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신춘문예-희곡] 산은 말한다 / 주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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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등장인물

사냥꾼

여우목도리

순사1

순사2

남자

어머니

아버지

노루

초저녁. 해가 곧 질 때

어느 산속

1. 첫 번째 산

추운 겨울 깊은 산속.

여우 목도리를 한 사냥꾼, 총을 들고 있다.

사냥꾼: 어디 갔니? 귀찮게 하지 말고 좀 나와라.

사냥꾼, 총구를 겨누며 조심히 움직인다.

사냥꾼: 어디 갔니? 편하게 보내 줄게.

사냥꾼, 총구를 겨누며 조심히 움직인다.

사냥꾼: 어디 갔니? 어디 갔니? 이러면 너만 더 고통스러워져.

여우목도리가 말한다.

여우목도리: 저기 숨었네.

사냥꾼, 걸음을 멈춘다.

사냥꾼: 뭐?

여우목도리: 저기 숨었다고, 답답하네.

사냥꾼: 어디서 뭐라고 하는 거야?

여우목도리: 여기.

사냥꾼: 어디? 누가 따라온 거야? 어디야?

여우목도리: 여기.

사냥꾼: 어디? 장난치지 말고 나와!

여우목도리: 시끄러워. 노루 도망가겠다.

사냥꾼, 거친 호흡을 내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여우목도리: 어지러워.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네 목.

사냥꾼: 목?

사냥꾼은 여우목도리를 내려본다.

손으로 죽은 여우의 털을 만진다.

여우목도리: 간지러워.

사냥꾼: 내가 오늘 너무 뛰어다녔나 보다.

여우목도리: 그냥 집에 가게?

사냥꾼: (머리를 흔들며) 이 소리가 왜 안 사라져? 빨리 내려가서 찬물로 좀 씻어 야겠다.

여우목도리: 날도 추운데.

사냥꾼: 조용히 좀 해라. 조용히 좀.

여우목도리: 왜? 좋잖아. 심심하지도 않고.

사냥꾼: 귀신이 들었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나겠다.

여우목도리: 내가 아직 안 죽었거나.

사냥꾼: 안 죽긴 뭘 안 죽어. 내가 네 머리부터 내장, 뼈까지 싹 도려냈는데.

여우목도리: 잘했다 잘했어.

사냥꾼: (한숨) 귀신 장난 때문에 노루 놓쳤네.

여우목도리: 장난은 무슨, 진지하게 나불대는 거야.

사냥꾼, 여우목도리를 벗어 던지려 한다.

벗겨지지 않는 여우목도리.

여우목도리: 아파.

사냥꾼: 이게 왜 안 벗겨져?

여우목도리: 그만 좀 해. 아파. 아프다고.

사냥꾼: 이게 왜 안 벗겨져?

여우목도리: 찢어지겠어! 아파!

사냥꾼, 온 힘을 써보지만 여우목도리는 벗겨지지 않는다.

사냥꾼: 내가 요물을 죽였네.

여우목도리: 요물은 너야.

사냥꾼: 아가리 다물어라.

여우목도리: 노루 잡아야지.

사냥꾼: 아가리 좀 다물어라.

여우목도리: 노루 저기 있어.

사냥꾼: …

여우목도리: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사냥꾼: …

여우목도리: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사냥꾼, 허리춤에 단도를 꺼내 여우목도리에 댄다.

사냥꾼: 그 아가리 좀 다물어라! 네 몸통 다 찢어 갈겨버리기 전에 아가리 다물어라! 응?

여우목도리: 노루가 널 본다.

사냥꾼: 뭐?

여우목도리: 쟤가 지금 널 봐.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그래, 거기.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거기 있잖아 거기.

사냥꾼: 어디! 어디! 어디! 어디에 있는데!

여우목도리: 이것도 안 보여? 나는 어떻게 잡았어?

사냥꾼, 어디론가 뛰기 시작한다.

여우목도리: 어디 가?

사냥꾼: …

여우목도리: 어딜 그렇게 뛰어.

사냥꾼: …

여우목도리: 땀 냄새 나. 힘들겠다.

사냥꾼, 뛰다 멈춰 숨을 고른다.

