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역대급 호황의 그늘 ‘협력업체 임금 체불’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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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통영·고성 체불 근로자 증가
대부분 대형조선소 하청 소속
지난 2년간 수주 물량 늘었지만
일감 풀리려면 반년 이상 소요

한 조선소에서 근로자가 용접하는 모습. 부산일보DB 한 조선소에서 근로자가 용접하는 모습. 부산일보DB

“밖에선 수주 대박이라고 떠들썩하지만, 하청 현실은 딴판입니다. 한 곳 걸러 한 곳은 일손이 없어 문을 닫았고, 여러 달째 개점휴업인 작업장이 부지기수예요.”

9년 차 용접공 김민수(38) 씨. 5년 넘게 일하던 업체가 폐업하는 바람에 허망하게 거리로 나앉은 게 딱 작년 이맘때다. 사외협력사 중 그래도 제법 튼실하다고 소문난 업체였지만, 길고 긴 보릿고개를 넘지 못했다. 김 씨는 “같이 일하던 동료 태반이 두석 달 밀린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났다. 노동청에 신고했지만 1년이 다 되도록 기다려 달란 말뿐”이라고 푸념했다.

국내 조선업계가 모처럼 맞은 수주 호황에 신바람을 내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선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해 고통받는 노동자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불황기의 수주 공백 후유증에 일감이 바닥나 경영난에 허덕이던 영세 협력사들이 임금을 못 주게 되고, 이로 인해 인력난이 고착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12일 고용노동부 통영지청에 따르면 전국적인 임금 체불 감소 추세에도 경남 거제·통영·고성 지역에서는 지난해 체불 근로자와 체불 임금이 오히려 증가했다. 전국 임금 체불은 2019년 31만 9000여 명에 1조 5862억 원으로 정점을 찍은 후, 이듬해 27만 2000여 명에 1조 4443억 원, 2021년 22만 7000여 명에 1조 2334억 원, 지난해 21만 7000여 명에 1조 2202억 원으로 감소세다. 반면 거제·통영·고성에서는 2019년보다 지난해에 오히려 체불 금액이 늘었다. 2019년 5094명, 228억 원에서 1년 뒤인 2020년 5994명, 293억 원으로 늘었다가 2021년 4190명, 255억 원으로 줄더니 지난해 4507명, 295억 원으로 다시 증가했다.

체불 근로자는 대부분 대형조선소의 협력업체 소속이다. 최근 조선업 부침이 이런 현상을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업은 2015~20년 최악의 불황기를 맞았다가 2021~22년 호황기를 맞았다. 불황기에 조선업은 코로나19 악재와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국가 간 물동량 급감, 국제 유가 폭락에 따른 해양프로젝트 중단 등의 여파로 조선 발주 시장이 얼어붙어 된서리를 맞았다. 대형조선사의 ‘수주 절벽’은 영세 협력사를 ‘생존 절벽’으로 내몰았다. 지난해까지 거제 지역 조선협력사 500여 곳 중 100여 곳이 휴·폐업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협력사 노동자가 5000여 명이다. 이 중 상당수는 퇴직금은커녕 밀린 임금도 못 받았다.

다행히 지난 2년 동안 발주 시장이 살아나 수주는 늘었지만 설계, 자재 확보 기간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일감이 풀리려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를 버텨내도 예전처럼 공장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 일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사외 협력사로 구성된 거제 성내협동화공단협의회 이성신 회장은 “직영 노동자의 열 배가 넘는 하청 노동자가 선박 건조의 90% 이상을 수행하는 게 한국 조선의 현주소”라며 “업주들도 갑갑하다. 떠난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려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데, 현실은 밀린 임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전국 임금체불 현황. 고용노동부 제공 전국 임금체불 현황. 고용노동부 제공

이에 통영지청은 임금체불 총력대응체계를 가동하기로 했다. 특히 노동자들의 체불 걱정 없이 설 명절을 맞도록 오는 20일까지 ‘체불예방·청산 집중지도기간’을 운영한다. 이 기간 휴일이나 야간에 발생한 긴급 신고에 대응할 수 있도록 근로감독관 비상근무를 실시하고 갈등 현장에 즉시 출동이 가능한 ‘체불청산기동반’도 운영한다.

임금체불 사건은 신속·적극·엄정 3대 원칙에 따라 대응한다. 단순 체불사건은 전담 감독관을 지정해 권리구제 지원까지 일괄처리하고, 재산 관계 수사를 강화해 재산을 은닉하거나 자금을 유용하는 등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체불 사업주는 구속수사할 방침이다. 또 임금체불 혐의가 상당함에도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에 불응할 땐 적극적으로 체포영장을 신청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명절 전 대지급금(옛 체당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처리 기간을 한시적으로 14일에서 7일로 단축한다. 대지급금은 기업 도산 등으로 임금 받지 못할 때 국가가 사업주를 대신해 일정 범위의 체불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황정호 통영지청장은 “고금리, 고물가로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취약계층에 임금체불로 고통이 가중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면서 “체불 걱정 없이 따뜻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예방과 청산 활동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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