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 오를수록 깊어진 붉은 가을…문경새재 도립공원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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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 과거 보러 다니던 영남대로
산성과 개울 사이 잊지 못할 단풍터널 장관
지름틀바우·마당바위 지나며 느긋한 산책
힘들지 않은 오르막길에서 늦가을 정취 한껏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아리랑 노랫가락에 맞춰 조령산은 빨갛게 불타오르며 화려한 춤을 춘다. 산책이나 등산을 즐기는 여행객의 어깨 너머로 단풍의 느낌을 담은 선선한 바람이 부드러운 향기처럼 흐른다. 먼 옛날 선비가 걷던 나지막한 고갯길에서는 난 데 없이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가을의 축제가 펼쳐진다.


■새도 넘기 힘든 고개

제1주차장 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일 낮인데도 빈자리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평일인데도 문경새재 도립공원은 빨간 단풍을 구경하면서 긴 산책을 즐기려고 찾아온 관광객으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먼 제3주차장에 세우고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아직 본격적인 도립공원도 아니건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도로변에 가로수로 심어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는 제각각 노랗고 빨갛게 익어 누가 더 선명한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입구를 향해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하다. 도시에서처럼 서두르고 싶지 않은 표정이 모두의 얼굴에 가득하다. 다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깔깔 웃고, 도로 아래로 내려와 한 장을 더 찍고 다시 깔깔 웃는다.


도립공원 입구에 미니 자동차 여러 대가 서 있다. 구간별로 나눠 운행하는 친환경전기자동차다. 걷기 싫거나, 너무 많이 걷는 게 불편한 사람들이 이용하라며 운행하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작아서 한 대에 9명 정도만 탈 수 있다. 이용객이 제법 많아 운행을 마치고 돌아온 자동차는 쉴 틈도 없이 다시 도로로 나서야 할 형편이다.

문경새재 도립공원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원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고개)다. 조선 태종 때 영남대로가 개척된 덕분에 고갯길이 열렸다.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유명하다. ‘새도 넘기 힘든 고개’ 또는 ‘새로 만든 고개’라고 해서 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남제1관문 단풍터널

미니자동차는 영남제1관문(주흘관) 앞에서 멈춘다. 이곳에서는 모두 내려 걸어가야 한다. 여기서 교귀정까지는 약 2km, 제2관문까지는 3km, 제2관문까지는 6km 정도 거리다. 입구를 기준으로 할 경우 교귀정까지는 왕복 1시간~1시간 30분, 제2관문까지는 2~3시간, 제2관문까지는 4~5시간 정도 걸린다. 고개라고 하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오르막을 걷는다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다. 천천히 움직인다면 걷는 게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문경새재에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 조령산성을 쌓았다. 신립 장군이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패한 게 계기였다. 전쟁에서 혼줄이 나고서야 성을 쌓았으니 이를 두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해야 할까.


제1관문으로 가는 도로에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단풍길이 나타난다. 폭 5~6m 도로를 따라 100여m 가량 빨갛거나 노랗게 잘 익은 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단풍 사이로 조금씩 파란 하늘이 비치기도 한다. 도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산성 안에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왼쪽을 쳐다보면 개울이 흐르고 있다. 단풍 터널 정면으로는 산성 벽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이색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에 사람들은 차마 걸음을 옮길 생각을 못 한다. 그 자리에서 단풍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하거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뒤에는 휴대폰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마저 이우는데

영남제1관문에서 산책을 시작한다. 타임캡슐광장을 지나자 2000년에 조성한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영화 ‘킹덤’ ‘왕이 된 남자’ ‘남한산성’과 드라마 ‘해를품은달’ ‘태조왕건’ 등 많은 작품이 촬영됐다. 세트장을 지나면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타난다. 가벼운 평상복으로, 때로는 제대로 갖춘 등산복으로 저마다 옷차림새는 다르지만 밝고 즐거운 표정은 똑같다.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았다고 해서 ‘지름틀바우’라는 이름이 붙은 희한한 모양의 바위가 산책객을 가장 먼저 반긴다. 풍화작용으로 곳곳이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묘한 형태를 이루게 됐다. 달리 보면 뱀이 머리를 길게 내밀고 주변을 살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형태를 보건대 자연적으로 생긴 연못은 아니고 최근에 인공적으로 만든 모양이다. 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령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산물이 청정수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증거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올해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가라앉았고, 그 주변에는 굵은 모래가 쌓였다.

고려, 조선 시대에 각 지역에 출장을 갔다 서울로 돌아가는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인 원터가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단풍길이 나타난다. 단풍이 얼마나 발갛게 잘 익었는지 온 세상이 온통 빨간 핏빛으로 물든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흙길을 걷는 등산객의 몸과 얼굴조차 단풍에 젖어 빨갛게 변한 것처럼 눈이 착각할 지경이다.


단풍길에 취해 천천히 걷고 있자니 마당바위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문경새재는 험한 산길이어서 과거에는 도적이 많이 설쳤다. 일부 도적은 길이가 5m에 이르는 마당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달려 나가 물건을 빼앗았다. 마당바위 인근에는 주막이 보인다. 새재를 넘던 선비, 상인 등이 하룻밤 쉬면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던 곳이다. 물론 현재 시설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다. 율곡 이이가 지은 시 ‘숙조령’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마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가네.’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업무 인수인계를 하던 교귀정은 주막 바로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교귀정 근처에서 시원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인근에 ‘용추약수’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조령산성을 지키던 군사나 새재를 오가던 나그네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바위를 깎아 만든 샘이다. 샘 인근에는 작은 폭포가 흐르고 있다. 지금은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수량이 적은 편이지만 여름이나 비가 많이 온 뒤에는 제법 볼 만한 풍경을 만들 것처럼 보인다.

자동차로 돌아가기에 앞서 교귀정 앞의 벤치에 앉아 용추약수를 바라보며 잠시 다리를 쉰다. 걸어올 때는 몰랐던 싸늘한 늦가을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인근 단풍나무의 이파리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나뭇가지 하나를 살며시 잡아당겨 본다. 어찌 이렇게 단아하게 잘도 익었을까. 어디 한쪽은 잘 익고 다른 쪽은 덜 익은 게 없이 골고루 물이 잘 들었다. 우리의 삶도 단풍처럼 어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편평하게 익을 수 있을까.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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