사냥꾼: 말 해봐. 알겠으니까 말 해봐. 어디서부터 나한테 들러붙은 거야? 나보단 옆 동네 박씨가 여우는 훨씬 더 많이 죽였을 걸? 노루도 앞 동네 김씨가 훨씬 더 많이 죽였을 걸? 뒷동네 홍씨 할아버지는 곰이며 호랑이도 죽여봤대.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 해봐. 왜 나야? 이 길을 달려도 끝이 없네. 저 길을 달려도 끝이 없을까? 말 좀 해봐. 왜 나냐니까? 애초에 나는 노루를 쫓은 게 맞아? 노루가 지금도 날 보고 있어? 이젠 노루가 날 쫓는 거야? 말 해봐. 말 좀 해봐. 그 나불대는 아가리로 말 좀 해봐. 응?

사냥꾼, 주변을 돌아보며 거친 숨을 내쉰다.

2. 두 번째 산

깊은 산속.

일본 순사복의 2명의 남자.

한 손에 총을 들고 주변을 살핀다.

순사1: 쥐새끼들이야. 쥐새끼들.

순사2

: 쥐새끼는 무슨 바퀴벌레지. 지독하잖아.

순사1: 동물적으로 숨는 게 몸에 밴 민족이야.

순사2

: 그러다 걸리는 것도 몸에 밴 민족이야.

순사1: 이 개새끼 못 잡으면 곤란한데.

순사2

: 잡을 때까지 못 내려간다고 생각해. 내려가면 기무라가 우릴 가만 안둘 걸?

순사1: 개 같은 기무라. 성격이 아주 개 같아.

순사2

: 맞아. 우릴 개처럼 대하잖아.

순사1: 우리한테만 그래, 조센징이라서.

순사2

: 우리 같이 바로 협력한 조센징이 얼마나 된다고? 감사한 줄 알아야지. 개새끼들, 인력난이면서.

순사1: 이 조센징은 어디 있는 거야?

순사2

: 조센징 중에도 아주 지독한 조센징이야.

순사1: 되지도 않는 개 짓거리하는 놈들.

순사2

: 독립이 온다고 개소리 하는 놈들.

순사1: 넌 독립이 안 올 것 같냐?

순사2

: 빠가야로. 절대 안 오지. 넌 올 것 같아?

순사1: 고노야로. 절대 안 오지. 여긴 이제 일본인데.

순사2

: 그걸 인정을 못 해.

순사1: 그러게. 인정을 못 해.

순사2

: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인정했으면 얼마나 살기 편해. 가족들도 편하고 말이야.

순사1: 그래, 우리 누이랑 어머니가 얼마나 편하게 있는데.

두 순사, 웃는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순사1: 뭐야?

순사2

: 저쪽.

순사1: 어디?

순사2

: 저쪽.

순사1: 저쪽에서 난 것 같은데?

순사2

: 아냐, 저쪽.

순사1: 그래, 저쪽일 수도.

순사2

: 아냐, 저쪽인가 보다.

순사1: 어디?

순사2

: 저쪽.

순사1: 그래, 저쪽일 수도.

순사2

: 아냐, 저쪽인가?

순사1: 너 뭐 하는 거야?

순사2

: 뭐가?

순사1: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들어?

순사2

: 제대로 들었어. 저쪽이라니까.

순사1: 아까는 저쪽이라며.

순사2

: 그런데 이제 저쪽인 것 같아.

순사1: 뭔지 봤으면 좋았을 텐데.

순사2

: 노루였던 것 같은데?

순사1: 봤어? 난 못 봤는데.

순사2

: 못 봤지. 노루가 워낙 빠르잖아. 노루 본 적 없나? 얼마나 빠른데.

순사1: 실 없는 얘기 그만해. 노루가 확실 했던 거야? 조센징이 아니고?

순사2

: 그런 것 같네.

사이.

순사1: 어이.

순사2

: 왜?

순사1: 너 뭐야?

순사2

: 뭘?

순사1: 이상하잖아.

순사2

: 뭘?

순사1: 방해하는 것처럼 굴잖아.

순사2

: 도대체 뭘?

순사1: 조센징 잡는 거. 네가 지금 방해한다고.

순사2

: 무슨 소리야? 집중이나 해.

