맘때 5만 5630원보다 무려 23.6%나 폭락했다. 낙폭으로는 45년 만에 최대치라고 한다. 가격으로는 2018년 3월 이후 4년 5개월 만에 가장 낮다.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에서 판매되는 소매 쌀값 역시 20㎏당 4만 9000원 수준으로 작년의 6만 880원에 비해 24.2%가 떨어졌다. 한국인의 최고(最古)·최대 먹거리인 쌀의 처지가 지금 말이 아니다.


■쌀 풍년이 오히려 재앙

45년 만의 최대 낙폭에 현재 농민들은 망연자실한 상태다. 앞으로의 상황도 별반 나아질 기미가 없다. 안팎의 여건을 감안하면 지금으로선 쌀값 반전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당장 이달 말부터 올해 조생종 벼의 수확이 시작되면서 햅쌀이 출하되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인 벼 수확이 진행된다. 그런데도 아직 지난해 거둬들여 창고에 쌓아 놓은 재고 쌀이 너무 많다.

7월 말 기준 전국 농협에서 보유 중인 재고 쌀은 42만 8000톤으로, 전년도의 23만 7000톤보다 무려 80% 이상 늘었다. 게다가 작년에 생산된 쌀 388만 톤 중에서도 아직 10만 톤 규모가 시중에 남아 있다고 한다. 쌀값 하락세가 당분간 더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전문가들도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햅쌀이 나오면 쌀값은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공급 과잉이 쌀값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보니, 풍년이 바로 재앙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올해도 큰 변수가 없는 한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의 생산량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쌀값 폭락을 넘어 쌀 대란 우려마저 나오는 지경이다.

반면, 이미 알려진 것처럼 쌀 수요의 감소세는 갈수록 뚜렷하다.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00년 93.6kg에서 지난해엔 56.9kg으로 21년 만에 약 40% 가까이 줄었다. 올해는 이보다 더 줄어 50kg대 초반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를 연간 생산량과 비교해 보면 최소 100만 톤 이상의 쌀이 일반 가정 외에서 소비되어야 현재 공급 과잉 상태가 해소된다고 한다.


이달 말부터 일부 조생종 벼의 수확이 시작됐다. 하지만 최근 쌀값이 45년 만의 최대 낙폭을 기록하면서 전국 농민들이 잇따라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24일 강원도청 앞에서 한 농민이 쌀 재고 등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달 말부터 일부 조생종 벼의 수확이 시작됐다. 하지만 최근 쌀값이 45년 만의 최대 낙폭을 기록하면서 전국 농민들이 잇따라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24일 강원도청 앞에서 한 농민이 쌀 재고 등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모습. 연합뉴스

■들끓는 농심

본격적인 수확기를 앞두고 쌀값 폭락 사태를 지켜보는 농심은 타들어 가고 있다. 국내 쌀값은 정부의 미곡 정책에 따라 좌우되는 구조인 만큼 정부의 잘못된 농정을 비판하며,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달 19일엔 전북 김제에서 농민들이 다 자란 논의 벼를 갈아엎으며 쌀값 폭락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했다. 농민 단체의 토론회와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쌀값 폭락, 쌀 정책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전국쌀생산자협회와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5개 농민 단체와 10명의 국회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제대로 된 쌀 정책을 촉구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또 22일에는 농민 단체 회원 등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밥 한 공기 쌀값 300원 보장” 등을 외치며 쌀값 폭락 대책을 촉구했다. 다음 달부터 쌀 수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농민들의 시위와 항의는 더 빈발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농민들이 이처럼 정부를 성토하는 것은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가 쌀값 폭락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양곡관리법에서 정한 대응 조치를 미적미적하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정부의 ‘뒤늦은 시장 격리’ 폭락 불러

농민들이 가장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은 정부의 ‘뒤늦은 시장 격리’ 조치다. 시장 격리는 간단히 말하면, 시장에 풀리는 쌀 공급량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조치다. 한 해의 쌀 수확량이 급증하거나 수요가 급감해 시장에서 쌀 공급 과잉 현상이 심화하면 정부가 시장에서 쌀을 사들여 창고에 보관하며 공급량을 줄이는 것이다. 구체적 실시 근거는 양곡관리법에 명시돼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이 ‘해야 한다’라는 의무 규정이 아니라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는 점이 논쟁거리다. 의무 규정이 아니다 보니, 이 조항에 근거한 시장 격리 조치의 시행 여부가 오로지 정부 당국자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다.

현재 쌀값 폭락의 가장 큰 원인인 지난해 공급 과잉 물량만 해도 농민들과 농민 단체들은 당시 수확 때부터 즉시 시장 격리 조치를 요청했지만,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해 실기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농민 단체들은 법에 규정된 시장 격리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시장에서 쌀을 의무적으로 격리하도록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정부가 적기에 시장의 물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쌀 생산 관련 통계의 정확도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관련 통계가 실제 생산량 등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하다 보니, 정부 정책도 실기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쌀 생산량과 소비량을 과학적인 통계 수치로 추출할 수 있어야 농민들이 원하는 정책도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

■재배 면적 감축 등 불가피

전문가들은 쌀의 공급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속해서 쌀 재배 면적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쌀 소비량 역시 앞으로 더 늘어날 가망이 없는 이상, 재배 면적의 감축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재배 면적 축소에 따른 농민들의 소득 보전을 위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지원책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벼를 대체할 작물 전환도 꾸준히 나오는 방안인데, 최근엔 가공 전용 쌀인 ‘분질미’의 활용에 많은 관심이 쏠린다. 분질미는 쌀이면서도 전분 구조가 밀과 유사해 수입 밀가루 수요를 대체할 수 있다. 쌀 생산량을 줄이면서도 밀의 식량 자급률을 높일 수 있는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노동 강도가 낮아 유리한 벼 재배의 이점을 넘어설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어쨌든 현재 우리나라의 쌀농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앞으로도 쌀농사는 결코 포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현재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가면서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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