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장르에 충실한 ‘이니셰린의 밴시’·‘플레인’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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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화가 인기입니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관왕에 오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장르를 쉽게 규정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공상과학(SF), 액션, 코미디, 드라마, 어드벤처 등 여러 장르의 요소가 녹아 있습니다.

지난 15일 개봉한 외화 두 편은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는 작품입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블랙코미디의 교보재 수준이고, ‘플레인’은 흥미진진한 액션 스릴러의 표본입니다. 두 영화 모두 장르만 입맛에 맞으면 후회하지 않을 수작입니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와 '플레인'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누리픽쳐스 제공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와 '플레인'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누리픽쳐스 제공

단절이 불러오는 증오…‘이니셰린의 밴시’

‘도어 슬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격유형 검사인 ‘MBTI’를 하다가 알게 된 용어인데요.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것처럼 일순간에 관계를 단절해버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기자처럼 ‘INFJ’ 성격유형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돌이켜보니 내 가치관에 맞지 않는 ‘선 넘는’ 언행 탓에 관계를 단절해버린 사람이 몇몇 떠오릅니다.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에도 도어 슬램이 등장합니다. 아일랜드의 외딴 섬마을 이니셰린에 사는 콜름(브렌단 글리슨 분)과 파우릭(콜린 패럴)은 매일 오후 2시면 동네 술집에서 만나는 소문난 ‘절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콜름은 파우릭을 유령 취급합니다. 파우릭이 이유를 캐묻자 콜름은 “그냥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라고 대답합니다.

하루아침에 절교를 통보 당한 파우릭은 끈질기게 콜름에게 달라붙어 속내를 추궁합니다. 콜름은 파우릭과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느꼈고, 남은 인생은 사색과 작곡으로 마무리하고 싶다고 털어놓습니다. 콜름과 ‘즐겁고 평범한’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한 파우릭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콜름의 결심은 단호합니다. ‘다시 말을 걸면 내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겠다’며 제발 자신을 가만히 두라고 부탁하기까지 합니다.

‘쓰리 빌보드’(2018)로 블랙코미디의 정수를 선보인 마틴 맥도나 감독의 신작 ‘이니셰린의 밴시’는 절교한 두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줄거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21세기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맥도나 감독의 탄탄한 각본과 배우들의 명연기가 조화를 이뤄 흡인력이 상당합니다.

영화의 배경인 1920년대 아일랜드는 내전이 한창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절친하게 지내던 두 사람이 소통의 부재로 증오심을 쌓는 과정은 내전과 비슷한 양상을 띱니다. 시덥잖은 명분으로 자기 손가락을 잘라내 파우릭의 집 앞에 던지는 콜름이나, 극심한 피해를 감수하고 전쟁을 벌여대는 인간들이나 이해하기 힘든 건 매한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아일랜드 요정 ‘밴시’의 경고에도 파국으로 치닫는 두 사람의 모습에선 예고된 비극으로 힘차게 달려갔던 어리석은 인간 역사가 보입니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는 또 다양한 인간 군상과 복잡다단한 인간 감정을 시사합니다. 멍청하고 지루하지만 다정한 파우릭도, 사색과 음악을 즐기며 후대에 길이 남을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하는 콜름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입니다. 대립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 다정함과 자아성취가 양립할 수는 없는 걸까 자문해 보게 됩니다. 자신의 강점으로 다정함을 내세우면서도 난폭하게 변해가는 파우릭과 모차르트가 언제적 사람인지 헷갈리는 헛똑똑이 콜름은 씁쓸한 실소를 자아냅니다.

고즈넉한 자연경관이 만들어낸 영상미와 배우들의 호연도 관람 포인트입니다. ‘킬러들의 도시’(2008)와 ‘세븐 싸이코패스’(2012)에 이어 세 번째로 맥도나 감독과 호흡을 맞춘 콜린 패럴은 팔자 눈썹을 한 시골 촌뜨기 파우릭을 완벽하게 연기했습니다. ‘킬러들의 도시’ 이후 두 번째로 맥도나 감독과 함께 한 브렌던 글리슨의 연기도 안정적입니다.

올해 1월 제80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이니셰린의 밴시’는 작품상과 각본상, 남우주연상까지 3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이어 지난 13일 열린 제95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선 주·조연 배우 4명이 모두 연기상 후보에 오른 것을 포함해 총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돼 화제가 됐습니다. 여우조연상 후보였던 케리 콘돈은 파우릭과 함께 사는 똑똑한 여동생 시오반을, 남우조연상 후보였던 배리 케오간은 경찰인 아빠에게 학대 당해 심리가 불안한 청년 도미닉을 훌륭하게 소화했습니다. 다만 ‘이니셰린의 밴시’는 후보에 오른 9개 부문에서 모두 수상의 고지를 넘지 못했습니다.


영화 '플레인'. 누리픽쳐스 제공 영화 '플레인'. 누리픽쳐스 제공

주말 킬링타임으로 제격인 제라드 버틀러의 ‘플레인’

제라드 버틀러가 주인공인 액션 영화엔 일종의 공식이 있습니다. 고난도 액션으로 악당들을 때려잡다가 위기의 순간에 희생적인 영웅정신을 발휘해 결국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는 식입니다. 스토리가 단조로워 지겨울 수도 있지만, 완급 조절에 능한 감독만 만나면 재미있고 통쾌한 팝콘무비가 탄생합니다.

영화 ‘플레인’은 다행히 후자에 속합니다. 줄거리부터 흥미롭습니다. 책임감 강한 여객기 기장인 토렌스(제라드 버틀러 분)는 연말에 14명의 승객을 태우고 여느 때처럼 조종간을 잡습니다. 오랜만에 아빠와 새해를 맞이하기로 한 토렌스의 딸은 비행 직전에 전화를 걸어 ‘늦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하지만 ‘고물’ 비행기는 악천후를 만나자 고장나 버리고, 호송 중이던 살인 전과자 ‘가스파레’(마이크 콜터 분)를 포함한 모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다행히 영국공군 출신의 베테랑 기장 토렌스는 기지를 발휘해 외딴 섬에 불시착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통신이 끊겨 구조 요청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가스파레를 감시하던 경찰관은 비상착륙 과정에서 숨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하필 이 섬은 분리주의자와 용병이 득시글거리는 무법지대입니다.

‘플레인’은 긴박한 전개 속에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녹여낸 고전적인 액션 스릴러물입니다. 꽤나 현실적인 설정과 사실적인 액션이 몰입을 돕습니다. 승객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캡틴’ 토렌스는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인 가스파레는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캐릭터입니다. 토렌스와 가스파레의 묘한 공조, 항공사가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과 무장세력 간의 충돌씬도 재미를 더합니다. 어설픈 신파를 최대한 배제한 것도 호감 요인입니다.

관객 평가는 대체로 좋은 편입니다. 기자처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본 관객들이 ‘의외로 재미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17일 현재 ‘플레인’의 CGV 골든에그 지수는 94%로 양호한 편입니다. “최근 본 한국 영화보다는 재밌었다”는 평가도 적지 않아 쓴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사실 앞으로 상영이 예정된 한국 영화 중에도 기대작은 많지 않습니다. 올해 2월 기준 한국 영화 관객 점유율은 최근 20년 중 가장 낮았다고 합니다.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석권하는 외화들을 바라보는 영화인들의 심정도 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 영화계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영화 '플레인'. 누리픽쳐스 제공 영화 '플레인'. 누리픽쳐스 제공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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