두 순사, 전방에 총을 겨누며 주변에 집중한다.

순사1: 어이.

순사2

: 왜?

순사1: 가족은 잘 있나?

순사2

: 그건 갑자기 왜?

순사1: 요새 안 물어본 것 같아서.

순사2

: 언제는 물어봤나?

순사1: 어이.

순사2

: 왜?

순사1: 가족 잘 있냐고.

순사2

: 왜 그런 말투로 물어보는 거야?

순사1: 어떤 말투?

순사2

: 날 의심하잖아. 내가 뭘 잘못했나?

순사1: 의심 안 해.

순사2

: 그래? 알겠어.

두 순사, 자리를 바꿔 움직이며 주변을 살핀다.

순사1: 어이.

순사2

: 왜?

순사1: 그래서 가족은 잘 있나?

순사2

: 날 아직도 의심하네.

순사1: 아니야 그런 거.

순사2

: 그럼 왜 자꾸 물어봐?

순사1: 내가 자네 가족도 못 물어보나?

순사2

: 어이, 의심은 의심을 낳는 법이야. 그만하지.

순사1: 그래.

순사2

: 어디 간 걸까?

순사1: 숨은 게 아니고?

순사2

: 안 보이잖아.

순사1: …

순사2

: 날 의심하는군.

순사1: 아냐.

순사2

: 여기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면 더 멀리 간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되잖아.

순사1: 아무 소리도 안 났어.

순사2

: 그래, 그럼 계속 여기서 찾아보지 뭐.

순사1: 널 의심하는 게 아냐. 그리고 너일 리가 없잖아?

순사2

: 나일 리가 없지.

순사1: 그래, 너일 수는 없어. 네가 정말 맞다면…

순사2

: 맞다면?

순사1: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나와 있었던 모든 일들이 거짓이라는 말이잖아. 그건 너무 잔인해.

순사2

: 그래 그건 너무 잔인하지.

순사1: 상실의 시대야. 난 내 유일한 친구를 잃을 수 없어.

순사2

: 날 계속 의심하네.

순사1: 아니라니까!

순사2

: 의심은 의심을 만들고 결국 진실이라고 속여. 멍청하긴.

순사1: 넌 천황폐하를 모시고 있나?

순사2

: …말할 가치가 없어.

순사1: …그래, 내가 잠시 이상했어. 좀 더 이동해보자. 너 말처럼 도망갔을 수도 있으니까.

순사2

: 그래.

순사1: 그런데.

순사2

: 왜?

순사1: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가족은 잘 있나?

순사2

: …

순사1: 미안해. 정말 궁금해서 그래. 우리 가족은 잘 있거든. 누이와 어머니 둘 다 나 덕분에 굶지 않고 잘 계셔. 우리가 이런 얘기를 했었나? 안 했지. 우리 정도면 그래도 이제 서로 가족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순사2

총구를 돌려 순사1의 가슴을 향해 쏜다.

총소리.

순사1, 그대로 쓰러진다.

순사2

: 빠가야로.

산속 바위 뒤에서 남자가 나온다.

남자: 이걸 어떻게 합니까?

순사2

: 그냥 어떻게든 지나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자: 잘하셨습니다. 이 자가 그 정도로 의심했으면 고발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순사2

: 아뇨… 못했을 겁니다.

남자: 예?

순사2

: 이 자는 고발 못했을 겁니다.

남자: …

순사2

: 총소리 때문에 다른 순사들이 이리로 올 겁니다. 빨리 이동하시죠.

남자: 좋습니다. 이 산 넘어 임시 독립군 기지가 있습니다. 서두릅시다.

순사2

: 예.

순사2

와 남자, 쓰러진 순사1을 남겨두고 급히 사라진다.

3. 세 번째 산

깊은 산속.

어머니와 아버지가 손전등을 켜고 두리번 거린다.

아버지: 현수야!

어머니: 현수 너 어디 있는 거야!

아버지: 현수야!

어머니: 그만 나와!

아버지: 현수야!

어머니: 현수야! (소리치며) 빨리 안 나와?

아버지: (한숨) 에라이.

어머니: 애가 어디까지 간 거야 도대체.

아버지: 죽으려고 환장한 거지.

