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아름다운 것이 강한 것이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미술평론가·미학 박사

한반도 뒤덮은 무궁화 자수 작품 가슴 뭉클
독립운동 헌신한 이름 모를 여성들 떠올려

일제강점기 ‘한반도 무궁화 자수 지도’(작가 미상).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일제강점기 ‘한반도 무궁화 자수 지도’(작가 미상). 국립여성사전시관 제공

3·1절을 기념하는 상징물은 태극기이다. 일제의 눈을 피해 만들고 소중하게 품속에 감추었다가 만세운동 당시 꺼내 흔들었던 그 태극기가 3월엔 거리마다 펄럭인다. 내겐 3·1절이면 꼭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한반도 전체가 무궁화로 뒤덮인 자수 지도이다. 이 자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화려한 아름다움과 처연한 슬픔, 비장하고 강인한 힘과 같은 모순된 기운 속에서 가슴 저리는 감동을 느꼈다. 작품을 보며 나는 혼잣말로 “아름다운 것이 강한 것이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여학생들이 자주독립의 염원을 담아 수를 놓아 만든 한반도 무궁화 자수 작품으로, 만든 사람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작품들이 여럿 남아 있다. 작품마다 꽃의 표현 방식이나 색깔 등은 다양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동일하며, ‘무궁화 삼천리금수강산’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기도 하다.

만세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은 많은 곳에서 여성 주도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 외에도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 참여를 독려하고 군자금을 모아 의병 활동에 가담했던 윤희순, 교사 재직 중 학생들과 함께 비밀 여성독립운동 단체 ‘송죽회’를 결성했던 김경희, 일본에서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들어와 배포하고 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활동했던 김마리아, 신채호의 아내로서 3·1운동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간호사 독립운동 단체 ‘간우회’를 만든 박자혜, 만주 무장항일 조직에서 활동하며 일제 총독 처단을 시도한 남자현, 조선의용군 항일 투쟁 최전선에서 여자 부대를 지휘했던 ‘조선의 잔 다르크’ 김명시 여장군,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로 전투력을 길러 광복군 비행대 작전을 세운 광복군 권기옥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들은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또 여성 독립운동의 더 큰 부분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역사의 뒤편에서 더 많이 이루어졌다. 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독립운동에 나섰을 때 그들의 어머니, 아내, 딸들은 함께 군자금을 모으고 연락책과 밀사 역할을 했으며 남성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입히는 생존을 위한 뒷바라지를 하면서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안살림도 도맡았다. 한반도 전체에 무궁화가 가득한 자수 작품은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은 모든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생각나게 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무궁화를 중요한 상징으로 도입하게 되었을까? ‘무궁화’는 조선시대 이후 이름이고 그전에는 ‘목근(木槿)’ ‘근화(槿花)’ ‘순(舜)’ 등으로 불렸다. 중국 고서에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로 지칭한 내용이 나오는데, 당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최치원도 신라를 ‘근화향’(槿花之鄕·무궁화의 나라)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후 여러 문서에 신라와 고려를 근화향이라고 불렀던 것이 발견된다. 조선시대 장원급제자 머리에 무궁화를 꽂았고 혼례 때 입는 활옷에 무궁화를 수놓았다.

이런 상징성은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892년 5냥짜리 은화에 무궁화꽃과 가지가 새겨졌고 1900년 문관 대례복에도 무궁화가 금빛으로 장식되었다. 1902년 제정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표지에는 중심부 태극을 무궁화가 둘러싸고 있다. 국가적 상징으로 사용되던 무궁화는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의 상징이자 통합의 구심점으로 발전하는데, 그 계기는 ‘애국가’의 원형으로 보이는 ‘무궁화가’의 등장이었다. 1897년 8월 13일 독립협회 주최 조선 개국기원절에 배재학당 학생들이 처음 부른 후 경축 행사 때마다 선창된 ‘무궁화가’ 후렴구인 ‘무궁화아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젼하셰’는 현재 애국가 가사와 같다.

무궁화는 새벽에 꽃이 피고 오후에 졌다가 해가 지면 떨어지지만, 다음 날 다른 가지에서 새 꽃이 피어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 불린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무궁화를 조국 독립의 표상이자 민족의 희망으로 내세웠다.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문화계몽 운동을 이끌며 전국적인 무궁화 보급에 앞장섰던 남궁억과,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근화여학교를 설립해 여성 교육·계몽을 주도했던 차미리사는 배화학당에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찾아 온 학생들에게 민족 독립의 의지와 삶의 희망을 불어넣는 구국 교육에 헌신했다. 이들이 무궁화 자수본을 고안하고 여학생들이 수를 놓아 삼천리금수강산 13개 각도마다 무궁화 한 송이씩 피어 있는 정성스러운 자수 작품들이 완성되었다. 이는 한반도의 자주독립을 알리고 설득하기 위한 홍보 선전용으로 국내와 해외에 널리 퍼졌다. 눈부시게 빛나는 무궁화가 한반도 전역에 활짝 핀 자수 지도는 아직도 우리의 심장과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