어머니: 자꾸 그렇게 무섭게 하니까 애가 도망가는 거 아냐.

아버지: 내가 뭘? 잘못했으면 혼이 나야지. 그럼 그냥 방치 해?

어머니: 알겠다고. 근데 현수가 도망친 적은 없었잖아.

아버지: 도망은 무슨 지가 어딜 간다고.

어머니: 그래서 찾았어? 지금 세 시간째야. 해도 지기 시작했고.

아버지: 여기 산으로 올라갔다고 진기네 엄마가 그랬다며. 더 갈 데도 없어.

어머니: 그냥 경찰에 신고할까?

아버지: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쪽 팔리게 경찰서 들락거리게?

어머니: (소리치며) 김현수! 너 안 나올 거야? 엄마 아빠 여기까지 왔잖아!

아버지: 이 새끼 덜 맞아서 그래. 또 남자 새끼가 어디 웅크리고 숨어 가지고 벌벌 떨기나 하고 있겠지.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어머니: 또 때려? 그러다 또 도망가면?

아버지: 그럼 또 맞아야지. 안 도망갈 때까지.

어머니: (한숨) 애가 그러니까 당신 싫어하는 거 아니야.

아버지: 그래도 교육 똑바로 시켜야 돼. 진기는 혼자 운동장에서 농구도 하고 인사도 싹싹하게 하잖아. 근데 현수 이 새끼는 애가 비리비리해가지고 어디 나가지도 않고 말이야.

어머니: 그냥 말로 따끔하게 혼내고 말자.

아버지: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애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거야. 이제 고등학교 가봐. 바로 왕따 당할 걸?

어머니: …

아버지: 김현수! 지금 나오면 아빠가 안 때릴 게! 진짜로!

어머니: 정말?

아버지: 조용히 해. 자! 셋 셀 동안 나와! 하나! 둘! 셋!

사이.

어머니: 여기 없나?

아버지: 여기 뒷산에 갈 데가 어디 있어? 이 근처 말고 다른 데는 다 가봤는데.

어머니: 산 넘어서 다른 데 간 거 아냐?

아버지: 얘 어디 갈 데 있어? 여기 산 너머에 친구 있냐고.

어머니: 아니? 전혀 없지?

아버지: 거 봐. 우리 동네에도 친구가 없는데 여기 넘어서 갈 데가 어디 있겠어?

어머니: 그럼 정말 여기 숨어있다는 거야? (소리치며) 야! 김현수! 엄마 아빠 이제 추워! 빨리 안 나와?

아버지: 에이씨, 좀 전 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아. 김현수! 이제 그만 나와!

어머니: 진짜 넘어갔나?

아버지: 이 새끼가 진짜 얼어 죽으려고 환장했나.

어머니: 여기 숨어 있으면 안 얼어 죽어?

아버지: 그러니까 좀 잘 찾아봐.

둘은 손전등으로 여기저기를 살핀다.

어머니: 으스스하다.

아버지: 경찰서 간 거 아니겠지?

어머니: 경찰서?

아버지: 여기 산 넘어 경찰서 있지 않아?

어머니: 어머나.

아버지: 에이, 이 새끼 경찰서 갔네!

어머니: (가슴에 손을 대며) 잠깐만, 나 심장 뛰어.

아버지: 내가 뭐라고 했어? 현수 새끼 인생 패배자야. 고자질이나 할 줄 알지.

어머니: 가서 무슨 말 했을까?

아버지: 맞았다고 했겠지! 에이씨, 가정폭력이니 뭐니 지랄 떠는 소리나 듣겠네!

어머니: 그러니까 왜 자꾸 때리는 거야! 당신 때문에 이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녀!

아버지: 나 때문에? 당신은 안 때렸어?

어머니: 내가 언제 때렸어?

아버지: 당신도 애 머리 툭툭 때리잖아. 영어 단어 못 외운다고 때리는 거 내가 다 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머니: 나는 그냥 툭툭 건드린 거지! 당신은 매로 때리잖아! 매로만 때려? 주먹으로 그냥 마구잡이 패기까지 하면서!

아버지: 내가 뭘 마구잡이로 팼다고 그래? 잘못했을 때 훈계 목적으로 몇 대 때린 거지.

어머니: 어머, 기억 못 하는 척하는 거야, 진짜 기억을 못 하는 거야? 회식하고 들어온 날 현수 방 들어가서 그냥 때린 거 몰라?

아버지: 에이씨, 당신도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어? 당신도 좀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아니냐고.

어머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도 당신한테 맞을까 봐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지!

아버지: 참 나, 어이가 없네?

어머니: 뭐가?

아버지: 왜? 신고 당하면 당신도 피해자라고 말하게?

어머니: …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점점 다가간다.

아버지: 맞잖아.

어머니: 아, 아니야! (한숨) 주변 잘 봐봐. 어디 쓰러져 졸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아버지: 잘도 그러겠다.

어머니: 김현수! 현수야!

아버지: 김현수! 김현수!

어머니: 에이씨, 사과를 좀 하자.

아버지: 뭐? 사과를 해?

어머니: 아니, 애가 어디 숨어서 안 나오는 거면 미안하다고 해서 좀 마음을 풀어주자고.

아버지: 그런 식으로 하면 애가 우리 진짜 우습게 본다?

어머니: 아니 사과까지 해도 안 나오는 거면 여기 없는 거 아냐? 그러니까 사과하고 안 나오면 산을 넘어가든, 내려가서 동네 다시 돌아보든, 아니면….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 경찰서 가보든가 해야지! 뭐 어떻게 해!

아버지: 에이씨….

어머니: 현수야! 이제 그만 나와! 엄마가 미안해! 빨리 내려가자! 위험하잖아 여기!

아버지: …

어머니: 뭐해? 안 해?

아버지: 김현수! 빨리 안 나올래! 아빠가 미안해! 지금 나와도 안 때릴게! 어서 나와! 아빠가 미안하다!

사이.

아버지: 잘도 나온다.

어머니: 아니 진짜 어디로 간 거야!

‘아악!’비명소리 같은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깜짝아!

아버지: 고라니야 고라니.

고라니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다.

어머니: 어우 시끄러워.

아버지: 어디서 계속 울어대는 거야? 고라니 소리 처음 들어봤지? 군대에서 엄청 많이 들었었는데. 소름 끼쳐. 비명소리 같잖아.

아버지, 손전등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리고 이동한다.

어머니: 어디 가 무섭게!

아버지: 아니 계속 울어대잖아. 오랜만에 고라니 한번 보고 내려가게.

어머니: 그만 내려가자. 울음소리가 재수 없어.

아버지: 저기 찾았다!

어머니: 고라니? 어디?

아버지: 잠깐, 뭐야 저거?

어머니: 뭐가?

아버지의 손전등이 어느 한 나무 위쪽을 비춘다.

손전등 불빛이 나무 위를 비추자 교복 넥타이로 목을 매 죽은 현수가 보인다.

어머니: 어머… 어머….

아버지: 현, 현수야….

어머니: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아버지: 아니야… 아니야….

어머니: 현수야… 현수야…

아버지: 아빠가 미안해… 이건 아니야… 현수야… 아빠가 미안해….

고라니가 풀숲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가 점점 사라진다.

4. 다시 첫 번째 산

추운 겨울 깊은 산속.

여우 목도리를 한 사냥꾼, 총을 든 채 숨을 가쁘게 내쉰다.

사냥꾼: 얼마나 뛰어온 걸까… 아무리 뛰어도 이 산 밖으로 나가질 못하겠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난 잘 살려고 한 거야. 내 가족 먹여 살리려고 사냥한 것밖에는 없다고! 아가리 좀 열고 대답 좀 해봐! 응?

여우목도리: 소리 좀 그만 질러. 시끄러워.

사냥꾼: 난 어떻게 해야 해?

여우목도리: 뭘 어떻게 해? 노루 사냥해야지.

사냥꾼: 집에 돌려보내 줘… 날 기다릴 거야.

여우목도리: 노루가 널 본다.

사냥꾼: 어디! 어디!

사냥꾼, 사방에 총을 겨누어 본다.

여우목도리: 저기 있잖아. 저기.

사냥꾼: 여기?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여기?

여우목도리: 저기 노루 눈 안 보여? 아직 해가 다 안 떨어졌는데도 빛나. 아무래도 산신님인가 봐. 영롱해.

사냥꾼: 산신님? 내가 여기서 잡은 노루가 몇 마리인 줄 알아? 이 썩을 여우새끼야! 사람 홀리지 말고 내 몸에서 꺼져! 꺼지라고!

사냥꾼, 소리를 지르며 단검으로 목도리를 찌른다.

단검은 목도리를 뚫고 사냥꾼의 목도 찌른다.

사냥꾼: 아악!

사냥꾼은 쓰러진다.

여우목도리: 미련하다.

사냥꾼: (흐르는 피를 막으며) 그만해! 그만해!

여우목도리: 노루가 널 본다.

사냥꾼: 어디! 노루가 대체 어디에 있는데!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아파. 너무 아파.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여우목도리: 노루가 다가온다.

사냥꾼: 뭐라고? (총을 겨누며) 어디?

여우목도리: 저기.

사냥꾼: 어디!

여우목도리: 여기.

사냥꾼: 뭐?

여우목도리: 여기 네 앞에.

어느새 노루가 사냥꾼의 앞에 있다.

노루가 고개를 내려 사냥꾼을 내려다본다.

사냥꾼은 노루의 모습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노루: 저기 있잖아. 나도 다리가 아파. 나도 피곤하고 나도 배고파.

저기 있잖아. 나도 걱정돼. 나도 가족이 기다려. 나도 무서워.

나도 짜증 나, 나도 화가 난다고.

산은 너희한테 얼마나 더 내줘야 하는 거야? 사냥하게 해줘. 숨게 해줘. 도망가게 해줘. 땅에 뭘 묻게 해줘. 살게 해줘. 자게 해줘. 오줌싸고 똥 싸게 해줘. 등산하게 해줘. 산책하게 해줘. 밥 먹게 해줘. 심지어 죽게 해줘. 그 외 너무 많아.

저기 있잖아. 여기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항상 도망가고 누군 쫓아가고 그걸 다시 누군가 쫓아가고 또 쫓아가고 반복하고. 여긴 계속 그래. 뭐가 태어나면 금방 죽고 다시 태어나면 또 금방 죽고 또 죽고 또 죽어.

그래, 여기서 내려가 봐. 여기서 내려간다고 산에서 나간 걸까. 산은 곧 땅이야. 땅은 곧 산이야. 어디든 똑같아. 여긴 특별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가 특별하게 죽이고 살리고 은밀하게 이루어내고 있는 모든 일들. 결국 모두 땅에서 일어나는 거야. 수치스러워. 그걸 바라보는 게 너무 수치스러워. 계속 도망가. 이 땅끝엔 뭐가 있을까. 도대체 거기엔 뭐가 있을까. 다시 산 입구가 있겠지. 덧없어. 참 얄궂어. 안 그래? 무엇을 그렇게 쫒으며 뛰어다녀? 정말 넌 노루를 쫓고 있었던 걸까? 넌 뭘 쫓고 있었던 걸까. 넌 뭘 위해 그렇게 달렸을까. 난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나도 이 목도리처럼 될까. 머리는 어디 잘나가는 집 벽에 걸리고 몸은 누군가의 목에 매달려 말을 걸게 될까. 그러면 넌 죽으면 어떻게 되지. 너도 머리가 걸리고 목도리가 되나? 아니, 땅으로 간다. 넌 땅으로 간다. 네가 쌓이고 쌓여 산은 높아진다. 그렇게 산이 된다. 네가 지금 닿아 있는 땅 위에 풀이 곧 너의 자식이자 너의 어머니다. 서로를 먹고 서로를 삼켜. 우린 고로 하나야. 자 뛰어 도망가. 또 너의 손으로 너의 가족들을 죽여. 너 자신을 죽여. 시간은 잘 흘러간다. 영원히. 공허하고 허무하게. 그렇게 억겁의 시간은 흘러간다.

긴 사이.

사냥꾼: 노루야. 날 집으로 보내줘.

노루: 그래. 어서 가자.

사냥꾼 총구를 돌려 자신의 턱을 겨냥 후 방아쇠를 당긴다.

총소리.

사냥꾼은 쓰러진다.

노루가 사라진다.

노루가 풀들을 해집고 뛰어가는 소리가 곧 바람이 되고 곧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된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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